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 전이다. 내가 갓 게이머가 된지 얼마 안 돼서 용산구에 올라가 살 때다. 용산역에 왔다가는 길에, 마우스를 하나 사기 위해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용산역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마우스를 깎아서 파는 놈이 있었다.
마우스를 한 개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를 것 같았다.
"얼마 알아보고 왔소?"
"한 개에 만5천원 아닙니까?"
"한 개에 3만2천원이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다른 곳은 만5천원이던데..." 했더니,
"마우스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싸** 없는 넘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볼을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세팅을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대충 마신 껍데기에 볼만 넣어주면 다 될 건데, 자꾸만 휠만 돌려보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TV에서 "시사매거진 2580 프로게임팀 소울편" 을 방영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휠 박지 마시고 마우스웨어는 필요도 없으니 그만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셋팅을 할 만큼 해야 마우스지, 패드에 볼만 굴린다고 마우스인가"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세팅한다는 말이오? 노인장, 셋팅매니아시구먼, 한승엽 인터뷰 한다니까요"
그넘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방영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세팅을 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감이 잡히질 않고 컨트롤 미스가 난다니까. 마우스란 제대로 세팅해야지, 컨트롤 미스가 나면 그건 누구의 책임인가"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마우스 세팅한 것을 오토스크롤로 돌려 놓고 태연스럽게 옆 컴퓨터를 켜고 저글링블러드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흥분해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마우스를 들고 이리저리 줄을 확인하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마우스다.
방영 시간을 놓치고 녹화본을 봐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세팅을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세팅 매니아 같으니"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놈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용산역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프로게이다워 보이고, 싸나운 눈매와 이스라엘 양놈을 연상시키는 코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세팅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숙소에 와서 마우스를 내놨더니, 주훈이는 이쁘게 세팅했다고 야단이다. 메가웹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임요환의 설명을 들어 보니, 싸구려 벌크 마우스로 세팅을 하면 얼마 못 가서 볼마우스에서 스킵현상이 나다가 컨트롤에 존나게 미스가 나며, 무리하게 가속도 설정을 하면 포인터가 튀어오르고 스톰을 뿌리기가 여간 어렵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녀석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우스는 고급 마구 베이직의 바디에 정식 마우스 웨어를 사용해 좀처럼 컨트롤 미스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의 싸구려 광마우스는 한번 스킵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마우스 세팅을 할 때 우선 마우스 선을 정성스레 늘인 다음에 패드의 요철을 확인하고, 볼을 빼 소중하게 닦은 다음 마우스 웨어를 켜 세팅과 싱글 플레이를 통한 감도 확인, 재부팅을 반복적으로 한 뒤에 비로소 완료한다. 물론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7분이라는 제한시간 내에 그까이꺼 대충 가속도 체크나 하고 만다. 그러나 편안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몇 시간씩 걸려 가며 세팅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옛날에 박신영이라는 장인이(현재는 은퇴후 도자기 단지에서 새로운 장르에의 도전을 하고 있는) 50분동안 마우스를 깎아 장인들의 사이에서 '진정한 장인'이라며 화제가 된 적이 있고, 윤정민이라는 작자는 게이머의 생명인 마우스를 투척하여 세간의 비난을 산 적이 있다.)
중고 마우스만 봐도 그렇다. 옛날에는 중고 마구를 사면 보통 것은 얼마, 박스까지 있는 완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개봉하지 않은 완제품은 세 배 이상 비싸다. 미개봉 완품이란 그 누군가가 꼬진 패드 위에서 굴리다 수명이 다 된 마우스가 아닌 새 마우스인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그것이 개봉한 제품인지, 개봉을 하지 않은 제품인지, 진탱 마구인지, 껍데기만 마구를 쓰고 호환이 맞지 않는 부품을 끼워놓은 것인지 PS/2 포트 부분의 구별 없이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장인이 남이 보지도 않는데 완벽한 세팅을 마친 마우스를 준비할리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게이머와 스텝, 장인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마우스 세팅을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잘 굴러가는 마우스 세팅을 한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감도의 마우스를 만들어 냈다.
이 마구 마우스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녀석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게이머에게 세팅매니아 소리를 듣는 세상에서, 어떻게 잘 굴러가는 마우스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녀석을 찾아가서 오이 3개에 녹차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녀석을 찾았다. 그러나 단속이 떠서 그 녀석이 앉았던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녀석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용산역을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공에 무너질 듯한 용산역 밑으로 용산견이 잠을 자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넘이 저 용산견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시디를 굽다가 우연히 용산역의 마스코트인 용산견을 바라보던 녀석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그랫쿠나 무서운 쿠믈 쿠엇쿠나!" 초난강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숙소에 들어갔더니 최연성이가 MX300에 무게추를 빼는 풀세팅을 하고 있었다. 전에 트레커베이직 마우스에 옥도리표 스티커를 붙이던 생각이 난다.
트레커 베이직 구경한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어둠의 경로로 마구를 입수했다는 스팸 메일도 날라 오지 않는다. "400개 한정 판매"이니, "MS사에 직접 요청하여 거래!!" 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년 전 코카콜라배 스타리그에서 마우스를 세팅하던 놈, 박태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p.s dc펌입니다. 방망이 깍는 노인이던가... 절묘하게 매치해서 글 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