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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26 23:30:26
Name 글곰
File #1 사본__20190526_151514.jpg (1.29 M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넷째 날, 먹는 게 제일


  친구 가족은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났다. 시끌벅적하던 숙소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낯선 분위기 속에서 어영부영 오전을 흘려보내고, 점심에는 제주도로 내려온 후 처음으로 프라이팬과 식칼을 잡았다. 식사 준비와 설거지, 분리수거와 아이를 씻기는 일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 나의 일이었다. 협의를 거쳐서 정한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솜씨가 딱히 좋지는 못하다. 단지 세 종류의 프라이팬으로 굽고 튀기고 볶고 지지며 힘겨운 세월을 간신히 돌파해 왔다. 냄비를 쓰는 일은 한 달에 한 번도 드물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에어프라이어를 들이면서 비로소 딸아이는 프라이팬을 쓰지 아니한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열풍에 말라비틀어진 브로콜리와 기름을 듬뿍 끼얹어 돌린 냉동식품이 과연 건강에 좋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에어프라이어는 집에 놓아두었고 제주도에서 내게 주어진 건 오직 프라이팬뿐이었다. 더군다나 숙소에는 가스레인지 대신 인덕션이 구비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제주도에서 처음 한 요리는–그걸 요리라고 불러줄 만큼 관대하다면-꽤나 참담했다. 달걀프라이는 프라이팬에 눌어붙었고 익숙지 않은 식칼로 썬 파프리카는 괴이한 모양이었다. 식탁 위에서 가장 훌륭한 반찬은 방금 뜯은 김이었고 그 다음은 어제 마트에서 산 김치였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물론 마트 특가 세일 때 산 햇반이었다. 물론 아이는 내가 직접 지은 밥보다 햇반을 더 잘 먹어서 나를 기쁘게 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아내와 잠시 교섭을 벌여 합의를 도출했다. 이제부터 아침은 내가 차린 밥. 점심은 밖에서 제주도 맛집. 저녁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하자고.  

  오후에는 집 근처에 있는 미로공원으로 향했다. 제주도에 미로공원이 여럿 있지만, 메이즈랜드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은 개중에서도 꽤나 규모가 크고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건만 입장료 또한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다행히도 시설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나는 지도에다 코를 박은 채 3단계에 걸친 미로 속으로 가족들을 이끌었다. 다행히도 가족들이 아빠의 방향감각에 의구심을 품기 전에 우리는 출구에 도착했고 딸아이는 신나게 종을 쳤다. 이후 사진을 찍으라고 강요하는 듯한 장미정원을 구경하고, 미로박물관에서 여러 가지 퍼즐 체험을 마친 후 우리는 메이즈랜드를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함덕해변 인근 서우봉광장이라는 곳에서 열린 벼룩시장이었다. 아내가 벼룩시장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을 이제야 알았다. 오후 네 시간 동안 열리는 벼룩시장은 작은 규모였고, 상인들 중 몇몇은 어제 제주시내의 벼룩시장에서 만났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아무래도 제주도는 이런 형태의 벼룩시장이 꽤나 활성화되어 있고 상인들은 마치 오일장을 찾아다니는 방물장수처럼 날마다 돌아다니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들 듯 아이들은 바다를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벼룩시장이 개최된 곳 옆이 함덕해변이었기에 딸아이는 자연스레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도중에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졌다. 수건을 준비하지 않았던 아내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부들이 싸우는 이유는 대체로 큰 건수가 아닌 사소한 차이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아이가 손으로 모래를 만지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지만 아내는 질색을 한다. 나는 기름기 묻은 접시는 반드시 물에 한 번 헹군 후 따로 두어 설거지를 준비하지만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에다 다른 접시를 포개 놓는다. 이런 사소한 차이들은 조금씩 쌓여가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원인이 되곤 한다. 그런 일이 대여섯 번쯤 반복되고 나서야 부부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그래서 아내는 아이가 준비 없이 바다에 들어가면 온통 흙투성이가 될 것을 몹시 걱정했고, 나는 집에 가서 씻으면 될 걸 뭐 하러 걱정하느냐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했다. 머릿속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 현명함이 가정을 평화롭게 한다. 그래서 딸아이는 신나게 놀았고, 때마침 내려준 비 때문에 놀이가 일찍 끝나자 나는 아이를 번쩍 들고 씻는 곳으로 가서 손발을 씻겼다. 아내는 물티슈로 딸아이의 팔다리에 묻어 있는 모래를 떨어내 주었다. 가족 모두가 만족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아이는 몹시 만족해했다. 그럼 됐지 뭐.

  대충 먹은 점심 때문에 뿔이 난 배를 달래기 위해, 저녁은 제주도의 흑돼지구이 체인점인 도민회관에서 먹었다. 제주도에는 ‘근고기’라고 하여 한 근 단위로 고기를 파는 방식의 고기집이 여럿 있는데 도민회관도 그 중 하나다. 고기는 상당히 비싼 편이었지만 상당히 맛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다만 한 근, 600그램이라고 표기된 고기의 양은 확실히 그보다 적어 보였다. 쳇.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바람은 더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내일 온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밤이 깊을수록 바람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혹 도로시네 집처럼 숙소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아내는 혼자 자기 무섭다는 이유로 아이를 꼬드겨서 함께 자러 들어가고, 나는 거실에 홀로 남아서 버림받은 남편의 자유를 만끽하며 오늘도 글을 쓴다. 무탈한 하루였다.

  내일 아침은 벼룩시장에서 산 베이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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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teful Days~
19/05/26 23:37
수정 아이콘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제주도 흑돼지는 그냥 동문시장이나 서문시장 같은데에서 사서 주변 정육식당으로 가서 먹는게 제일 나은거 같습니다.. ㅠ.ㅠ
19/05/27 22:25
수정 아이콘
정...육...식...당...(메모중)
Je ne sais quoi
19/05/27 00:21
수정 아이콘
제주 물가가 상당히 비싼 편이죠 ^^;
19/05/27 10:07
수정 아이콘
한여름에 함덕 간 적 있는데 넘모 이쁘더군요
19/05/27 22:25
수정 아이콘
예전에는 햇볕 내리쬐는 여름에 갔고 이번에는 흐린 날 오후에 갔는데, 둘 다 괜찮더군요.
Hammuzzi
19/05/27 10:25
수정 아이콘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19/05/27 22:30
수정 아이콘
안타깝게도 저는 모든 게시물의 결론이 남편의 잘생긴 얼굴로 귀결되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매일 불경처럼 서러워하고 있습니다. 흑흑.
제미니
19/05/27 15:11
수정 아이콘
제주도 돼지는 어지간하면 다 맛있죠. 그런데 너무 비싸서 정육식당만 이용하게되네요;;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관광객들 상대하기 시작하고 고기값이 폭주하고 양도 표기된거보다 적은 느낌이고 정육식당말고는 잘 안가게되더라구요.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다음편 기대할게요~~
영혼의공원
19/05/27 15:24
수정 아이콘
19/05/27 22:27
수정 아이콘
다행히도 매우 멀쩡합니다. 다만 내일 우도는 못 가겠네요. 배가 안 뜰 거 같아요.
하얀소파
19/05/27 15:4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다음편 기대합니다.
김솔로_35년산
19/05/27 16:11
수정 아이콘
호우로 인해 장르가 바뀌지는 않..겠죠?
19/05/27 22:27
수정 아이콘
호우로 인해 도로가 침수되고 외부와의 연결이 차단된 숙소. 그리고 나타나는 하키 가면을 쓴 남자.
악마의 마수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글곰이 일어난다!
비싼치킨
19/05/27 20:46
수정 아이콘
식칼들고 간첩 잡으러 가시나 했는데....
19/05/27 22:28
수정 아이콘
그냥 평범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에인셀
19/05/27 22:30
수정 아이콘
2-3편 시 구절 넣어두신 걸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번엔 못 찾아서 시무룩.. 어딨는 건가요ㅠㅠ
19/05/27 22:33
수정 아이콘
없는데요. ('' ) ( '')
다음 편에는 십삼인의 글곰이 도로를 질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콩탕망탕
19/05/28 11:45
수정 아이콘
"버림받은 남편의 자유"..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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