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치 감독은 너무 너그로워서, 주장이자 독보적인 존재였던 크루이프를 진정시키는 데에 어려움이 따랐다. 미드필더였던 렙은 코바치가 크라위프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는 자신의 포지션을 변경할 배짱도 없었다며 비난했다. 시간이 흐르자 다른 선수들도 크라위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급장이면 다야? 급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구?"
코바치는 두 번째 유로피언 컵 우승을 이끌고 나서 아약스를 떠났다. 그의 후임인 게오르게 크노벨 감독은 1973-74 시즌에 누구를 주장으로 할 지
투표를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희들끼리 의논해서 다른 그 어떤 반(班)보다 훌륭한 반을 만들어 봐라. 너희들은 이미 회의 진행 방법도 배웠고, 의사를 결정짓는 과정과
투표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그냥 곁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겠다."
크라위프는 카이저에 13 대 3으로 밀려 주장직을 빼앗겼다. 그 후 크라위프는 단 두 경기를 뛰고 나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잘해봐, 이 개새X들아!"
아약스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크노벨은 언론 인터뷰에서 코바치 감독 시절의 지나친 자율로 인해 발생한 선수들의 음주와 문란한 오입질을 꼬집은 직후 해임당했다.
그리하여 토탈풋볼의 원형은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의 미헬스- 크라위프 아래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뒤 크라위프는 두 번 다시 아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94년, 끝내는 나도 그를 만나고 말았다. 바로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입시반(入試班) 때문에 겨우 사흘 얻은 휴가로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테네로 갔다. 딴에는 마음 먹고 나선 피서길이라 굳이 돈을 아끼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침 새마을 표가 매진돼 어쩔 수 없이 타게 된 우등 칸은 고생스럽기 그지 없었다. 따로 좌석을 사기에는 아직 어려서 하나씩 데리고 앉은 아이들이 칭얼대는 데다 통로는 입석객(立席客)이 들어차 에이컨도 제 구실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테네에 도착하기 바쁘게 기차를 빠져나와 경기장 쪽으로 가는데, 문득 등뒤에서 귀에 익은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놔, 이거 못 놔?"
무심코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니 대여섯 발자국 뒤에 밀라니스타인 듯싶은 두 사람에게 양팔을 잡힌 어떤 건장한 남자가 그들을 뿌리치려고 애쓰려 지르는 고함이었다. 미색 정장에 엷은 갈색 넥타이를 점잖게 맸으나 왼쪽 소매는 그 실랑이로 벌써 뜯겨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선글라스 낀 얼굴이 이상하게 눈에 익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튀어 봤자 벼룩이야. 역 구내에 쫙 깔렸어."
밀라니스타 한 사람이 차갑게 내뱉으며 허리춤에서 반짝반짝하는 수갑을 꺼냈다. 그걸 보자 붙잡힌 남자는 더욱 거세게 몸부림쳤다.
"내일은 내가 축구 레슨을 시켜줄 테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려?"
보다 못한 다른 선수가 그렇게 쏘아붙이며 한 손을 빼 남자의 입가를 쳤다. 그 충격에 선글라스가 벗겨져 날아갔다.
그러자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 그 남자의 얼굴, 아 그것은 놀랍게도 크라위프였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건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우뚝한 콧날, 억세 뵈는 턱, 그리고 번쩍이는 눈길......
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런 내 눈앞에 이십 년 전 그날의 크라위프가 떠올랐다. 몰락한 영웅의 비장미(悲壮美)도 뭐도 없는 초라하고 무력한 우리들 중의 하나가.
"여보, 당신 왜 그러세요?"
영문도 모르고 내 곁에 붙어 섰던 아내가 가만히 옷깃을 당기며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다시 크루이프 쪽을 보았다. 그사이 밀라니스타들의 수갑을 받은 크라위프는 두 손으로 피묻은 입가를 씻으며 비척비척 끌려가고 있었다. 내 곁을 지날 때 힐끗 나를 곁눈질했지만 조금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날 밤 나는 잠든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늦도록 술잔을 비웠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두어 방울 떨군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悲観)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