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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7/17 19:18:46
Name   Samothrace
File #1   ten_chelovek_siluet_ruki.jpg (170.2 KB), Download : 2
Subject   파수꾼들의 고대사 5 (수정됨)




 망명인사 (5)

 “오늘따라 유독 더 신경질적이네. 낮에 그 고생을 해서 그런가.”
 사포가 혼잣말로 핀두스를 두둔해보지만 딱히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는 느낌이다. 잠자코 입씨름을 구경하던 마부만이 조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무녀와 세속사제에게 출신을 묻는다.

 “그럼 그쪽도 아테네 사람이오?”
 “아뇨, 저희는 코린트 사람입니다.”
 미모사는 그 칠흑 같은 눈으로 신탁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답해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사포가 의외라는 듯이 그녀 쪽을 쳐다본다.
 “코리트인이라고? 당연히 테베 사람인 줄 알았는데.”
 “화를 피해서 테베로 도망쳐 왔던 것뿐.”
 “화는 무슨 화?”

 물어봤자 더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넌지시 종잡을 수 없는 단서만 몇 개 던진 채 말문을 닫아버린다. 무녀 속성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지...

 “실은 유곽의 기녀였다던가?”
 사포는 조금 심술이 나서 얄궂은 것을 물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에게선 대답이 없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가 보다. 그게 아니면 대답할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답하는 걸지도. 왠지 어제부터 미움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얘기가 끝나나 싶었는데 마부가 또 말을 보탠다.
 “그러고 보니 코린트에선 매춘으로 아프로디테 신전에 공납하는 창부들도 많다지. 그런 여자들을 신녀라고도 하더이다.”
 “미모사는 제우스 신전의 무녀였습니다.”
 보다 못한 세속사제가 파계 무녀를 변론했다. 한 백년 만에 말한 것 같았다.

 “헌데 자네는 테베의 신관이었다 하지 않았나?”
 “그건 일신상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더 숨길 필요는 없겠죠. 의원님께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석 달이나 나를 속여먹었으니 죄송할 만도 하지, 허허.”
 파폴리아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또 꾸몄다.

 “의식이니 뭐니 많이도 배웠겠수다.”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죠.”
 “신관에다 종교에 환장하는 코린트 사람이었으니 말이우.”
 “제사나 봉헌 같은 걸 주로 배웠습니다. 속세에서는 불필요한 일들이죠.”

 문득 파폴리아스가 의뭉스런 미소를 짓더니 다시 세속사제를 돌아본다.
 “신관이면 귀신도 퇴치하고 그러나?”
 “귀신 말인가요?”
 난데없는 얘기에 아이온도 내심 의아해했다.

 “그래, 귀신 말이네. 그 소문 못 들었는가? 몇 년 전부터 코린트 인근에서 귀신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러면서 슬쩍 사포의 눈치를 살핀다.
 “아테네에서는 그런 소문 없던가?”
 “글쎄요.”
 “최근 소문으로는 말일세, 그 귀신이란 것들이 그림자 속에서 나온다더군. 자기 그림자 속에서 말이네. 거기서 나온 귀신이 자기를 잡아먹고 자기자신 행세를 한다는 거야.”
 “알고 지내던 사람이 실은 귀신이었다든가 뭐 그런 얘깁니까?”
 “허허... 거, 사람 참. 분위기 잡치지 말게나.”

 “그림자라.”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미모사가 가만가만 입을 뗐다. 눈꺼풀을 내리깔며 뭔가 의미심장한 전조라도 느꼈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신묘한 어투.

 “왜? 신탁이라도 내리려는 거야?”
 사포가 산통을 깨보려 하지만 미모사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그러고 보니 제가 자주 꾸는 꿈에도 나오거든요. 그림자가.”
 “들어보고 싶네만. 자세히 이야기해주겠나?”
 파폴리아스의 청원에 따라 그녀가 나긋나긋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전 안에서 저는 사람 같은 그림자와 마주쳐요. 제 키와 몸의 굴곡을 꼭닮은 그림자. 꿈에서, 그 그림자와 저는 마주보고 있어요. 서로를 응시하죠. 그러다가 그림자의 얼굴에서 천천히 제 얼굴이 나타납니다. 마치 흐릿한 거울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처럼.”

 달빛을 받아 은은하던 사포의 낯짝이 삽시간에 시퍼래진다.

 “그건 조금 불투명한 유리 같아서, 그 너머로 신전의 기둥들이 이어지는 게 보이기도 하고, 내부 풍경과 제 모습이 언뜻언뜻 겹쳐져서 비치는 게 보이기도 했어요. 제 얼굴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는 건, 그 불투명 유리 같은 그림자의 작은 굴절들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지?”
 다들 숨을 죽였다. 딱 한 사람, 아이온만이 관심 없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울에 비친 모습에 불과했지만 머리부터 서서히 곡면을 이루며 그 그림자는 곧 제가 됩니다. 그건... 호흡하고, 초점을 잃은 채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살아숨쉬는 저였어요.”

 사포는 그녀의 묘사를 듣고 있자니 거의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낮에 있었던 전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몰입감이었다. 파도처럼 떨림이 전신을 덮쳐온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전율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밀밭이었다. 꿈에서 보던 그 밀밭.
 어느새 너는 높게 자란 밀밭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거기서 너는 뛰다 지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인다.

 ‘또 그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다. 매번 꾸던 꿈이랑 상황은 비슷했지만 이상하게 실감이 다르다.
 그리고 앞에는 사람 실루엣. 아니, 그림자... 그림자랬지... 근데 어떻게 밤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지? 가까이 가서 보자, 그것은 창문처럼 너를 비추면서 동시에 그 뒤편 경치를 비추고 있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과연 불투명 유리 같은 질감이다. 누구였더라? 그걸 말했던 게... 그러나 주위는 온통 밀밭이어서, 얼핏 보기에는 이쪽을 비추는 건지 저쪽을 비추는 건지 확실치가 않다. 그저 밀들을 비추고 있을 따름이다. 그마저도 불투명한 투영 속에 앞과 뒤가 섞여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그러짐이 사라지고 맑은 평면이 된다. 그러자 그걸 들여다보고 있던 너의 얼굴도 그 투영 속에서 조금씩 뚜렷해진다. 그러더니 마침내 그 속에서 네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너무 긴장해서 너는 무기를 쥘 때와 비슷한 악력으로 빈손을 꽉 쥐었다. 때문에 손이 땀으로 흠씬 젖는다. 식은땀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소름이 끼쳐서 넋이 다 나갈 지경이었다...


 문득 정신을 다시 차리니 아까 그 장소 그 자리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모사는 꿈 얘기를 계속 들려주고 있었고, 파폴리아스와 마부는 아직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온은 여전히 딴청이다.

 사포는 파도가 지나간 자리처럼 마음이 허전해진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던 걸까, 손바닥을 펼쳐보니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지... 혼란해하다가 겨우겨우 고개만 들어 미모사를 다시 쳐다보았다. 뭔가 중요한 말이 지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제 마지막 기억일 지도.”


---
언제까지 쓸지는 모르겠지만 한 편은 다 끝내고 싶네요.
지적할 게 있다면 피드백 주시기 바랍니다~



Miz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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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18 00:39
고대 그리스 배경인가요?? 흥미롭네요. 스크랩 해서 잘 읽겠습니다. 요즘은 인터넷하면 정치글 피드백하는게 일상이라 피곤했는데, 읽을거리가 생겨서 좋네요. 다음편 고대하겠습니다.
Samoth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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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18 01:0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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