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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3/03 13:58:36
Name EnergyFlow
출처 인터넷
Subject [기타] 일제시대 가출한 여동생에게 오빠가 쓴 편지 (수정됨)
동생 옥희 보아라 - 세상 오빠들도 보시오

팔월 초하룻날 밤차로 너와 네 연인은 떠나는 것처럼 나한테는 그래놓고, 사실은 이튿날 아침차로 가 버렸다.
내가 아무리 이 사회에서 또 우리 가정에서 어른 노릇을 못하는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고 해도 그래도 너희들보다야 어른이다.

'우리 둘이 떨어지기 어렵습니다' 하고 내게 그야말로 '강한 담판'을 시도했다면 나라고 또 어쩔 수 있었겠느냐
아무리 '안된다'고 딱 거절했던 일이라도, 어머니나 아버지 몰래 너희 둘 허락해서 기꺼이 배웅할 내 나름의 이해도 아량도 있었다.
그런데 나까지 속이고 그랬다는 것을, 네 장래의 행복 이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네 큰오빠인 나로서 꽤 서운히 생각한다.

예정대로 K가 팔월 초하룻날 밤 북쪽으로 떠난다고, 그것을 알려 주려 하룻날 아침에 너와 K 둘이서 나를 찾아왔었다.
바로 전날 너희 둘이 의논차 내게 왔을 때 말한 바와 같이 K만 떠나고, 옥희 너는 네 큰오빠인 나와 함께 K를 배웅하기로 한 것인데.
또 일의 순서상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았더냐.

그것을 너는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얼굴로
"그럼 오빠, 이따가 역에 나오세요"
"물론! 나가고말고, 이따 거기서 만나자"
하고 헤어진 것이 나로서는 너희들을 배웅한 모양이 되었고 ,
또 너희 둘로서 말하면 너희끼리는 미리 그렇게 짜고 그래도 내게 작별인사는 한 모양이 되었다.

나는 고지식하게도 밤에 차 시간을 맞춰서 비 오는데 역까지 나갔겠다.
내가 속으로 미리미리 꺼림칙이 여겨 오기를
'요것들이 분명 내 앞에서 뻔뻔하게 대답을 해 놓고 뒤로는 딴 계획들을 세웠겠지!'
했더니 역시나, 개찰도 아직 안 했는데 어째 너희 둘 모습이 안 보이더라.
'이 녀석들이!' 하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기다려보았으나 끝내 너희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았다.
나는 그냥 입맛을 쩍쩍 다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와서는 그래도
'아마 K의 양복 세탁이 어쩌니 어쩌니 하더니 차 시간을 못 맞춘 거겠지, 어쨌든 무슨 연락이 있을 거야'
하고 기다렸다.
못 갔으면 이튿날 아침에 반드시 내게 무슨 연락이고 연락이 있어야 할 터인데 역시 잠잠했다.
허허― 하고 나는 멍때리고 있다가 도쿄에서 온 친구들과 그만 저녁부터 밤새도록 술을 먹고 말았다.
그리고 옥희 네 얼굴을 보는 대신에 한 통의 전보가 왔다.
옥희와 함께 왔으니 근심 말라는 K의 '독백'이 왔구나.
나는 전보를 받아 들고 차라리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그런 칼로 물베는 듯한 결단을 내린 것을 기특하게 여긴다

옥희야! 내게만은 아무런 불안한 생각도 가지지 마라!
다만 청천벽력처럼 너를 잃어버리신 어머니 아버지께는 마음으로 잘못했습니다고 사죄하여라.
나 역시 집을 나가야겠다. 열두 해 전 중학을 나오던 열여섯 살 때부터 오늘까지 이 허망한 욕심은 변함이 없다.
네 작은 오빠는 어디로 또 갔는지 들어오지 않는다.
너는 국경을 넘어 지금은 타국의 사람이다.
우리 삼 남매는 모조리 어버이 공경할 줄 모르는 불효자식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떠나야한다. 갔다 비록 못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떠나야 한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서도 또 네 애인을 위하여서도 옳은 일을 하였다.
열두 해를 두고 벼르고만 있을 뿐 부모님의 은혜에 이끌려서인지지 내 성격이 변변치 못해서인지
지금껏 이 땅에 머물러 굴욕의 아침저녁을 보내는 내가 지금 차라리 부끄럽기 짝이 없다.

너희들의 연애는 물론 내게만은 양해된 바 있었다.
K가 그 인물의 훌륭함에 비하여 지금 불우한 신세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다행히 K는 밥 먹을 걱정은 안 해도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 그렇다고 '밥이나 먹고 지내면 그만이지' 하는 인간은 아니더라.
K가 내게 말한 바 있는 'K의 이상'이라는 것을 나는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도 인생의 한 방법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굴욕에서 벗어나려는 일념인 것이니 그렇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인정해야 하리라.
그래서 나는 그가 나처럼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집을 사뭇 떠나겠다는 '고백'을 했을 때 거기에 찬성했느니라.
허허벌판에 쓰러져 까마귀밥이 될지언정 이상을 좇아 살고 싶구나.
그래서 K의 말대로 삼 년, 떠나있다가 오라고 권하다시피 한 것이다.

삼 년― 삼 년이라는 세월은 서로 그리워하는 두 사람으로서는 좀 긴 것 같이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옥희 너는 어떻게 하고 가야 하나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너희 두 사람의 교제도 1년이나 가까워 오니 그만하면 서로 충분히 서로를 알았으리라.
그놈이 재상이 될 재목이면 무엇하겠느냐, 네 눈에 안 들면 쓸 곳이 없느니라.
그러니 내가 어쭙잖게 주둥이를 디밀어 이러쿵저러쿵할 때가 못 되는 일이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그저 이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정도로, 또 그래도 네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잠자코만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삼 년은 역시 너무 긴 시간이니, 일단 가서 한 일 년 있으면 웬만큼 생활의 기반은 잡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거든 돌아와서 간단히 결혼식을 하고 옥희를 데려가는 것이 어떠하냐.
지금 이대로 결혼식을 해도 좋기는 좋지만, 그것은 어째 결혼식을 위한 결혼식 같아서 안 되겠고,
결혼식 같은 것은 나야 별 신경도 안쓰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계시고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니,
그저 그까짓 일 때문에 남들한테 비웃음을 살 이유도 없지 않느냐―'
이만큼 얘기하고 나서 나는 K와 너에게 번갈아 어떠한지를 물어봤다.

K는 내 말대로 그러겠다. 내년 봄에는 꼭 돌아와서 남 보기 흉하지 않을 정도로 결혼식을 한 다음 데려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네 말은 이와 달랐다. 즉 결혼식 같은 것은 언제 해도 좋으니 같이 떠나겠다는 것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해야지 타국에 가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것을
그냥 입을 딱 벌리고 돌아와서 데려가기만 기다릴 수 없단다.
그리고 또 남자의 마음 믿기도 어렵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랐으니 고생 한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것이 너의 결심이었다.
아직은 이 사회 구조는 남자 중심이다. 즐거울 때 여자는 함께 즐기기에 좋다. 그러나 고생할 때 여자는 자칫하면 남자를 결박하는 올가미 노릇을 하기 쉬우니라.
그래서 어느정도 자리가 잡힐 때 까지는 K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고 여러번 내가 다시 충고하였더니, 너도 동의의 빛을 보이고 할 수 없이 승낙하였다.
그리고 나는 너 보는 데서 K에게 굳게굳게 여러 가지로 다짐을 받아 두었건만―
이제 와서 알았다. 너희 두 사람의 애정에 내 충고가 끼어들 백지 두께의 틈바구니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니 내 마음이 든든하지 않으랴.

내가 너무 일찍 철이 든 데 비해 삼 남매의 막내둥이로 너는 응석받이로 자라났고 말하자면 '늦게 철 든 아이'였다.
학창시절에 인천이나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가 본 이외에 너는 집 밖으로 십 리를 모른다.
그런 네가 지금 국경을 넘어서 가 있구나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어린애로만 생각하던 네가 어느 틈에 그런 엄청난 어른이 되었느냐.
부모들도 제 딸들을 옛날 당신네들이 자라나던 시절의 딸 대하듯 했다가는 엉뚱하게 혼이 나실 시대가 왔다.
오빠들이 어림없이 동생을 껍데기로만 취급했다가는 코 떼일 시대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어찔어찔한 가운데서도 네가 집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첫째, 너는 네 애인의 전부를 독점해야 하겠다는 생각이겠으니 이것이야 인력으로 좌우되는 일도 아니겠고 어쩔 수도 없는 일이다.
둘째, 부모님이 너희들의 연애를 기꺼이 인정하려 들지 않은 까닭이다.
제 자식들의 연애가 정당했을 때 부모는 그 연애를 인정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 연애를 좋게 지도할 의무가 있을 터인데―
불행히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늙으셔서 그러실 줄을 모르신다. 네게는 이런 부모를 설득할 심경의 여유가 없었다. 그냥 행동으로 보여 주는 밖에는 없었다.
셋째, 너는 확실치 못 하나마 '생활력'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여자에게도 직업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언제든지 독립해 보일 실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너의 생각이 부모님 마음에는 안 드는 점이었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계집애가 일하면 몸 망치기 쉬우니라.'는 것은 부모님들의 말씀이시다.
너 혼자 힘으로 아무리 해도 여기서 취직이 안 되니까 여공 노릇을 하면서 사는 네 동무에게 편지를 하여 그리 가서 같이 여공이 되려고까지 한 일이 있지.
그런것 하지 말고 그냥 살아라 하기에 우리 집은 네 양말 한 켤레를 마음대로 사 줄 수 없을 만치 가난하다.
이것은 네 큰오빠 내가 네게 다시없이 부끄러운 일이다만― 그러나 네가 한 번도 나를 원망한 일은 없는 것을 나는 고맙게 안다.

그런 너다. 그러니 K의 올가미가 되기는커녕 족히 너도 너대로 활동하면서 K를 도우리라고 나는 믿는다.
기왕 집을 떠났다. 떠났으니 집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너희들이 부끄럽지 않은 성공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라.
삼 년 아니라 십 년이라도 좋다. 패배한 꼴이 되거든 그 벌판에서 개밥이 되더라도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생각을 마라.

나도 한 번은 떠나야겠다. 내가 이 곳을 굳게 지켜야 할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일과 떠나야 할 일은 스스로 다를 줄 안다.
네가 떠났고 작은 오빠가 떠났고 또 내가 떠나버린다면 늙으신 부모는 누가 지키느냐고?
염려 마라. 그것은 맏자식 된 내 일이니 내가 어떻게라도 하마. 해서 안 되면―. 빛나는 장래를 위하여 불행한 과거가 희생되었을 뿐이겠다.
너희들이 국경을 넘던 밤에 나는 술자리에서 '올림픽' 보도를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대로 썩어서는 안 된다. 당당히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똑똑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정신 차려라!

신당리 버티고개 밑 오동나뭇골 빈민굴에는 송장이 다 되신 할머님과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 하시는 아버지와 오십 평생을 고생으로 늙어 쭈그러진 어머니가 계시다.
네 전보를 보시고 이 분들은 우시었다. 너는 날이면 날마다 그 먼 길을 문안인사로 찾아와서 그 날의 양식거리를 타 갔다.
이제 그 길을 누가 다니겠느냐. 어머니는 "내가 말을 잃어버렸구나. 이거 허전해서 어디 살겠냐" 하시더라.
그날부터는 내가 다 떨어진 구두를 찍찍 끌고 말 노릇을 하는 중이다.
이런 것 저런 것에 안 좋은 소리 못하시는 부모님은 그저 별안간 네가 없어졌대서 눈물이 비 오듯 하시더라.
그것을 내가 "아, 왜들 이리 야단이십니까. 애가 죽으러 갔습니까?" 이렇게 큰소리를 해 가면서 무마시켜 드리기는 했으나
나 역시 한 삼 년 너를 못 보겠구나 생각을 하니 갑자기 네가 그리웠다. 형제의 우애는 떨어져봐야 아는 것이던가.

한 삼 년 나도 공부하마. 그래서 이 '정상적'이지 못한 생활의 굴욕에서 탈출해야겠다. 그때 서로 밝은 얼굴로 만나자.
너도 아무쪼록 성공해서 하루라도 속히 고향으로 돌아오너라.
그야 너는 여자니까 아무 때 나가도 우리 집안에서 나가기는 해야 할 사람이지만
일이 너무 그렇게 급하게 되어 어머니 아버지께서 놀라셨다 뿐이지, 나야 어떻겠느냐.
하여간 이번 너의 일 때문에 내가 깨달은 바 많다. 나도 정신 차리마.
원래가 허약한 체질로 대륙의 혹독한 기후에 충분히 견뎌낼는지 근심스럽구나. 특히 몸조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가난한 계급은 이 몸뚱이 하나가 유일 최후의 자산이니라.

편지하여라.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거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이 글이 잡지에 실리거든 한 권 사 보내 주마. K와 같이 읽고 이 큰 오빠 이야기를 더 잘하여 두어라.

축복한다.
내가 화가를 꿈꾸던 시절 하루 오 전 받고 '모델' 노릇 하여 준 옥희,
방탕하고 불효자인 이 큰 오빠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인 옥희,
이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그 애인과 함께 저 멀리 타국의 사람이 된 옥희, 네 장래를 축복한다.
이틀이나 걸렸다. 쓴 이 글이 두서를 잡기가 어려울 줄 아나 세상의 너 같은 동생을 가진 여러 오빠들에게도 이 글을 읽히고 싶은 마음에 감히 발표한다. 내 진심만을 알아다오.

닷새 날 아침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씀







시인 이상은 1936년『중앙』 9월호에 이 편지를 발표한 뒤 본인이 말했던 각오대로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기대와는 다른 일본(도쿄)의 모습에 실망하고 방황하다가 이듬해 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다시 만나자'고 말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참고로 본문은 ai(claude)를 통해 일제시대에 쓰던 단어들을 현대어로 바꾸어 가독성을 높인 버전입니다

원문은 이 쪽으로...(https://ko.wikisource.org/wiki/%EB%8F%99%EC%83%9D_%EC%98%A5%ED%9D%AC_%EB%B3%B4%EC%95%84%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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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관
25/03/03 14:04
수정 아이콘
천재 시인으로만 알고 있고 이런 글을 썼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덕분에 읽어봤습니다. 가정사가 다사다난한 사람이었군요 
키르히아이스
25/03/03 14:05
수정 아이콘
묘하게 슥슥 읽히는게..
소설처럼 정신없이 읽었네요
천재는 편지마저 다르군요
No.99 AaronJudge
25/03/03 14:07
수정 아이콘
범상치 않다 싶었더니 역시 이상이었군요……..
너무 일찍 졌어요…

찾아보니 동생 옥희씨는 다행히 연인분과 행복하게 잘 사신 모양이네요..자식 손주까지 많이 보시고 2008년에 돌아가셨군요.
마르틴 에덴
25/03/03 14:11
수정 아이콘
천재의 글빨 보소
25/03/03 14:12
수정 아이콘
마지막에 와서 헉 했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25/03/03 14:16
수정 아이콘
[이제 와서 알았다. 너희 두 사람의 애정에 내 충고가 끼어들 백지 두께의 틈바구니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니 내 마음이 든든하지 않으랴.]


이 부분이 허를 찔러서 인상적이네요. 오빠로서 마음을 담아 충고해 준 말일 테고 그러겠다 했으면서 무시한 꼴이라 섭섭하다고 할 법도 한데, 그걸 도리어 둘 사이의 애정이 깊어 그런 것이라고 도리어 든든하다 하니.
우상향
25/03/03 14:16
수정 아이콘
간도로 독립운동하러 떠났나...
김오월
25/03/03 14:17
수정 아이콘
대체 일제시대 가난한 집안의 어떤 무능한 오빠가 이런 글을 썼나 했더니....
25/03/03 14:19
수정 아이콘
감정이 구구절절하게 잘 느껴지네요.
가고또가고
25/03/03 15:27
수정 아이콘
인품도 문장력도 대단하네요.
한화우승조국통일
25/03/03 16:50
수정 아이콘
이상은 똘끼 넘치는 시들이 유명하지만 산문들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25/03/03 17:17
수정 아이콘
지 앞가림 못하는 오빠가 디씨에 쓴 버전

야, 옥희야. 그리고 이 글 보는 씹덕 오빠들아, 들어봐라.

아니 X발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내가 가족에서 어른 노릇 못하는 거 인정한다. 근데 그렇다고 나를 이렇게까지 엿 먹일 필요가 있었냐?
팔월 초하룻날 밤차 탄다고 해놓고, 알고 보니 아침차 타고 튀었더라?
야, 나도 한때는 그래도 큰오빠랍시고 배웅은 해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기만질을 해버리네 크크크

진짜 “오빠 우리 둘이 떨어지면 안 돼요 ㅠㅠ” 하고 대성통곡하면서 얘기했으면
나도 감정적으로 휘둘려서 “에이 씨발 모르겠다 그냥 가라” 했을 수도 있어.
근데 그게 아니고, 나까지 철저하게 기만하고 뒤통수 후려친 건 좀 아니지 않냐?

아 근데 난 진짜 순진하게도, 밤에 비 오는 와중에 역까지 갔잖아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속으로는 이미 직감했음. “아 이 새끼들 뒤에서 딴 짓했겠네” 싶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 근데? 개찰도 안 했는데 니들 안 보이더라?
‘아 X발 이 새끼들이 나한테 사기 쳤구나’ 깨닫는 순간 내 표정 크크크크크
그냥 한숨 푹 쉬고 집에 왔다.

그래도 혹시나 차 놓친 줄 알고 연락 오길 기다렸다? 근데 아무 말도 없었음.
결국 도쿄에서 온 친구들이랑 술빨면서 하루 날려버림.
그리고 다음날 도착한 전보 한 장.
“옥희와 함께 왔으니 걱정 마시라.”
아크크크크크크크크 이건 진짜 개그지 크크크크크
전보 들고 피식 웃음 터지더라.

야 그래도 너네가 그렇게까지 큰 결단을 내린 건 인정한다.
나한테 불안한 마음 가질 필요는 없고, 다만 엄마 아빠한테는 마음으로라도 “죄송합니다”라고 빌어라.
근데 진짜 웃긴 게 뭔지 아냐?
우리 삼 남매, 전부 부모님한테 효도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튀어버림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나도 이젠 집 나가야겠다 싶다.

근데 난 진짜 아직도 얼떨떨함.
니가 집에서 한 십 리 벗어난 적도 없던 애였잖아? 근데 지금 국경 넘어서 타국 사람이 돼버렸다고?
야, 우리 세대 진짜 미쳐버린 거 같음.
부모님도 딸을 옛날식으로 키우면 안 된다는 걸 이제 좀 깨달아야 할 텐데.
그리고 나도.
솔직히 너한테 쓸데없는 참견 좀 하긴 했는데,
너네 둘의 애정 앞에서는 그딴 거 백지 두께만큼도 의미 없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어쨌든 기왕 이렇게 된 거, 난 니가 가서 개고생 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남자는 원래 고생해야 철이 들고, 여자는 원래 같이 있으면 남자한테 올가미가 될 수도 있는 거라…
그래서 난 K한테 “야, 너 혼자 자리 좀 잡고 와라. 너무 급하게 가는 거 아니냐?” 했는데
너는 “아 몰라 크크 같이 갈래요” 하고 같이 떠났잖아.
야, 진짜 쿨병 걸린 것도 아니고, 개멋있다.

그러니까 부탁인데, 가서 개털리지 말고 잘 살아라.
그리고 혹시라도 삼 년 안에 이도저도 안 되면? 그냥 거기서 개밥 돼라.
고향 땅에 돌아올 생각 하지 마라.

나도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
근데 부모님은 어떡하냐고?
염려 마라 크크크크크크크크크
어차피 우리 집은 원래부터 답이 없었다.
니가 국경 넘는 날, 난 술 먹으면서 올림픽 보도 보고 있었다.
우리 세대가 이대로 썩으면 안 된다. 정신 차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니가 이 편지 읽고도 ‘아 오빠 진짜 X같이 구네’ 이딴 생각 들면
그냥 전보 한 장만 보내라. “오케 잘 지내고 있음” 이 정도만 해줘도 된다.

야, 인생 한 방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나만큼은 너 편이다.
세상 넓다, 배우는 것도 많을 거다.
그러니까 꿀 빨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이 글 보는 오빠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크크크크크크
이게 바로 진짜 오빠의 마인드다.

- X같지만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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