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기에는 노력이란 최악의 해결책이다.
이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이건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 무대책이란 이야기다. 차라리 가망이 없으니 그만두라고 충고해주는 편이 훨씬 났다. 무의미한 노력만큼 허망한건 없으니까.
사회가 내게 가혹하니 나만이라도 나에게 관대해야겠다.
훈련된 외톨이는 두번 다시 같은 수법에 넘어가지 않는다. 벌칙으로 하는 가짜 고백도, 여자애가 대필한 가짜 러브레터도 이제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니까. 패배에서만큼은 내가 최강.
남한테 한 소리 들었다고 바뀌는 건 '나 자신'이라 볼 수 없는거다. 그럼그럼.
일그러지고 유치하고 틀려먹었을지라도, 자신이 뜻한 바를 뚝심있게 밀고 나간다면 그것은 옳다. 타인에게 부정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변할 정도라면 그런 건 꿈도 아니거니와 자기 자신도 아니다.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밀어서 안 되면 포기하라'를 신조로 삼는 나로선, 어지간한 일로 동요하지 않는다. 뭣하면 '천리 길도 포기하라'를 추가해도 좋다.
중2병이란 자기보호의 말로이다. 현실이 자신에게 너무 차가운 나머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그들도 알고 있다. 자신이 믿는 것이 얄팍한 환상이라는 걸
외톨이란 영구 중립국 같은 존재다. 그곳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도 소동에 휘말려 드는 일도 없다. 세계가 만약 백 명의 외톨이라면 전쟁도 차별도 사라질 게 분명하다. 이봐, 슬슬 나에게 노벨 평화상을 달라고.
씁쓸한 인생, 커피 정도는 달아도 괜찮겠지…
참가하는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건 참 편리하고 멋진 말이다
학교생활이라는 무가치하고 슬프고 괴롭고 짜증 나는 일들로 점철된 나날들을 외로이 버텨온 내가, 고통스럽고 비참한 청춘을 외로이 견뎌온 내가, 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녀석들에게 질 리가 없다.
정말로 똑똑한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뛰어나다느니, 백치도 알아듣게 가르친다느니 하지만, 그런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무능한 녀석에게 무슨 소리를 하든 무능한 녀석은 무능하니까 이해하지 못하거든.
애초에 지각이 잘못이란 인식은 글러먹었다. 경찰은 사건이 일어나고서 움직이고, 히어로도 뒤늦게 나타나는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들의 늦은 등장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지각은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이해 못한다는 울부짖음 속에는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비탄과 체념, 그리고 이해받고 싶단 욕망이 담겨 있단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들은 약하기에 뭉쳐다닌다.맹수들에게서 몸을 지키기위해 뭉치는 동물들과 하등 다를바 없다.겉으로는 얌전히 풀을 뜯고있지만,속으론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동료를 제물로 바칠 생각만 한다.반면 강한 짐승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따라서 외톨이는 강하다.
히어로는 언제나 고독하다. 하지만 히어로는 언제나 멋있다. 다시 말해 '고독=멋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즐거움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즐거우면 장땡이란 가치관만으로 세상이 성립된다면 전미가 우는 영화 같은 건 만들어질 수 없었겠지.
그러고보니, 급우와 자주 어울리지 못한다는 걸 방학으로 보면 난 사시사철 방학인거 아닌가?
리얼충은 리얼충다운 행동을 요구받고, 외톨이는 외톨이로 지낼 것을 종용당하며, 오타쿠는 오타쿠답게 굴 것을 강요당한다. 상위 카스트가 하류층에게 이해심을 보이는 건 관대함과 교양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반대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린이 왕국의 썩어빠진 규율이다. 참으로 역겹기 짝이 없다.
세계는 바뀌지 않지만 자신은 바꿀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그 쓰레기처럼 냉담하고 잔인한 세계에 순응하고 적응하여 패배를 인정하고 예속되는 행위다.
번드르르한 말로 포장하여 자기 자신마저도 속여 넘기는 기만에 불과하다.
그나저나 리얼충이란 골치 아프군. 친구가 되려면 좋은 것만이 아니라 나쁜 것까지도 공유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지, 이 경우에는 관계성 유지를 위해 제물을 바친다고 해야하려나.
망가뜨리면 고민거리도 사라진다. 악순환의 연속이라면 그 원천을 근절하면 된다. 그거면 족하다. 도망치면 안 된다는 건 강자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에 따르기를 강요하는 세상이야말로 잘못된 거다.
『난 잘못한 게 없어, 이 세상이 잘못된 거야』라는 말은 꼭 핑계처럼 들리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일 리는 없다. 사회가, 세상이, 주변이, 특정인이 잘못된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무도 그 사실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긍정하겠다.
그렇다. 정말로 무섭다. 이대로 거침없이 토츠카 루트로 진입해버릴 것 같아 매우 두렵다. 후우...... 내게 금단의 마법을 건사람이 너인가, 꼬마 아가씨? 뭔 소릴 하는 거냐.
분위기와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 본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해야 할 때도 생긴다.
"모두"가 원하니까.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안그러면 "모두"에게 버림받으니까.
하지만 "모두"라는 녀석은 없다. 말하지도 않거니와 때리지도 않는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집단의 마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탄생한 마물이다. 개인의 치졸한 악의를 감추기 위해 창조된 망령이다. 소외된 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집단 내부에마저 저주를 흩뿌리는 괴물이다.
한때 그도, 그녀도 그 피해자였다.
그러므로 나는 증오한다.
"모두"로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세계를.
누군가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성립하는 저열한 평온을.
인간미나 정의조차도 은폐하여 악랄한 것으로 뒤바꾸어 놓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가시를 남기는, 단순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 공허한 이상을.
과거와 세계는 바꿀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들과 "모두"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에 예속될 필요는 없다.
과거는 버릴 수 있고, 세계는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
여동생 앞에서 상식 따위는 무의미하다.
윤리도 논리도 통용되지 않는 존재. 여동생(M)이란 여자 (女) + 미래(未)다.
요컨대 앞날이 창창한 최초의 여성이며, 모든 여성의 궁극적인 미래상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알파이자 오메가다.
기원이자 종말. 모든 여성의 최종 진화 형태라 불러도 과 언이 아니다. 모든 여성의 정점에 선다는 말은 곧 전 인류의 1〜2인자라는 뜻이며,그런 상대에게 거역할 수 있을 리 없 다. 고로 나는 여기서 여동생 최강 이론을 주창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뒷자리란 일종의 귀빈석 개념이므로 최대 파벌이 차지하는 게 암묵적 룰이다. 그 사이에 끼었다간 지독한 고통을 맛보게 되므로 맨 앞이나 중간 자리를 선택하게 된다. 앞줄에서도 특히 좌우 양 끝은 사각지대에 해당하므로 외톨이가 앉기에는 안성맞춤인 위치라 할 수 있다. 칠판이 잘 안 보인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수업에 집중하기에는 유리하다. 아니,애초에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으므로 불가피 하게 수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외톨이라 행복해요.
그들은 친구를 이유로 노력하기를 포기했고, 우정을 핑계 삼아 자기 위치에 안주해버렸다. 중학생 커플이 같은 고등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망언을 하며 상대방의 성적에 맞추어 하향지원하는 것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다.
당시에는 교실에서 오가는 그런 이야기를 주워듣고는 등골이 으스스해지기도 했다.
정말로 상대방을 아낀다면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고 응석을 받아줘서도 안 된다. 그저 피차 나태한 일상의 연속성에 취하고 싶어 안이한 행동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막상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두 달도 못 되어 해어졌다는 풍문이 들려오면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혀 호흡 곤란이 올 수준. 그래놓고 그땐 너무 어렸다며 자기 합리화를 시도할 거지,그렇지?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 온 탓일까. 나는 그딴 식의 허울 좋은 우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변명 거리로 전락한 자기희생에 도취된,기만으로 가득 찬 다정 함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면 상대방의 입맛에 맞추게 되거나,「나 좀 괜찮은 가게 안다? 대단하지? 으헛.」하고 잘난 척을 하고 싶어지므로 모험다운 모험을 할 수 없다.
하지만 혼자일 때는 그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가게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한 적극성이 새로운 발견의 씨앗이 되고,본인의 식문화 발전으로 이어진다.
결국 외톨이란 프론티어 스피릿이 넘쳐흐르는,왕성한 도전 정신을 지닌 현대의 모험가인 셈이다.
혼자 조용히 책을 보거나 집에서 게임을 하는 등,차분한 즐거움을 아는 입장에서 그들의 과도한 어필은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목소리 크기와 몰려다니는 머릿수가 즐거움의 척도는 아닌데도 그렇다고 착각하는 놈들이 싫다. 게다가 그들이 보기에 군중이나 이벤트는 자신을 어필할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인지 그럴 때면 유독 더 설쳐대곤 한다. 그 기만을,의태를 지켜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어째서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을,자신의 정당함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단 말인가.
혼자일 때 떳덧하게 가슴을 펴지 못하는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냉정한 자신아「정말로 즐거워?」라고 반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떨쳐버리고자 즐겁다고,신바람 난다고, 지금이 최고라고,기분 짱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목청 돋워 선언한다. 소리 높여 외친다.
나는 그런 무리 속에 끼고 싶지 않다. 기만으로 가득한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말을 걸면 기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 아닐까.
사람으로 인정받는다,존재가 허용된다,내게는 말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희열에 젖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확인 작업을 거칠 필요가 없다.
즉 외톨이를,고독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아의 확립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좋다. 나란 분은 역시 최고!
문화제란 원래 친구들끼리 신나게 어울려 놀기 위한 행사다. 그런 분위기에 내가 끼어들면 다들 불편할 거 아냐! 영향력 제로에 있거나 말거나 별 차이가 없는 포지션에 처박아두면 그딴 불편함 없이 다들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데! 나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주의에 맞서 비교섭 불간섭주의를 제창하 는 사람이란 말이다!
시간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단지 모든 것을 망각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그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문제자체를 풍화시킬 뿐이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는 말 또한 거짓이다. 기만이다. 세상은 언제나 개인을 침식하고 틀에 끼워 맞춘 후 삐져나온 부분을 조금씩 갈아낸다. 그러는 사이에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세상이, 그리고 주위가『내가 달라지니 세상도 달라졌다.』고 생각하게끔 강요하고 세뇌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런 감정론과 근성론과 정신론으로는 세상도 주위도 집단도 바꿔놓을 수 없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꿔놓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마.
외톨이의 장점은 그 사색의 깊이가 놀라울 만큼 깊다는 것이다. 원래는 대인관계에 할당되어야 할 리소스를 나 자신에게 집중시켜 반성과 후회와 참회와 망상과 상상과 공상을 되풀이한 끝에 마침내 독자적인 사상과 철학을 일구어낼 만큼 남아도는 사고력. 그 전부를 쏟아 부어 모든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을 반증하여 부정한다.
그중에서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한 것을 자기변호를 하듯 총력을 기울여 입증해나간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달라질 테지.
언젠가는 반드시 달라진다. 바뀌어버리고 만다.
내 마음이야 어찌 됐든,타인의 눈에 비치는 방식,해석되는 방식, 평가되는 방식은 틀림없이 달라진다.
만물이 유전하고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해간다면, 주위가,환경이,평가의 중심축 그 자체가 일그러지고 달라져 내 존재 형태도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러니.
一그러니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주변에 불빛이 적을수록 별은 더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니까. 그 사실을 감안하면 주변에 사람이 적은 외톨이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보일 게 분명하다. 이거 큰일인데, 내 미래가 너무 밝잖아.
세련되고 폼 나는 동작으로 능력 있는 남성상을 연출하는 중이다. 누차 말하지만, 저런 최신 기기를 쓰며 거들먹대는 놈은 자기가 엄청 잘났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잘난 건 본인이 아닌 기계란 사실을 슬슬 깨닫길 바란다.
「모두 사이좋게」라는 말 자체가 모든 것의 원흉이란 사실을. 저주받은 명제라는 사실을.
그것은 복종을 강요하는 주박이다. 기어스다.
교사들이 좁은 세계에 부여한 악법으로, 그것을 준수하려 드는 탓에 생겨나는 갈등들을 「무시」함으로써 억지로 그러한 상태를 성립시킨다. 죽어도 마음이 안 맞는 녀석도 있다. 때로는 끔찍하게 싫은 녀석도 생긴다. 그럴 때 「싫다」, 「상관하고 싶지 않다」라고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그나마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개선의 가능성도 협상의 여지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을 억누르며 겉으로만 멀쩡한 척하다보니 균열이 생겨난다.
문제는 표면화되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나태한 기만에 의해 성립된 암묵적인 평화다.
딱히 어떻게 해볼 마음은 없다. 단지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요컨대 텔레비전에서 전쟁과 빈곤을 다룬 다큐를 보고 아유 불쌍해라 힘들겠다 우리도 뭔가 도움될 일을 하자며 편안한 방에서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나중에 무언가 행동에 나서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고마움을 깨달았다」며 자기 위안이나 하는 게 고작이다.
어쩌면 한두 푼쯤 기부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끽해봐야 그 정도다.
물론 개중에는 문제의식을 갖고 성심성의껏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고 존경과 칭찬을 받을 만하다. 모금한 돈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분명 힘이 될테지.
근본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 모두들 그렇게 믿는다.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은 선량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할 위기에 몰리면, 인간은 너무도 쉽게 공격성을 드러낸다.
선량하다 여겼던 자신이 악에 물들 때, 인간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반전되는 자신과의 정합성을 유지하고자 세계를 반전시킨다.
그동안 「쿨」하다고 떠받들던 것을 「거만하다」고 해석한다. 「머리 좋고 똑똑하다」며 존경하던 것을 「공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한다」고 폄하한다. 「명랑하고 활발한」성격을 「시끄럽게 설친다」고 깎아내린다.
반전된 세계 속의 악을 단죄하고자 정의의 검을 휘두른다.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이룬다. 마치 그것이 주지의 사실인 것처럼 다 함께 적의 악행과 죄업을 성토하고, 정의감을 순수 배양해나간다. 작디작은 불만의 씨앗을 커다랗게 키워나간다.
그것이 기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굳게 닫혀버린 세계 속에서, 다음은 자기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기 전에 다음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계속 되풀이된다. 끝없는 악순환의 연속.
누군가의 존엄을 희생시키며 쌓아올린 우정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말을 걸고 맞장구를 치고 상대방의 대답에 공감하는 척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상대방의 취향을 파악하고 자신의 허용 범위를 넌지시 내비친다. 그 정도로도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능숙하게 대화의 물꼬를 트기 힘들 수도 있고,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반복해서 훈련하다 보면 자연히 요령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남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나를 속이고, 상대방을 속이고, 상대방도 속는 것을 승낙하고, 나도 속는 것을 승인하는 행위. 그것의 무한연쇄에 불과하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결국 리얼충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실천해온 바로 그 기술이니까.
조직이나 집단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테크닉이며, 사회인과 학생의 차이는 오로지 스케일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허위와 가식과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저런 놈들이 계곡에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다가 고립되어 구조대를 부르는 걸 테지.
아니면 소풍 가는 기분으로 평상복 차림으로 산에 올랐다가 조난당한다든가.
여름방학. 외톨이에게 그것은 일종의 해방구다. 천사 금렵구는 아니다.
하루 종일 무위도식한들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어서 평소에도 딱히 민폐를 끼친 기억이 없다. 착한 아이의 극치다
누진세 제도는 악이다.
많이버는 사람은 많은 세금을 내야 하지만 그 대가는 없는 것이다 다름없다. 벌면 벌수록, 일하면 일할수록 더 많은 세금을 뜯기는데도 그 보상은 전무한 셈이다.
그러므로 일하는 자는 패배자다.
누진세를 도입한 목적이 행복의 평준화라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애당초 이 세상에 평등한 행복 따위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재력을 기준으로 인간의 행복을 평가하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천박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친구와 애인 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리얼충 누진 과세 제도」의 도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꿈은 꿈이야. 현실이 아니지. 그러니까 어딘가 가짜같았어"
아마, 인기없는 외톨이만한 현실주의자는 없을거다.
인기 없음의 3원칙 [(희망을)가지지 않고, (마음의 틈을)만들지 않고,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고]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일족이다.
현실이라고 하는 최강의 적과 밤낮으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퍼펙트 솔져는 싸디싼 사기에 넘어가지 않는다.
살아있다고 하는 건 무엇보다 존귀한 일이야.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편이 부끄러운게 아닌가?
그러니까 나를 보면서 '쪽~팔린다~크크크'하며 비웃는 녀석들은 살 가치가 없는 녀석들인거지
오해는 오해. 진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걸 나 자신이 알고 있으면 되는거다.
남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다.
…언제나 오해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나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니까 말이지.
이제 포기했다.
"파벌같은 거 없다만.
파벌같은 데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정했으니까"
진정한 강자는 무리짓지 않는다.
외톨이는 언제나 이 세계의 모든것을 적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vs세계.
외톨이는 진짜 박애주의자다.
그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외톨이들의 사상은 모든것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에 견줄만 하다.
음, 마더 히키가야라고 불리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공기와 분위기에 동조하는 생물이다. 파도에 휩쓸려, 인파에 휩쓸려 변화해 가는 생물이다.
따라서, 누구도 흐름에는 거스르고자 하지 않는다.
역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다. 나처럼 완고하여 양보하지 않는 강철의 의지를 지닌, 예를 들면 콘크리트 제방으로 단단하게 보호된 고도(孤島)같은 인간이 아닌 한, 흐름에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계속하여 침식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만약, 변할 수 있다면 수단은 단 하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따끔한 맛을 보고,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새기고, 그 아픔으로부터의 회피 본능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뿐이다.
허나, 걱정도 배려도 필요 없다. 외톨이는 언제 그 어떤 경우에도 준비되어 있는 법이다. 대개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말이지. 외톨이는 언제나 상주전진!! 거대 벌레들과 싸워도 끄떡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서인가요, 제 차만 준비되지 않은 건. 그런 식으로 내 몫만 없다느니 하는 소린 제발 그만해. 요전에 했던 콘서트 스탭 알바에서 내 도시락만 젓가락이 안 붙어있었던 때 같잖냐. 나, 그때는 정말 인도 스타일 식사법을 시도해 볼까 생각했었다고. 근처에 편의점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현장감독, 너 이 자식.
이 무난함, 이란 것도 세상의 윤활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의 템플릿에 편승하여 나온 결과물의 신뢰도는 쓸데없이 높다. 누구라도 모험은 하고 싶지 않기 마련이다. 어뮤즈먼트로서의 모험이나 불가사의한 어드벤처라면 환영이겠지만, 실질적인 리스크를 감수하는 모험에 있어서는 보수적이 되기 쉽다.
전례, 관습, 답습. 대부분의 경우는 과거의 무언가와 똑같이 하기만 하면 크게 잘못될 가능성은 줄어들며, 적어도 불만이 제기되었을 때 “전에는 그렇게 했다” 하는 변명을 댈 수 있다. 무난함 최고.
윤활유는 마모를 방지하기 위한 것. 마음에도 윤활유가 있는 편이 살아가는 데에는 편하겠지.
오케이 오케이. 히어 위 고! 컴 히어, 오일!
어머니께선 늘 말씀하셨죠. 사람과 라노벨은 겉보기나 제목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가축에게 감사하는 건 중요하다. ‘은수저’에서 배웠다. 그리고, 사축(社畜)에게도 폭풍 감사 감격. 파팡이랑 마망이 일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밥을 먹을 수 있다. 일하지 않고 먹는 밥 맛있다. 무지 맛있다.
자기의 본모습을 속이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고, 인간이란 어떤 식으로든 가치관은 다른 법이다.
자라난 환경이 다르다면 좋고 싫음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밀어 넣어 함께 살아가는 게 결혼이라는 거라면, 그건 반드시 행복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졸업 앨범 같은 데에서도 “○○한 사람 베스트 3” 같은 걸 하곤 하지. 그거, 이름이 안 올라올 녀석들을 신경 써 준답시고 “나중에 사장님이 될 것 같은 사람” 3위 같은 아무래도 좋은 빌어먹을 항목에 억지로 집어넣는 짓은 하지 말아 줄래? 그 상냥함이 오히려 쓰라리거든. 그건 그렇고 내 졸업 앨범, 마지막 페이지가 완전히 백지던데, 그거 낙장이야 뭐야?
믿는 것이 반드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좋은 행동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것, 즉 의심하는 것은 자기 마음의 방어로도 이어진다. 그 경계를 버리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상처입히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도 미래에 있어서도, 앞날의 일은 알 수 없다.
앞날을 대비하면 또 새로운 근심이 생겨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가올 시간을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결론, 여성 제군은 지금 당장 전도유망한 전업 주부 지망생 남자를 붙잡아 두는 게 좋다, 고.
놀이 삼아 만든 요리는 대부분 비참한 물건이 되고, 무언가 도전하여 실패하였을 때의 변명으로 “이건 그냥 놀이거든~.” 같은 소릴 꺼내는 것도 간간이 벌어지는 일이다.
즉, 놀이 같은 건 쓸데없는 짓이다.
방향을 바꾸어, 인생의 목적이 놀이라 한다면, 놀이는 쓸데없는 짓이므로, 인생이란 쓸데없는 짓이다
놀고 있는 녀석들의 인생은 끔찍한 것이 될 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 과연 료진히쇼.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도 폼으로 머리가 벗겨진 게 아니다. 그 고생 탓에 대머리인 것이다. 이건 브루스 윌리스, 니콜라스 케이지와 나란히 ‘세계 3대 멋진 대머리’에 넣어야 한다.
대머리는 멋지다, 대머리는 스테이터스, 그런 가치관을 머리에 심고 살아가는 편이 머리털을 심는 것보다 훨씬 이길 가능성이 높은 내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결국 놀이라는 단어도 그것이 지시하는 행위도 그 시비는 가려야 마땅하다.
놀기만 하면 어떻게 되어 버리겠는가. 그 비참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허나, 고사내력(故事??)을 살펴 볼 경우, ‘놀이꾼은 레벨 20에 현자로 전직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뭐냐……, 조금 정도는 놀아도 괜찮겠지……
초대를 받으면 일단 거절한다. 이것은 외톨이의 안정 행동이자 회피 본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라, 가겠다고 대답했더니 그것이 빈말이었을 경우, “아, 갈 거구나…….” 라느니 쓴웃음을 겪는 중학교 동창회 같은 분위기가 되면 미안하지 않겠어? 그런 배려에 대해서는 배려로 응답하는 것이 어른의 예의라는 것이다.
실제로,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그 역할에 기대되는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각 없이 하고 있는 거라면 본인들은 행복할 테지만, 정형화되고 만 대화나 일상을 자각해 버리는 것은 가련한 일이다. 평생, 그 의식과 함께 해야만 한다. 그 감각은 가질 수 있는 자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지만, 그 감각 탓에 공존하여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이걸로 토츠카에게 미움을 산다든지, 살짝 뺨을 물들이면서 “어, 어쩔 수 없잖아. 하, 하치만도, 나, 남자니까…….” 하고 수줍어하는 말이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죽고 싶어지거나, 아니면 양배추 밭이나 황새를 믿고 있는 귀여운 여자애한테 노모 포르노를 들이대는 짓을 상상할 야비한 쾌감에 눈떠버릴지도 모른다니까
허나, 뭐, 투덜거려 본들 소용없다. 언제나 세상은 잔혹하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노력의 가치는 기적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적을 불러들인 승자에 대해 칭찬을 전하는 것뿐. 그 행위야말로, 패자의 덕분으로 승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외톨이가 세상에 존재가 허락될 수 있는 이유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꿩도 울지 않으면 총에 맞지 않을 터. 그러나, 울지 않는 꿩은 그저 꿩 이하일 뿐이다. 쏠 가치도 없는 존재로서, 버려지게 된다. 없는 존재로 취급당할 것인가, 미움받는 존재가 되어 기피당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어나더라면 죽었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으로서, 생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그것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 의문을 느낀다.
한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모습은 조만간 실수로 휴대전화를 씹지는 않을까 하고 이쪽이 다 아슬아슬해진다. 식사 중에는 휴대전화 만지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게다가 남하고 같이 먹고 있는 중이고 말이야. 식사 중에 휴대전화 만져도 되는 건 외톨이뿐이라구?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다.
예전의 영광을 말하고 싶어지는 것은 마음이 노쇠하였다는 증거다.
누군가를 아래에 두고 안심하고 싶어지는 것은 약해졌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 아니다. 아랫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온 무리들 따윈 성가실 뿐이다.
도망쳐 돌아온 녀석을 돌봐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세상에는 없다.
따라서, 쫓아낸다. 추방한다. 구축한다.
아아, 정말이지 네 말대로, 세상이란 것은 엄격하다
오늘도 질척한 느낌의 시선을 느끼고 힐끗 뒤를 쳐다본다.
평소에 남들에게 주목받는 일이 없는 탓에, 이런 기척에는 민감한 것이다. 뭐냐, 이 슬픈 습성은.
'인사말 한마디 주고받으면 신경이 쓰이고, 문자가 오가면 마음이 술렁인다. 전화라도 걸려오는 날이면 착신 이력만 봐도 실실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단순한 친절이란 사실을. 내게 친절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해서 자꾸만 그 사실을 잊을 뻔 한다. 딱히 둔감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민감하다. 심지어 과민하기까지 하다. 그 탓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만다. 그 패턴은 이미 한번 경험한 바 있다. 훈련된 외톨이는 두 번 다시 같은 수법에 걸려들지 않는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벌칙으로 하는 고백도, 여자애가 대필한 가짜 러브레터도 이제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니까. 패배에서만큼은 내가 최강.
매번 기대하고, 항상 착각하고, 언제부터인가 희망을 품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착한 여자애는 질색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이 소설 보던 애가 짝이라 빌려서 읽어보고 집에 놀러가서 애니메이션도 보고 그랬는데 이게 끝났더라구요!
피지알에 있는 과거 명언집 가져와 봤습니다 하핳
음... 그 친구는 그 이후를 하치만 흉내를 내길래 안 그러면 좋겠다 솔직히 말해서 빼내온 전적이 있습니다.
근데 전국에 이랬던 오덕후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핳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