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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11/04 11:46:49 |
Name |
SEIJI |
Subject |
[유머] 인간극장 지연규편 |
그는 어깨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볼을 던졌다. 이를 악물고 던진 볼은 15m도 날아가지 않았다. 순간 그는 물론 볼을 기다리던 포수까지 고개를 떨궜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곧바로 구단을 찾아갔다. "더이상 안되겠습니다" 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유니폼을 반납하고 나오는데 눈물이 흘렀다. 어깨가 아파서가 아니라 가슴이 아려서였다.
나이 스물아홉에 야구 인생을 끝내야 한다는 것보다 프로 7년 동안 한번도 마음껏 던져보지 못하고 마운드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때가 1998년 가을. 온갖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야구를 했던가' 부터 '조금이라도 일찍 수술을 받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까지. 92년 빙그레에 입단한 그는 허리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했고 97년 7월에는 어깨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재활을 거쳤지만 어깨는 낫지 않았다. 볼을 던질 때마다 통증 때문에 어깨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유망주' 지연규가 잊혀졌다. 천안북일고 시절 전국대회 3관왕을 이끌었던 잠재력도, 동아대 시절 정민태.구대성(당시 한양대)과 함께 '빅3' 로 불리며 국제무대를 주름잡던 명성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그나마 그런 잠재력과 명성 덕분에 7년 동안 버틸 수 있었다. 성적이라곤 3승4패가 전부였다. 그때 연봉은 고작 1천5백만원이었다.
손에서 볼을 놓고 나니 그렇게 후련할 수 없었다. 얼마 동안은 TV중계도 보지 않았다.
"이종범 홈런!" "정민태 완봉승!" "구대성 세이브!" 등 아마시절 절친했던 동료들의 활약 소식은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야구말고는 생계수단이 없었다. 선배의 소개로 대전고 코치를 맡았다. 어린 학생들과 같이 뛰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같이 했다. 볼을 던질 수는 없었지만 마냥 앉아있긴 싫었다.
2년이 지나갔다. 그 사이 거짓말처럼 어깨가 좋아졌다. 아니 확실히 몰랐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캐치볼도 조금씩 하고 배팅볼도 던졌다. '다시 할 수 있다면…' 하는 재기의 욕망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지난해 10월 30일 대전구장. 그는 한화의 신인 공개 테스트에 응시했다. 시속 1백45㎞의 빠른 공을 던졌다. 합격했다.
11월 1일부터 마무리 훈련에 합류했다. 3년 만에 입어보는 유니폼이었다. 낯선 51번의 등번호를 달고, 어깨에는 수술때 박은 쌀알만한 핀을 그대로 남겨둔 채 서른둘의 지연규는 다시 도전한다.
그의 꿈은 단 하나. '한번만이라도 원(怨)없이 던져보고 싶다' 는 것이다. 도전은 스포츠가 주는 진정한 미학 가운데 하나다.
지연규의 시도. 앞으로 그가 던질 볼은 18.44m 떨어진 홈플레이트를 통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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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던 아빠가 다시 선수로 뛴다고 했을 때 효선(10)이는 뛸 듯이 기뻤답니다.
“아빠. 이제 다시 TV에 나오는 거야? 야구부 오빠들에겐 미안하지만…. 그치만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아빠는 그런 효선이를 보면서 모처럼 뿌듯합니다. 2000년 10월 30일. 한화 지연규(37)가 대전고 코치를 그만 두고 연습생 선발 테스트에서 합격하던 날이었습니다.
시간을 더 뒤로 돌려봅니다. 92년. 정민태. 구대성과 함께 대학무대 트로이카로 명성을 날린 지연규는 한화에 입단합니다. “프로를 얕보던 때였죠. 내 공에 자신있었으니까.”
그러나 그해 1월말 입단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뒤 2월에 곧바로 탈이 납니다. 기나긴 재활이 이어졌고 96년까지 5년동안 단 3승에 그친 뒤 프로 무대를 떠나 98년부터 대전고 코치가 됩니다.
나이 서른 넘은 연습생. 2001년 단 3이닝을 던져 승패없이 방어율 9.00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래도 그라운드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마음. 2002년부턴 달라집니다. 그해 4승9패를 기록. 앞선 첫번째 선수생활동안 기록한 3승을 뛰어 넘습니다. 2003년부터는 플레잉코치로 나섰고 2005년에는 마무리로 20세이브를 올렸습니다.
올해는 사실 몸이 안돼 2군에서 선수를 지도하며 현역 은퇴를 준비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죠. 한국시리즈에는 한번 서보고 은퇴하자고 했는데…. 효선이하고 약속했는데. 그 꿈이 자꾸 걸려서….”
그런데 핵심 불펜 최영필이 시즌 도중에 부상으로 이탈하고. 그는 9월 1군으로 호출됩니다. 9월27일 광주 KIA전에서 승리투수가 돼 통산 10승 기록도 달승합니다. “남들이 보면 웃을 기록이지만. 저한테는 얼마나 소중한지….”
드디어 28일 한국시리즈 5차전. 패전처리용 불펜이던 그는 1-1동점이던 6회 나와 예상을 깨고 10회까지 4이닝동안 1안타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 한화의 기사회생을 이끌었습니다. “정말 어깨가 빠지도록 던졌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자주 들던지…공을 놓을 수가 없어서…”라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던진 공이었던 것입니다.
효선이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 너무 멋져요”라고 합니다. 아빤 “이기지도 못했는걸…”이라고 미안해합니다. 그러자 딸이 울먹이며 “그래도 너무 너무 잘던졌잖아요.” 아빠도 눈물이 핑 돕니다.
“나중에 후배들이 저를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랑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이 찾아오면 이제 한마디 해줄 말이 생겼습니다. 사람에게 꿈이라는 거. 그게 어떤 건지 저의 패자부활전 인생을 통해 보여줄 겁니다.”
지연규의 생애 마지막 한국시리즈였습니다. 이제 그는 전업 지도자로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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