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6/02/07 16:21:46
Name orbef
Subject 이공계의 길을 가려는 후배님들에게..2
안녕하세요.

지난 번에 글을 한번 쓰고는 그정도의 장문을 다시 쓸 엄두가 나질 않아서 계속 눈팅만 하고 있었읍니다. 근데 뭐 어차피 제 주관적인 생각을 쓰는 것이지 만고의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느정도는 부담없이 써도 될 것 같아서 오늘 이어서 쓰게 됐습니다.

저번의 제 글의 요지는, 1. 어렸을 때의 막연한 몽상에 가까운 꿈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좋지않다는 것, 2. 이공인력으로서의 능력이라는 것은 몇가지로 나뉘어지고, 자신이 그중 어느방면에 강점이 있고 어느방면에 약점이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점. 이렇게 2가지였습니다.

오늘 이어서 쓸 부분은, 지난번 글의 2번째 이야기에서부터 이어집니다. 쓰다보면 뒷부분에 가서는 자연히 이공계열 연구 활동의 피라미드 구조에 대한 얘기가 될 듯 합니다..

이게 뭐 자랑하려고 쓰는 글이 아님은 저번에 확실히 했으므로 그냥 편하게 글을 쓰려고 하고, 뒷부분 이야기를 하려면 공부 얘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일 편할듯 해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공부'를 잘 합니다. 고등학교때 등수는 전국등수 단자리 안에 몇번 들었었고 대학교 들어와서도 대부분 전장을 받으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자신감이 끝없이 커졌었고, 대학원에 진학할 무렵에는 '내가 하고자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습니다. (결과는 저번 글에서 말씀드린 대로 완전 폐인의 생활로 끝났습니다. )

비슷한 얘기지만, 가끔씩 신문에 등장하는 영재들 있잖습니까? 전 그런 글을 읽으면 한숨만 나옵니다. 그런 영재들의 판단 기준이란게 결국 언제나 '가르쳐보니 습득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더라' 입니다. 다섯살에 곱하기를 깨우치고, 열살에 미적분을 하고, 열두살에 양자역학 문제를 풉니다. 근데 그 영재들은 누구나 알다시피 나중에 뭐가 됐는지, 어떤 성취를 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 개인적 경험이나 저런 가짜 영재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결국 가진 재능이란게 '남이 이미 터득한 것을 배우는 재능' 입니다. 좋게 말하면 이해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방력이죠. 고등학생때 양자역학 문제를 풀면 천재? 미적분학에 재능 좀 있는 아이한테 채찍질 좀 하면 대충 흉내내는건 그다지 어려운게 아닙니다. 중학교때 토플 600? 말하기도 하품납니다. (제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젠장 미국온지 2년이 지났는데도, 미국놈들 유머는 도저히 못알아듣겠습니다.) 이런건 결국 전부 '배우기'일 뿐입니다. 범재의 능력이 좀 많을 뿐이지, 이런걸 영재의 재능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능력을 가지고는 결국 '남들이 해보지 않을 것을 앞서나가서 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공인력으로서의 영재적 재능이란게 뭘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재능의 분류는 이렇습니다.

1. 아직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해결한다면 대단한 임팩트를 가지는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 ( 착상 )
2.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발견하는 능력 ( 기획 )
3. 그 방향에 따라서 열심히 풀어나가는 능력 ( 좁은 의미에서의 연구 )

제가 가진 재능은 3번입니다. 유능한 교수님이나 유능한 연구팀장의 지도하에 열심히 일하는 장기판의 졸이죠. 물론 이런 재능도 필요합니다. 그냥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연구인력은 사실 저 3번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1,2번의 인력이 마음놓고 손발 쓰듯 부리게 돼죠.

돌이켜보겠습니다. 저번 글에서 저는 이공계에서 '연구'에 기여하는 능력은 크게 3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취향에 관한 이야기도 했었지만, 이론 & 실험에 대한 취향은 본인이 쉽게 알 수 있으리라 믿고 다시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상상력
분석능력
추진력 - 이건 이공계와 관련된 재능이라기 보다는, 사회생활 일반에 걸친 재능이므로 논외

상상력이 1,2번의 재능과 관계된 능력일 것이고, 분석능력이 3번의 재능과 관계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3가지의 재능을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3번의 재능을 가진 관리자가 1,2번의 재능을 가진 직원을 잘 다뤄서 성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 자신이 가진 재능의 컬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점
2. 자신의 재능을 보완할 수 있는 팀에서 일하는 것이 최고의 결과를 뽑는다는 것
3.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재능이 가장 인정받는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점

정도입니다.

A 회사의 연구활동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착상 : 셀폰에 들어가는 aaa 부품이 너무 크니 좀 더 작은 부품을 개발해보자 - 1명
기획 : bbb라는 기술을 이용하면 굉장히 작은 부품이 구현 가능하다 - 10명이 회의를 하지만 실제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그 회사의 언제나 동일한 핵심 인물 1~2명
연구 : 냅다 설계 & 제작 & 테스트 - 20명

B 라는 다른 회사는 이럴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기업 연구는 이렇습니다)
착상 : 셀폰에 들어가는 aaa 부품이 너무 크니 좀 더 작은 부품을 누가 개발하고 있느냐? - 1명
기획 : ccc라는 회사가 개발하고 있다. 특허는 이러이러하게 피해갈 수 있다 - 1~2명
연구 : 냅다 베끼기 & 특허 피하기 & 테스트 - 20명

C 라는 회사는 또 다릅니다.
착상 : 이번에 B 라는 회사에서 이런 부품을 개발하는데 우리한테 요런 부분을 저번처럼 개발해 달랜다. - 외부에서 주어짐
기획 : 우리 회사가 언제나 해오던 일이네. 그때처럼 궈궈 - 0명
연구 : 예전에 했던 일을 조금만 바꿔서 다시 해주기. - 20명

A 라는 회사에서의 스타 플레이어는 착상의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B 라는 회사에서는 기획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죠
C 라는 회사에서는 저같은 실무진이 대접받을 것 같습니다.

좀 억지스러운 예를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어떤 회사에서는 단순 반복적 일을 하는 인력이 최고로 대접을 받고, 어떤 회사에서는 게으름 피우다가 가끔 아이디어 내주는 책상 물림이 에이스노릇을 합니다. 결국, 재능이라는 것에는 좋은 재능 나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속한 조직이 필요로 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그게 좋은 재능이 되는 것이지요.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재능이란게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만 잘 찾으면 분명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뱀다리 : 누구나 1,2번의 재능을 갖길 원합니다. 누구나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기를 원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 재능은 타고 나야 한다고 믿습니다만, 정히 그 능력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조낸(죄송합니다. 이 이상의 표현이 없어서) 그 분야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것
근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책의 다음 줄이 무엇일지를 한발짝 먼저 생각해볼 것
그러면서 동시에 '이걸 이용해서 결국 나는 뭐를 해볼까?'를 고민할 것

을 추천합니다. 매우 힘들고 먼 길이 되겠지만, 혹시 모르죠. 당신이 20년 뒤의 한국의 희망이 될지도.

뱀다리2 : 다음 글은(쓴다는 가정하에) 이공계 연구 활동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것이 될 듯 합니다. 저 자신이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해 온 부분이지만, 결국 극히 주관적인 답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큰 동의를 얻을 수도 없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언제고 쓰긴 쓸것 같습니다.
* hom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0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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