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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3/31 23:53:15 |
Name |
테리아 |
Subject |
[유머] 장화홍련에 대한 새로운고찰! |
아직도 저에겐 장화홍련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군요.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음악 다 아시죠? 가장 기억에 남는 ost 입니다.
이 음악을 들으며 눈을 한번 감아보세요. 새롭답니다.
오랜만에 장화홍련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검색해 보다가
Nkino 라는 영화평가 사이트에서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읽었지만 뇌리속에 각인되는 글이네요.
<장화, 홍련>에 대한 반응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가 한국 공포영화에서 미지의 영역이었던 '순수 이미지로서의 두려움'을 개척했다고 두둔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화면구성과 시청각적 테크닉에만 힘을 잔뜩 주었을 뿐 공포의 실체를 납득시키지 못했다고 비판을 가한다. 이 두 입장은 극명하게 대립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큰딸 수미가 은주에 대해 가진 적대감, 동생 수연에 대해 품은 죄책감은 순간적인 시선과 인상으로 가슴을 후벼 판다고 말하면서 스토리라인의 인과성과 구체성이라는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반면 반대 입장에서는 영화를 지탱하는 인물들의 정신적 분열, 감정적 취약함이 스토리와 배경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잔혹한 충격요법만을 반복 주입시킨다고 비판한다. 나는 이 영화를 장르적 작용과 심리적 기제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검토함으로써 후자의 입장을 뒷받침해보고자 한다.
분위기로서의 공포, 효과로서의 놀라움
<장화, 홍련>에서 시골의 외딴 저택을 떠도는 공포의 실체는 감독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이 영화가 건축가들이 최고로 꼽는 영화. 패션 디자이너가 미술가들이 최고로 꼽는 영화가 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도에 부합하듯 이 영화는 원작 『장화홍련전』에서 떠돌 법한 고색창연함과 전통성의 자취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새로운 설계도를 구상한다. 그 설계도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도 부가된다. 동시대 가정의 시공간을 환기하게 하는 어떤 지표도 지워버릴 것. 그런 의도에 따라 배치된 구성물들은 아르누보 풍의 벽지 장식과 기이한 원색 풍의 색조, 이국적인 가옥 재질과 현대적 실내구조의 모자이크다. 이 모든 화면구성과 소도구들은 방과 방, 복도와 부엌 곳곳에 틈새를 열어젖힌다.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채도의 색채는 이 폐쇄된, 외부로부터 고립된 집에 신경과민의 기운을 짙게 감돌게 한다.
이러한 구조들을 탄탄하게 구축한 다음 감독이 동원하는 장치는 '놀라움(surprise)'이다. 그 놀라움은 철저하게 시청각적인 순수성을 지향한다. 목조건물의 외골격에서 오는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객관적 시선에 의한 텅 빈 복도의 쇼트,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관찰 쇼트로 긴장을 조성한 다음 관객들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식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의 비명을 가장 크게 자아냈던 두 장면은 모두 이러한 기법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신경을 곤두세운다. 수미의 꿈 시퀀스에서 원귀가 스멀스멀 침대 저편에서 기어 나와 수미가 누운 침대 위에 대롱대롱 부유할 때, 싱크대 장면에서 계모 은주에게 원귀의 거무죽죽한 손이 일격을 가할 때다. 이 장면에서 발생하는 경악은 재현대상인 원귀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화면 공간과 내화면 공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더욱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이렇듯 <장화, 홍련>이 의존하는 공포의 방식은 철저히 미디어 지향적이다. 이 영화가 <링>을 위시한 일본 현대 공포영화와 나란히 놓이는 까닭도 미디어라는 낯익은 매질 속을 투과하는 비가시적 낯설음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미디어 지향적 공포감은 영화매체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파스칼 보니체르는 "영화적 이미지는 그 장소에 부재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한다. 프레임이 그렇듯, 눈에 보이는 이미지는 항상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가시적 시공간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매혹과 공포를 가시적인 시공간에 퍼뜨린다는 것이다. 유령적인 존재와 환각적인 분위기는, 비가시성과 가시성 사이의 끊임없는 차이와 반복 위에서 떠다닌다. 그러나 이것이 공포를 야기하는 영화적 환상성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에서는 조형적인 밑그림과 카메라의 터치와 인물들의 내적 윤곽이 긴밀하게 연결되었을 때 두려움과 떨림의 정신적 지도가 그려진다. 비가시적인 것의 극대화는 이러한 지도를 그리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비가시적인 것은 충만함을 필요로 한다. 비가시적인 것과 충만함의 변증법이 공포의 시공간을 축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을 향해 접어들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스스로를 펼칠 때 불안과 유동성이 퍼져나간다.
<장화, 홍련>에서 비가시적인 것, 바깥은 안과 소통하지 못한 채 즉물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수연의 질환과 발작은 복잡하게 집안 도처에서 폭발하지만, 그것이 인과적인 구조물을 만들 거라는 기대는 배반되고 지연되다가 반전이라는 기둥과 에필로그라는 지붕이 설치되고서야 어렵사리 채워진다. 그 구조물 내부에서 최초에 매복한 공포는 잠재적 수준에 맴돌고 두려움과 놀라움이 인물들에게 들러붙으며 관객들을 급습한다. 이 영화는 시청각적으로는 외화면 공간에 놀라움의 실체가 있음을 끊임없이 주입시키지만, 정작 그 공간은 수미의 내면과 접하지 못한 채 카메라와 소리의 물리적 자극만으로 채워질 뿐이다. 그 자극의 물량공세 속에서 수미의 숨겨진 욕망과 내면적 외상은 관객이 내지르는 비명과 심장박동의 증가로 전이되지 못한다. 이 외딴 집에서 우리는 시청각적 충격이 주는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가족의 갈등과 불신이라는 모티브를 끼워 맞추는 퍼즐게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괴리감을 채워놓기 위한 방도는 한껏 고양된 '분위기로서의 공포'에 동참하는 길 뿐이다.(따라서 이 영화를 비가시적 시공간을 유령으로서의 존재가 출몰하는 문턱으로 활용했던 <식스 센스>나 <디 아더스>와 유사하게 취급하는 것은 오류다)
따라서 이 귀신들린 집에는 원귀는 있을지언정 원귀를 떠돌게 하는 원한의 힘이란 없다. 그 원한은 원작인 『장화홍련전』의 행간에만 떠돌 뿐이다. 원한의 힘이 거세된 자리를 탐미적인 아름다움과 난공불락의 카메라-소리가 채워놓는다. 그 속에는 '충격과 공포'는 있지만, 공포의 내밀한 기원인 '불길하고 두렵지만 매혹적인 어떤 것'의 형체는 자리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시청각적인 공포가 끌어들여야 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실체였다. 거기에 대면했을 때 이미지가 환기하는 미지/기시감(deja-vu)의 자웅동체(雌雄同體)도 활개를 쳤을 것이다. <장화, 홍련>은 미디어가 환기하는 공포에 함몰되어 바깥의 힘을 스스로 망각해버린 동시대 공포영화를 전근대적 서사의 집에 감금시킨 모양새다. 그 작업의 와중에는 효과로서의 환상성만이 반복될 뿐, 피안과 차안 사이를 떠도는 마성(즉 환상성의 요체)은 달아나버린다. 그 유령의 내력을 포착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공포영화를 새로운 상상력에서 재해석하겠다는 감독의 축문은 지나친 완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적 적용 속에 사라진 무의식
이러한 완력을 완화시키기 위해 <장화, 홍련>은 수미의 기억 안으로 뒷걸음질치면서 고도의 심리전을 준비한다. 그 심리전이 내놓는 히든카드는 죄책감이다. 원귀는 외부의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원귀는 상처받은 자아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다. 더구나 그 원귀는 간절하고도 강렬한 죄의식이 불러 모은 판타지다. 감독이 말한 '슬픈 공포영화'의 요체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원귀는 동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것들을 철저히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한 소녀가 꾸며낼 수밖에 없는 가공의 존재다. 허깨비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역설을 생명수로 삼는다. <장화, 홍련>은 바로 그 존재를 놓아주지 못하는 수미의 손과 겁에 질린 창백한 표정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갓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에겐 생모와 여동생의 죽음, 계모의 등장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었으며,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분열된 그녀의 마음은 그 비극을 더욱 잔혹하게 부둥켜안고 자신만의 벽장 속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러나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장화, 홍련>은 원작은 물론 영화의 비극적 감흥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장치를 동원한다.
<장화, 홍련>은 찰나적, 순간적인 정서에 의존하면서도 이를 심리학이라는 거대담론으로 포괄하려는 양가적 욕망에 빠진다. 수미가 아버지에게 품은 적대감과 계모에 대한 심리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산발적인 시선교환과 기괴한 행동의 단편들로만 나타난다. 영화는 이것들을 구체적인 상황이 아닌 비동기적인 충격의 인상으로 체험하라고 권고한다. 즉 감독이 권유하는 이 영화의 감상법은 "순간적인 발작 증세와 이상한 기운의 공포"를 마음껏 느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화, 홍련>은 수미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심리에 원초적 기원을 부여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욕망에 따르면 수미는 은주를 사무치게 미워하면서도 그녀와 동일화를 하는 일종의 다중인격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 다중인격이라는 진단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원인이 제시된다. 이 영화에서 수미의 판타지는 그녀의 억압된 성적 욕망이 외연으로 나타난 결과다. 그 판타지란 계모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다는 일종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다. 만약 이러한 시나리오를 적용한다면 아버지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수미의 반항은 계모에 대한 증오심만으로는 볼 수 없다. 여기에는 여성의 초경 시기에 겪는 사춘기 콤플렉스가 하나 더 붙는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가 혼백이 된 이후에는 계모에 대한 질투로 수연을 되살릴 수밖에 없는 수미의 몸부림도 이런 연원에서 설명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수미의 죄의식이라는 인테리어에는 하나의 벽지가 더해진다. 영화에서 계모와 수미, 아버지와 수미의 갈등을 나타내는 소소한 디테일들도 바로 그 벽지를 따라 장식될 수 있긴 하다. 아버지의 속옷을 챙기는 것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계모와 수미, 소파에서 잠을 자는 아버지에 대해 마치 연인처럼 얼굴을 어루만지는 수미의 모습, 이와 대칭적으로 아버지와의 잠자리를 간절히 원하는 듯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는 은주의 모습.
이러한 설명은 수미의 증상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임상심리학적으로 구원하는 처방전으로 제출된다. 물론 영화 속 그녀는 치료받지 못하지만 그녀의 다중인격 연극을 납득시킬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납득시키는 방법은 분명 상담과 치료를 통한 원인규명에 있지 않다. 영화는 그것이 수미의 끔찍한 예민함과 쇠약한 신경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인물들의 정황을 극단적으로 불명확하게 흩어놓고 이를 다시 배열하는 미스터리의 구조를 택한다. 등장인물들과 관객들의 얼굴을 파랗게 질리게 했던 이미지-소리들도 모두 미스터리의 해명과정으로 수렴된다. 영화 처음에 수미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두 개의 같은 일기장, 똑같은 무늬들의 옷, 장롱들은 수미의 증상을 설명하는 은유의 논리에 포섭된다. 이에 따라 수미와 은주(사실상 이 장면에서 시점 쇼트는 두 명의 인격체가 사실 하나였음을 밝혀주는 단서일 뿐이다)가 동시에 두들겨 패는 보따리의 정체도 밝혀진다. 수미는 은주의 인격을 빌어 자신의 금지된 욕망(아이에 대한 욕망)을 처벌하고 싶었고 생모와 동생에 대한 고통을 전환적인 히스테리로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소리들의 은유는 무의식의 재현에 기여하지 않고 도리어 무의식을 도식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곧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혼동하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감독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정말 혼란스러운 영화인데 그 어떤 자연주의 영화보다 더 섬뜩한 리얼리티를 주는 순간이 있다. 나는 영화라는 것이 또 다른 리얼리티의 세계로 들어가는 창구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로스트 하이웨이>는 <장화, 홍련>에 나타난 은유의 질서와는 달리 이미지들의 인접과 환유로 무의식의 기제를 나타낸 영화였으며, 그 무의식이 접근하고자 하는 대상은 상징의 밑그림을 산산조각 내는 불확실성과 혼란의 핵심, 즉 실재(The Real)였다. 욕망을 추동시키고 가로막는, 그 과정에서 희열과 경악을 산출하는 것은 바로 그 실재의 검은 구멍, 벌어진 틈이다. 그 구멍과 틈을 메우는 과정에서 판타지가 발생한다. 영화의 이미지와 소리는 그 판타지를 상연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외연을 넓히고 무의식이란 검은 대륙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스티븐 히스는 영화에서 이러한 시도가 결코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적 개념의 교과서적 적용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영화는 설명의 수단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적 충격의 극단을 던져주는 경험의 소재다. 영화는 정신분석학을 번역할 분 아니라 그것에 맞서기도 한다."
<장화, 홍련>에서 심리학적 전제에 사로잡힌 결정적인 순간은 반전으로 일컬어지는 두 가지 장면, 즉 "수연은 죽었어."라는 아버지의 대사와 거실에서 은주의 얼굴이 수미의 얼굴로 변이되는 부분이다. 이 두 장면은 영화에서 비교적 무의식의 무대화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는 설정인 장롱과 침대를 수미의 환상적 등가물로 무력화시킨다. 그 순간 영화 중반까지 집안을 빼곡하게 채웠던 기괴한 상황들, 의혹과 불신의 시선들은 물론 아름답고 괴괴한 인테리어들도 모두 수미의 주관적 시점에서 재배열된다. 그와 동시에 인물과 인물을 미묘한 감정관계로 엮어주는 관계의 고리들(가령 누구의 것인지 불확실했던 머리핀이나 두 개가 되는 일기장)은 영화 전체와의 연결지점을 상실한다. 영화 중반까지 논리보다는 직관을 통해 느껴야 한다고 주문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논리의 골방 속으로 들어가는 운명에 처한다. 그 과정에서 수미의 무의식은 물론 예민하게 도드라진 감성들도 형형색색의 옷감이 아니라 탈색된 순백의 환자복을 입어야 한다.
<장화, 홍련>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심리학은 인간의 응어리진 내면을 밝혀주는 원소가 될 수는 있으나 무의식의 운동을 도식화하는 매트릭스도, 무의식의 소스로 접근하는 열쇠도 될 수 없다. 모든 인물들의 모호한 행동들과 미묘한 감정들이 수미 스스로가 뒤집어쓴 가면놀이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 우아한 공간을 정신없이 휘젓는 끔찍하고 비극적인 덩어리들은 어디에 자리해야 하는가. 그 덩어리들이 수미의 환상을 부속하는 장식이라면 이는 영화의 이미지 작동기제를 무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무의식의 모조품으로 치부하는 일이다. 그 모조품이 너무나 인공적이고 작위적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여성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구원하거나 가부장제의 모순(무력하고 책임회피적인 아버지에 대한 징벌)을 폭로하려는 독해는 도식적인 분석요법의 시술로 전락한다.
<장화, 홍련>에서 충격과 공포는 슬픔의 전염과 확산을 강화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완화시키고 슬픔을 말초신경의 근저에서만 반복 순환하게 한다. 슬픔과 죄의식의 기원은, 모든 것을 안락하게 충족시켰다고 자부하며 '행복한 우리 집'이라는 카피라이트를 내건 핵가족제의 반사회적 기원일 것이다. 그 기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출입구가 과연 수미의 집에는 있는가. 휘황찬란한 문양의 벽지와 고풍스러운 장롱이 그 출입구라 말할 수 있는가. 으스스한 복도와 거슬리는 잡음이 그러한 기원을 설명하는 알레고리라 말할 수 있겠는가. <장화, 홍련>은 이 모든 질문들을 저택 바깥으로 내몰아버린다. 그 폐쇄적인 살풍경 속에서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의 태피스트리를 직조함으로써 인물들의 뒤얽힌 정신적 관계를 드러내려 시도하지만, 그 태피스트리에 현란하게 박힌 지각과 감정의 생생함은 인물들의 심리 밑바닥으로 침잠하지 못한 채 표면적 무늬만을 남긴다. 그 무늬 속에서 무의식의 검은 구멍은 봉합되어 자취를 감춰버린다. 남은 것은 수미의 정서적 슬픔과 그녀의 정신적 비정상성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동원된 관습적인 결말뿐이다. 감독은 전래동화의 전복적 급진성을 버리고 마음의 공포를 잡아내기 위해 애썼다며 "히치콕의 살인 장면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만 히치콕은 살인의 순간에도 드라마의 짜임새를 극대화하면서 무의식의 형상들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거기에는 어떤 무게 잡힌 심리학적 주석도, 테크닉의 속도위반도 없었다.
[출처 = NK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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