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모두가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유머글을 올려주세요.
- 유게에서는 정치/종교 관련 등 논란성 글 및 개인 비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6/08 14:45
이 때보다 51년 1월에 37도선까지 밀렸을 때가 더 긴박한 순간입니다. 저 지도에 있는 시기는 인천상륙작전 준비하느라 저리 된 면도 있어서요
18/06/08 15:25
개전 초 3개사단(1,6,8)만 남았다가 저 시기면 오히려 재편성으로 수가 늘어난 상태죠.
6월 25일 당시 한국군은 전선에 1,7,6,8 4개 사단이 각각 개성, 문산, 춘천, 강릉에 배치되어 있었고 후방에 2,3,5사단과 수도사단이 배치된 8개 사단 체제였습니다만, 문산에서 의정부를 돌파해 온 북한군 주력에게 7사단이 중과부적으로 와해되고, 이후 2,3,5사단을 방어전에 축차투입하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조치로 이를 싹 다 말아먹습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이씨가 한강다리를 폭파하면서 와해된 병력들은 강을 넘어서 후퇴하지도 못하고 소멸했죠. 그 조치를 피한게 한강 하류(개성, 연천)에서 장비 죄다 버리고 몸만 도하한 1사단과 춘천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해낸 6사단, 그리고 상대적으로 공세가 덜한 동해안을 맡았던 8사단의 3개 사단 뿐이었고요. 그리고 8사단은 2개 연대밖에 없는 미니사단이었고요.
18/06/08 15:30
저 당시 북한군 사단들은 부대 수는 많지만 실제 전력은 거의 소진되어 사단별 전력이 3천-5천 수준에 불과했다는 말이 많습니다. 게다가 태반이 남한에서 강제징병한 의용병이었다고도 하고요. 그에 비해 유엔군은 슬슬 미 본토에서 재징병한 병력이 차례차례 도착하면서 실제 규모에서는 포위한 쪽보다 더 우위였다고 보는 이들도 많아요. 물론 장비에서는 아예 비교할 바가 안 되었고...
18/06/08 15:35
스탈린그라드 라는 이름의 상징성때문에 포기 못하던 히틀러처럼 815라는 숫자의 상징성때문에 김일성이 지나친 속공을 주문해서 공세종말점이 앞당겨진 상태였죠
18/06/08 15:33
영천 전투의 뒷이야기 중 하나가 당시 2군단장이었던 유재흥이 미국 사단장한테 전차 1개 소대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일입니다. 명색이 군단장인데 전차 구걸하다 거절당했다고 정일권이에게 토로하자, 정일권이 워커 장군에게 한 소리 하니까 그제서야 워커 장군이 전차 보내주라고 했답니다.(빌려주면서 잘 쓸까 걱정했는데 잘 썼다고.)
영천 뺏겼을 때 뉴 코리아 플랜 목적지는 서사모아였습니다.
18/06/08 15:38
서사모아가 어디야 했더니.. 오세아니아 제도에 속해있는 태평양 한가운데군요 =_=;
지금 농담처럼 얘기하는 섬나라가 아니라 레알 섬나라 될뻔..
18/06/08 17:22
다부동 전투와 대구 일대보다는 마산 방면의 전투가 더욱 결정적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국군의 지연전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고 낙동강 방어선 즈음에선 인민군의 공세 종말점에 다다랐다는 얘기들이 많거든요. 설령 대구까지 밀린다 가정해도, 대구에서 부산까지 직선으로 오려면 그 다음이 밀양인데 여기도 지형이 꽤 험해 군대의 이동에 별 도움이 안 되고요. 이 시점에 노련한 방호산과 인민군 6사단이 호남을 빙 돌아 마산을 쳤는데, 여기서 측면이 밀렸으면 훨씬 위험했을 것 같습니다.
18/06/09 16:15
아 그러고보니 부울경,마창진 데이비드슨 선이란게 보이군요.
근데 위에 본문대로만 북한&중국군이 데이비드슨 근처도 못가고 대구도 못 넘은것이 사실인듯.. 여태까지 대구는 함락됐었는줄 알았거든요. 의외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