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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1/16 08:47:10
Name [NC]..SlayerS_NaL-Da
Subject [유머] - 20일 후에 죽는 남자 -



스크롤의 압박을 조금만 참아 주신다면

좋은 일이 생기실 거에요 ^^


      - 상편 -



"자, 이제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의 이름을 쪽지에 적어요."




희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 내가 가진 쪽지에


또박또박 이름 석자를 적어넣었다. 다른 친구들도 각자 자신의


쪽지에 이름을 적었다. 희수는 남자팀의 쪽지와 여자팀의 쪽지를


합하여 잠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두 커플 탄생이다! 철민이와 혜숙이, 현준이랑 정희!"




사람들은 와 하고 박수를 쳤고, 난 약간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는


정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기뻐서 떨리는 가슴을 애써 억제하며


싱긋 웃었다. 오늘처럼 나의 비밀스런 능력에 감사하기는 처음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커플들은 커플들끼리,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끼리


애프터 약속을 잡은 후 각자 작별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향이 같은 희수와 나는 오늘 있었던 미팅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희수가 날 쳐다보며 말했다.




"야야.. 현준아, 근데 너 정말 재수도 좋다... 정희가 니 이름 적을 줄은


알고 있었냐?"


"후훗.. 물론이지."


"짜식, 뻐기기는.. 솔직히 정희가 오늘 젤 퀸카였잖냐. 근데 난 걔가 넘


이뻐서 아예 포기하고 이름도 못적었었는데..."


"후후.... 난 정희가 나 적을 줄 알고 있었다니깐."




계속 웃음을 띠고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희수는 싱겁다는 듯이 어깨를


툭 쳤다. 물론 여전히 부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난 미래를 볼 줄 아는 남자다. 누가 들으면 무슨 소리냐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난 정말 미래를 볼 줄 안다.


물론 그 미래는 내가 원하는 때에 항상 보여지진 않는 것이었다. 가끔 나도


원치 않았던 때에 나의 미래는 갑자기 내 눈앞에 환상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 환상은 아주 또렷하게 나에게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일들을


알려주었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나만의 미래를 말이다....













내가 나의 이런 신비한 능력을 처음 알게 되었던 건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난 갑자기 속이 약간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끼며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곤 내 눈앞에 또렷한 영상이 떠올랐다.


그 영상은 아버지가 도로에서 트럭에 치어 돌아가시는 내용이었다.


무서워진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한테 그 사실을 알렸으나,


어머니께서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핀잔만 주실 뿐이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환각을 보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약 일주일 쯤 후의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아버지는 출근길에 브레이크가


고장난 트럭에 치어 돌아가셨다. 내가 본 환각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었다.


난 비록 그 자리에 있진 않았었지만, 얼마전에 본 환각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도 내가 겪은 일들에 많이 놀라워 하셨지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너무 큰 탓에 그 기억들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뒤로도 난 가끔 미래에 내가 겪을 일들이 눈 앞에 또렷하게 흘러가는 현상을


몇번이나 겪었다. 그리고 내 눈에 비친 미래는 매번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생각하면


섬뜩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 뒤로는 특별히 나쁜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사소하거나 좋은 일들이었고, 몇몇의 경우는 미래를 미리


보아 알고 있는 탓에 나쁜 일들을 미리 피해갈 수 있어서 오히려 나의 이 이상한


능력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난 정희라는 여자를 미팅 자리에서 만나 이루어지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그 환상은 결국 아까 있었던 파트너 결정을 위한 쪽지에


정희의 이름을 적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난 정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의 열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너무


좋은 감정이 오히려 사랑의 표현을 하기가 더 어렵게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미팅이 있은 후 정희를 몇 번 만나게 되었지만 쉽사리 사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정희도 미팅 자리에선 내가 마음에 들어서 내 이름을


적어 내었겠지만, 정말 내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될 만한 사람인지는 아직 생각도


하지 않을런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럴 때 나만의 능력인 미래를 보는 능력이 한번 쯤 발동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사귀자는 고백을 했을 때, 정희의 반응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내 의지를


결정하기가 훨씬 쉬워질 텐데...


어쩌면 미래를 보는 능력이 날 더 나약하고 어딘가 의지하고 싶어하는 성격으로


바꿔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굳이 그 능력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서 지금처럼 그 힘을 더 간절히 바라는 내가 된 것이었다.




한동안의 고민끝에 난 결국 내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소신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나의 능력에 의지하며 무작정 기다리기엔... 그녀는 너무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한달, 하루... 아니 1분이라도 더 많이 정희와 같이 있고 싶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곧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싶게 만든다는 것을


난 그때 처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도 난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정희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아니 그녀와 같은 공간안에서 숨쉬고 있다는 것만


해도 이렇게 좋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더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고백하기로 결심한 나는 내 앞에 놓여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고개를


들어 정희의 맑고 깊은 눈을 쳐다보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늘 원하지 않는 순간에 불현듯 찾아오던 나의 예지능력이 한순간에


내 눈앞을 스쳐지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눈앞에 천정이 보였다. 아마 내 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고있는 정희의 얼굴이 들어왔다. 난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울고있는 정희의 뒤쪽 벽에 걸려있는


달력의 오늘 날짜가 커다랗게 내 눈에 비쳐졌다. 그 날짜는....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내 몸이 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상복을 입고 울고 있었다. 난 놀라 무어라 소리치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미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 같았다.













"현준씨, 왜 그래요?"




문득 정희의 물음에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정희는 날 보며 궁금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난 잠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정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내 방의 침대위에 누워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달력속의


오늘 날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본 미래....


그 환상 속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내 눈에 어렴풋이 들어온 달력의 날짜는


바로 2003년 12월 20일...


오늘이 11월 30일이니 정확히 20일 남은 셈이었다.






난 이제 20일밖에 살지 못한다...



      - 하편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나는 고개를 돌려


책상에 있는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2003년 12월 1일.


내가 어제 본 환상이 다시금 생각났다. 혹시 그건 꿈이 아니었을까?


난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말도 안된다. 내 목숨이 20일밖에.. 아니, 이제 하루 지났으니


19일 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마 꿈이었을거야...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망하게 전화기를 든 나의 귓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준씨, 저 정희에요."


"아... 정희씨..."


"괜찮아요? 어제 무슨 일로 중간에 가버리신 거에요?"


"아..."




난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제의 일들은 꿈이 아녔구나...


전화기 저쪽에서 계속 들려오는 정희의 목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지며


핸드폰은 힘없이 내 손에서 침대위로 미끄러졌다.






며칠동안 난 정희와의 연락을 끊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희에게서


두세번 정도 연락이 왔었지만 난 일부러 받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에 와서 정희에게 이런이런 사연이 있어서 널 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또한 나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다른 핑계를 대고 정희를 피하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정희와 계속 만날 것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선택이었다. 나의 이성은 정희를 놓아주라고 하지만, 반대로


나의 감성은 계속 정희를 옆에 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나는 핸드폰을 들고 정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금부터 정희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에게 앞으로 그만 보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정희를


위한 길이었으니까...




"여보세요?"


"정희씨? 나 현준이에요. 미안해요..."


"그동안 뭐하느라 전화도 안받았어요? 나 현준씨 많이 보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나 별루 안보고 싶었나보죠? 그런 건가요..."




정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의 눈이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요..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너무나 보고 싶었고,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어요... 영원히..


이런 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정희의 목소리가 계속 전화기 저편에서 울렸다.




"근데 왜 전화 안받았어요... 그동안..."


"정희씨."


"네?"


"내일 만나요, 우리. 그동안 연락못한 데 대한 사과로 제가 저녁 살께요."


"하핫... 정말요?"


"예, 우리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곳 구경도 가요."




내 의지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지만, 난 정희에게


하고 있는 말들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방금 내린 선택이 정희에게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지, 얼마나 더 큰 슬픔을 가져다 줄지는 내 머리로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만큼 난...


이미 정희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다.


내게는 앞으로 닥쳐올 정희의 슬픔과 괴로움을 헤아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정희를 보고싶은 바램이 더 컸다. 생각해보면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대해


치를 떨 정도의 죄책감이 내 마음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만...


난 그렇게 해서라도....


내 남은 생애동안 조금이라도 더


정희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 뒤로 난 거의 매일을 정희와 함께 지냈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남아있는 기간동안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그녀에게 해주고, 내가 가진 모든 마음을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채웠다.


아직 본격적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관심의 표현과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점점 날 그녀의 마음 속으로 잡아 끄는 것 같았다.


정희에겐 내가 아무리 잘해 주어도 모자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너무도 적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15년이 넘게 줄 수 있는 사랑을 난 15일동안 주어야 했으니까...


내가 정희에게 정성을 다하면서 정희도 점점 내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난 그런 정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내게 웃는 웃음은 내 인생에 있어


생명수와도 같았고, 그녀만 옆에 있으면 세상에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희가 내게 기대면 기댈수록 나의 죄책감 또한 커져만 갔다.


그녀에게 사실을 숨긴 채로 지내는 이런 상황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무리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라지만 나의 소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지금의 날들이 정말


바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알 수 없었다.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이 아닌만큼 그 오판들이


그만큼 정희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난 행복했지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철저하게 따라왔던 나의 신비한 능력조차 이제 더이상 발현되지


않았다. 세상을 등지는 그 기억 이후로 그 능력들은 조금도 날 찾지 않았다.


난 알게모르게 조금씩 주위 사람들과 나 사이에 쌓여있던 관계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생각들까지도 같이 정리했지만....


정희에게만은 표를 내지 않았다. 아니... 표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행복과 죄책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하고 있을 동안, 시간 역시


빠르게 흘러 어느덧 19일이란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현준씨."




정희가 약간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을 꺼낸 것은 내 목숨이 하루밖에 남지않은


12월 19일의 쌀쌀한 밤, 그녀의 집 근처였다.




"예, 정희씨."


"저, 현준씨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저한테 이렇게 잘 해주셔서..."


"후훗.. 고맙긴요."


"저기... 저 있잖아요. 내일은 현준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네? 무슨 말을요?"


"그냥... 음... 중요한 말요. 뭔지는 비밀이지만요."




거기까지 말하던 정희는 약간 상기된 듯한 얼굴을 하고는 집을 향해 뛰어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잠시동안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내일 말한다는 게 무엇일까? 설마 나와 사귀고 싶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닐거라 고개를 저으면서도 난 갑자기 그동안 정희에게 잘 해준 것이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냥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어서 잘 한다고 한 것이 설마


그녀가 날 정말 사랑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난 근처의 공터 벤치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감싸쥐었다.


난 정말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내가 원하는 아주 잠시동안의 행복을 위해, 그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그녀를


힘들게 한 게 아닐까. 이런 고민에 빠질 거란 것을 진작부터 알면서도 막상 상황이


닥쳐와서 일말의 후회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저주스러웠다.


일어서서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내 눈에 문득 약국이 하나 보였다. 약국을


지나치려던 나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환하게


불이 켜져있는 약국 문을 바라보았다.




자살을 할까...




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바보같이 무슨 소릴 하냐고


나 자신을 책망하면서 어두운 밤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던 나는 숨을


헉헉하고 몰아쉬면서 멈추었다.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면서 다시 마음속으로 조용히


울려퍼지는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적어도 정희가 보는 앞에서는 싫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정희의 아픔따위... 나 자신의 짧은


행복을 위해 잊어버린 주제에... 그런 주제에 이렇게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바보같은 놈.. 배가 불러 터지겠구나.... 아하하...


속으로 웃고있는 내 눈에서 굵직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게 왜 이런


불행이 찾아왔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다시 서글퍼져 오는


느낌은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내게 죽음보다 더 참기 힘든 건... 왜 이제서야


정희가 내 앞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자살충동과 현실 앞에서 왔다갔다 하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약간은 밝아진 머릿속의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난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 운명따윈 상관없었다. 나의 저주받은 운명은.. 그동안


정해진 미래에 너무 기대며 살아온 데 대한 배상 쯤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난 이제 내 생애 처음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 내 미래를 피하지 않고 맞설 것이다.


내일 이 시간에 오늘처럼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래를 몰랐다면 오늘같은 고민은 할 필요도


없었고, 내일도 별다른 갈등없이 정희를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 아무 일 없이


잠자리에 들 것이고, 내일 아무런 일 없듯 일어나서 정희를 만날 것이다.


만나서 그녀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내 귀로 똑똑히 들을 것이다. 물론


내가 살아서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정희에게 내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도, 나의 죽음 이후 한동안 괴로워할 그녀의 모습도 아니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남은 인생에 있어 하루라도....


하루라도 더 정희를 보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내 인생에 있어


그만큼의 커다란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 생각말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몇 번이나 찾아 이제는 얼굴을 잘 알고있는 단골 골동품 가게 주인이 친절한 웃음을


띠며 날 맞이하였다. 나도 답례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하였다.




"와~~ 여긴 못보던 물건이 되게 많아요!"




날 앞질러 가게 안으로 들어온 여자 아이는 약간 먼지가 쌓여 낡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비치되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이것저것 만져보기 시작했다.




"하하... 손녀분이신가 보죠? 참 이쁘네요."


"예.. 저한테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석이죠."




나는 웃음을 띠며 주인이 서있는 카운터에 기대어 여자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이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축하선물을 사준다고 단골 골동품 가게로 데려온


나의 사랑스러운 손녀딸 윤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던 윤지를 바라보며 난 잠시 옛날의


추억에 빠졌다. 어쩌면 이 자리에 서 있을수도 없었던 내 손녀딸. 그래서 오늘따라


더욱 나의 손녀 윤지가 더 이쁘게 보이는 것일까.






하루밖에 남지 않았던 내 인생을 놓고 길었던 고민에 빠져있던 그날 밤...


그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나고 그 다음날, 나와 만난 정희는 나에게 부끄러운 얼굴로


나랑 사귀고 싶다는 고백을 했었고, 난 하루라도 그녀와 연인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의 바램을 못이겨 그녀에게 좋다는 승낙을 했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난 내가 죽기로 되어있었던 그날 하루 하고도 60년을 더 살았다..


아무런 일 없이 건강한 몸으로 80세가 될때까지 살 동안, 내가 계속 얽매여왔고


기대왔던 나의 신비한 예지능력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정희와


함께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가끔은 60년전 12월 19일 밤에 했었던 고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었다. 그때


내가 자살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내 소중한 자식들과 손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정희의 사랑을 받으며 이렇게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정희에게 내 신상에 앞으로 닥칠 일들을 숨긴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1초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잘했든, 잘못했든 그날 밤의 선택은 분명히


나의 의지가 행한 것이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의지, 그리고 정희와의 사랑이었다.


가끔씩 그 미래가 왜 그대로 실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것은 지금의 나의 행복 앞에선 지극히 부수적인 의문일 뿐이었던 것이다.


지금 저렇게 즐겁게 웃고있는 손녀 윤지같은 나의 행복 앞에서는 그건 결코 중요하지


않은 의문이다. 난 지금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 날 둘러싸고 있는 행복에


너무도 기분이 좋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힐 것만....






"할아버지!"




멀리서 날 보며 놀라 달려오고 있는 윤지를 보며 그제서야 난 가게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깨달았다. 가게 공기가 좀 나쁜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얼마전 의사에게서 심장이 안좋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긴


했었지만... 그 생각이 들면서 점점 더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누워있는 내 눈에 가게 천정이 떠올랐다. 천정의 문양이 이상하리만치


내겐 익숙했다. 그리고 곧 사랑스러운 손녀 윤지의 얼굴이 내 눈속에 들어왔다.


윤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난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나의 눈에는


울고있는 윤지가.... 그리고 윤지의 약간 뒷쪽벽에 걸려있는...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낡고 낡은 몇 십년전의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2003년 12월 20일.




아아... 그 달력의 지난 날짜를 보는 순간 내 눈에는 60년전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석달 전에 하늘나라로 간 정희를 쏙 빼닮은 손녀 윤지를 보면서,


벽에 걸린 60년전의 달력과 날 붙잡고 울고 있는 윤지를 쳐다보면서 그제서야


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본 미래가 지금에 와서 실현되고 있었음을.....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할머니를 닮은 손녀를 보았었음을.......


난 너무나 편한 기분으로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아주 오래전에 불렀던 그 호칭으로 가만히 나의 사랑을


불러보았다...






정희씨.. 곧 다시 만날 수 있겠군요...


단 하루를 봐도 그토록 행복했던 당신을


60년이나 볼 수 있어서 난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곧 또다시 만날 수 있겠군요.


그래서 전 아직도 행복합니다....


웃대 펌

P.s : 너무 좋은 글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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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군★
04/01/16 09:15
수정 아이콘
감동적..ㅜ_ㅜ
저도.. 사랑하면 죽을것이라는 현실을 보고도 사랑할수 있었을까요..?
그나저나 웃대는 때로 너무 진지해지는군요 -_-
[NC]..SlayerS_NaL-Da
04/01/16 10:07
수정 아이콘
웃긴대학을 알게된 동기가
Pgr이였습니다. Pgr 유머게시판을
오다보니 웃대 펌글을 자주 읽게 되었는데요.
약간 눈쌀 찌푸리게 만드는 글들도 있지만
대부분 유쾌하고, 가끔은 감동적인 글도 볼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물빛노을
04/01/16 12:35
수정 아이콘
이우혁님의 단편 '시계소리'를 연상시키는 글이로군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아르푸
04/01/16 14:52
수정 아이콘
댓글에 감동적이라고 하니 한번 읽어보고 싶지만 스크롤의 압박이.......ㅡㅡ;
04/01/16 15:39
수정 아이콘
물빛노을//저도 읽으면서 그 생각이..^^;;
雜龍登天
04/01/16 18:28
수정 아이콘
아르푸님. 한번 읽어 보셔요.
띄어쓰기가 잘 되어 있어서 그다지 길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네요.^^
04/01/17 00:32
수정 아이콘
저도 우혁님의 '시계소리'를 연상했습니다. 그래도 결말은 딴 판이군요.. ^_^;;
비쥬얼
04/01/17 01:16
수정 아이콘
MBC 서프라이즈에 추천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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