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브레드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핏줄이다.
어떤 혈통인가, 어떤 말의 피를 이었는가
대지를 달리는 경주마들에게 혈통이란 데뷔전에서부터 압도적인 주목을 받게 하기도 하고
연패 도중이더라도 부활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계속해서 팬들이 응원하게 만들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때 모든 경마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일본 경마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초우량 혈통의 말이 있었다.
조부는 「세계에는 두개의 혈통이 있다. 노던 댄서와 그 외」라는 말이 나오게 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전세계를 자신의 자식들로 석권시킨 세계적 종마 노던댄서
아버지는 경마의 본고장, 영국에서 사상 15마리째이자 마지막 클래식 삼관을 달성하고 생애 단 두 번의 2착을 제외하고 출마한 모든 경기를 우승한 전설적 명마 니진스키
외조부는 미국 최고의 명문 혈통인 라 트로이엔의 피를 잇고 미국에서 31전 25승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던 「무결점의 말」 벅패서
외조모는 미국 3살 암말 챔피언이었던 킬
그리고 그들의 피를 잇고 태어난 말
[슈퍼카] [마루젠스키] 되시겠다
이름의 유래는 마주의 집 이름인 마루젠(丸善)에 아버지 이름인 니진스키에서 따온 스키를 합친 것.
임신한 어미말 실을 일본으로 수입해 일본에서 출산한 지입마(한국 경마 용어로는 포입마)다.
1974년 5월 19일 마루젠스키는 모두의 기대와 축복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기쁨의 탄성은 마루젠스키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갓 태어난 마루젠스키의 앞다리가 바깥으로 휘어져있던 것이다
앞다리가 바깥으로 휘어져있는 말은 경주마에게 있어 치명적인 부상, 굴건염에 걸릴 확률이 높고
부상의 위험성 때문에 강도있는 훈련을 하기가 어렵다.
즉 마루젠스키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다리에 폭탄을 달고 태어난것이나 다름 없었다.
위대한 핏줄을 타고 났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경주마로서 가장 큰 약점도 함께 갖고 태어난 마루젠스키
하지만 다리를 제외한 마체는 훌륭했기 때문에 하시모토는 마루젠스키를 경주마로서 키워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성장함에 따라 심해지는 다리의 휘어짐과 함께
마루젠스키는 그렇게 데뷔전을 맞이하게 된다
선천적인 약점 때문에 만족스러운 훈련도 받지 못하고 나간 데뷔전
그 뛰어난 혈통에 대한 기대감으로 1번 인기로 레이스에 나선 마루젠스키는 자신의 혈통에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다리 때문에 걱정하던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을 준다
결과는 10 마신차 이상의 대차(大差) 압승
이어지는 조건전에서도 2착과 9마신 차이로 압승
결코 도주 전략을 사용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말들과는 기본 스피드 자체가 너무나도 차원이 달랐기에 나오는 결과였다.
세번째 경주였던 후츄 3세 스테이크스에서 처음으로 히시 스피드에 사진판독 결과로 진땀승을 거둔 후, 조교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다루던 방침을 전환, 기수에게 '책임질테니 풀 파워를 내 봐라'라고 했고,
그 결과는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히시 스피드를 2.2초(13마신 이상 차이)나 앞지르며 1분 34초 4, 코스 레코드를 깨부수는 압승으로 돌아왔다.
3세 시즌 4전 4승으로 최우수 3세마에 선출된 것은 덤.
이때 마루젠스키가 남긴 기록은 1990년에 미국말 린드셰이버에게 갱신될 때까지 14년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았다.
진심을 다한 마루젠스키의 압도적인 스피드
하지만 이마저도 나카노와타리 기수의 "나는 말 위에 얹혀있었을 뿐"이라는 말을 보면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였던걸로 예상된다
4전 전승 그것도 대부분 압도적인 차이로 우승
4살이 된 마루젠스키는 이제 더 강한 말들이 있는 코바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4살마 초전으로 츄쿄경마장의 오픈 경주에 등록했던 마루젠스키였지만
너무나도 강한 마루젠스키가 등록을 하자 출마를 거절하며 회피하는 말들이 속출
규정 마리수를 채우지 못해 경주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 이후로도 마루젠스키가 출마하는 경기는 회피마가 속출해 단 한번도 10마리 이상과 함께 경주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마리수 부족으로 경기가 열리지 않나 했지만
관서의 조교사, 핫토리 마사토시가 자신이 관리하던 말 두마리를 출전시켜주어 간신히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결과는 마루젠스키의 당연스러운 1착
이때의 차이는 2.5 마신이였는데 이는 핫토리가
"우리쪽 말을 빌려준거니까 너무 큰 차이로 이기는건 봐달라"
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 한다.
5전 전승의 마루젠스키
그 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된 사람들은 당시 일본에서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슈퍼카」라는 별명을 붙여 그에게 열광하였다.
하지만 그의 승승가도는 여기서 잠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마루젠스키가 무릎을 골절한 것이다.
내려진 처방은 3개월의 휴양
무사히 휴양을 마친 마루젠스키는 5월에 복귀
더비 3주전에 열린 오픈전에서는 2착과의 7 마신 차이 압승
일본의 경마팬들은 다른말들과는 엔진부터가 다른 이 「슈퍼카」가 더비에 나가 세대 최강마라는걸 당당히 증명하길 원했다.
마루젠스키의 오너인 하시모토도, 기수인 나카노와타리도, 일본의 많은 경마팬들도,
모두가 원했던 마루젠스키의 더비 출마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강한 말도 지입마는 국산마로 대우하지 않던 당시 규정상 클래식 경주에 나갈 수 없었다는 것.
주전 기수였던 나카노와타리 세이이치는 더비가 열리던 주에 인터뷰에서
"더비에 나가고 싶다. 맨 바깥에서 출발해도 좋다. 다른 말의 방해는 일절 하지 않는다. 상금도 필요없다. 이 말의 능력을 확인만 하면 좋다"
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더비에는 나갈수 없었다.
거기에 오너인 하시모토 역시 재판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포기
이 사실이 경마 팬들에게 알려지자 하시모토에게는 「어째서 간단히 포기하는거냐」「왜 고소장을 내지 않는거냐」와 같은 편지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에 일본 중앙 경마회(JRA)가 「지입마가 출전 가능한 중상 레이스를 11 경기에서 78 경기로 확대」라는 완화정책을 내려 했지만
일본의 경주마 생산단체인 일본 경종마 협회가 맹반발. 결국 완화정책은 백지로 돌아가버리게 된다.
대신 의미가 있다면 이 때의 논란을 계기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조교한 말을 왜 국산마와 차별하는가?'라는 여론이 일어나 [1984년에 지입마의 차별이 폐지] 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결국 울분을 머금고 마루젠스키가 향한 곳은 더비에 출마하는 말들은 나가지 못해
「2군 더비」라는 속칭으로 불리던 일본단파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비에 가지 못한 울분을 터뜨릴 마루젠스키의 모습을 보기 위해 8만명의 관중이 모였다.
마루젠스키는 당연 1번 인기. 그 단승배율은 경악의 1.0배
모두가 마루젠스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가운데 레이스가 시작됐다.
언제나처럼 압도적인 차이를 벌리며 선두로 나가는 마루젠스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3코너에서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뒤따라오던 프레스토우코우에게 잡힐듯한 거리를 내주게 된다
이때 다시 가속한 마루젠스키는 그의 압도적인 스피드를 다시 한번 뽐내며 1착
중간에 속도를 줄이는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착과의 거리는 7 마신차의 압승
마치 더비에 나가지 못한 마루젠스키가 자신의 강함을 시위라도 하는 듯한 경기였다.
2착인 프레스토우코우는 훗날 교토신문배, 킷카상을 신기록 갱신 우승을 할 정도의 명마였지만
마루젠스키에게 있어 그는 단지 자신의 화풀이상대에 불과할 정도였다.
마루젠스키가 다음으로 향한것은 삿포로에서 열린 단거리 스테이크스
이 경기에는 당시 최강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토우쇼우보이도 출마할 예정이었지만
마루젠스키가 출마를 하자 회피
출전 마리수는 5마리 뿐이었지만 언제나 마루젠스키에게 가려져있던 히시스피드, 중상 6승을 거둔 야마부키오 등
결코 레벨이 낮은 대회는 아니였다.
그렇게 마루젠스키의 첫 더트전은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는 마루젠스키의 압도적 1착으로 우승
거리를 벌리기 힘든 단거리 더트전에서 무려 10마신 차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으로 우승을 하게 된다.
8전 8승
그 누구도 압도적인 마루젠스키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마루젠스키가 향한 곳은 단 하나
당시 일본 경마계가 지입마에게도 문을 열어주던 유이한 G1급 레이스, 아리마 기념 뿐
하지만 이때
결국 마루젠스키의 발에 달려있던 폭탄이 터져버렸다
굴건염
위대한 핏줄을 타고 태어난 마루젠스키가 태어날 때부터 안고있던 저주
마치 시한폭탄처럼 마루젠스키의 남은 현역 활동 가능 시간을 재던 그것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부상이 터졌을때는 그리 무거운 증상은 아니였지만 아리마 기념을 향해 재활을 하던 중 또 다시 재발
지입마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일본 경마계 대신
더 큰 무대에서 뛰기 위해 이전부터 검토하던 해외 원정도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루젠스키는 단 한번도 큰 무대에 올라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보지도 못하고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참고로 끝내 마루젠스키가 출전하지 못한 22회 아리마기념에서는
일본단파상에서 마루젠스키에게 농락당하고 7마신차 패배했던 프레스토우코우가 6마신차 4착을 해
많은 경마팬들에게 마루젠스키가 출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겨주게 되었다
데뷔전 대차
히이라기상 9 마신차
후츄3살마S 코 하나차
아사히배3살마S 대차
4살마 오픈 2.5 마신차
4살마 오픈 7 마신차
일본단파상 7 마신차
단거리S 10 마신차
총 8전 8승 합계 거리차는 약 61마신
1 경기당 약 7 마신 꼴로 전승을 하고 은퇴한 마루젠스키
그의 은퇴식에서 팬들은 이런 현수막을 걸었다
「잘가라 마루젠스키」
「계속해서 구전(口傳)할 것이다」
「너의 강함을」
위대한 명마의 피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저주를 함께 갖고 태어난 마루젠스키
그 태생 때문에 레이스에서는 전력을 내보지 못하고
전력을 내고 싶은 레이스에는 출마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팬들은 기억하고 있다
「슈퍼카」처럼 누구보다도 빠르게 경마장을 질주하던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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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후 씨수말로 데뷔, 호리스키, 스즈카코반, 레오다반 등의 우수한 자마들을 초기부터 배출한 덕에 84년부터 91년까지 연속으로 리딩 사이어 TOP 10 안에 들었고, 현재도 모계 쪽으로 그 혈통이 상당 부분 내려오고 있다.
[스페셜 위크] 의 어머니도 바로 이 마루젠스키의 자식.
마루젠스키의 기수인 나카노와타리는 훗날 "7,80% 정도의 힘으로 이겨왔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고
다리의 부상 위험 때문에 훈련도 마음껏 받지 못해서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진짜 능력의 일부 뿐" 이라는 조교사의 코멘트도 남아있다.
출처 https://m.dcinside.com/board/umamusme/95401?headid=60&recommen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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