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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5/26 21:21:02
Name SEIJI
Subject [유머] [펌] 한산도해전
한산도 해전  


한산도 해전은 한산대첩(閑山大捷)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조·일 7년전쟁중 권율의 행주대첩 및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더불어 흔히 3대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순신은 옥포해전과 당항포 해전에서 압도적인 해상세력 우위를 입증함으로써 일단 상실한 영남해안의 대부분 해역에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지상전투는 패전의 연속으로서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승승장구의 일본군은 5월 3일 서울점령, 5월 27일 개성점령, 6월 15일 평양점령에 이어 일단 추월 공격하느라 남겨둔 지역인 전라도는 수륙병진 공격으로 점령하여 서울에서 합류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0여 척의 일본수군은 가덕도와 거제부근에 전진배치 되면서 통영 쪽으로 점차 접근해오고 있음이 1592년 6월말 경 확인되었다. 물론 원균의 관할해역이지만 원균은 경상우수사로서 경상도 바다를 지킬 배가 없으니  결국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힘을 합쳐 경상도 해역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7월 6일을 제3차 출동일로 잡았다. 이순신은 이보다 2일 앞서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와 7월 4일 여수 앞 바다에서 합류하여 그 다음날 하루종일 기동함대 편성과 작전 예행연습을 실시한 다음, 7월 6일 남해도의 노량으로 향해 출항하였다. 이때 통합함대 세력을 보면 이순신 함대가 전선 24척, 이억기 함대가 25척 그리고 원균 함대가 7척이었다. 물론 이때도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 2척과 이순신과 이억기 함대의 협선·포작선 56척도 참가하였다. 원균은 노량에서 출항한 때문에 하루 늦게 합류했다.


이때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3개 함대를 통할 지휘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도 없고, 3도 수군통제사 제도도 생기기 전이었지만, 이순신은 관례에 따라 선임 지휘관으로서 함대를 통합 편성·지휘했던 것이다.


통합함대는 7월 6일 여수를 떠나 노량경유 창신도에서 경야후, 7월 7일 당포에서 결진전한 다음 경야중 척후선으로 정탐한 바에 의하면 적은 이미 견내량(거제도와 통영반도 사이의 협수로) 남단에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집단 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1) 한산도 해전(7월 8일)


  견내량은 통영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약 3KM에 이르는 폭 500M 정도의 협수로로서 여러 개의 섬이 중간에 가로 놓여 있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 다수가 기동하기에는 제한이 많은 곳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견내량 북쪽에 결진하고 있는 적선단 73척을 넓은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포위 격멸할 전법을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인출섬포지계(引出殲捕之計)란 유인섬멸 및 포획전법인 것이다.(박선식, 「조선대장부 이순신」, 규장각 1998, p.193∼221 참조)


감시선을 견내량 남쪽으로 내려보냈는데, 적선은 아군 판옥선을 발견하고는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는지라 이들을 추격해 들어가니, 적 주력은 대거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적은 의기양양하여 아군의 선견함대를 포획하려고 일제히 덤벼들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3Km이상 끌어내어 우리 주력선단이 위치한 한산도 북방 넓은 바다로 접근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주력함대와 합류한 다음 종대대형으로 이동하면서 쫓겨가는 척하다, 한산도와 미륵도 중간쯤에서 갑자기 지정된 신호에 따라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의 대형을 취하면서 방향을 180도 전환하면서 적을 V자로 양익 포위한 다음, 전광석화처럼 적선을 당파했다.


이순신 함대는 주로 화력과 충격행동으로 하루종일 접전하여 일본수군을 대파했다.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은 일본수군에 대한 조선수군의 승리만이 아니라, 조·일 7년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평양탈환을 주도한 명나라 원군의 파송은 물론, 일본군의 서울후퇴와 남쪽으로의 유턴 그리고 패배의식에 좌절하고 있던 민중의 의병조직 및 게릴라전 전개 그리고 관군의 재편성도 모두 이순신 함대의 한산도대첩 때문에 동기가 부여된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이는 한국전쟁시의 인천상륙작전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획기적인 대역사(大役事)였던 것이다.


적선 73척중 정확하게 59척을 수장시켰다. 이때 나머지 14척은 뒤로 쳐져 있다가 견내량으로 도망쳤다. 적에게 포로되어 6개월간 혹사당했던 경상우수군의 군관이었던 제만춘이 탈출해 나와서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일본의 사료(兵糧調發件記)에는 한산도에서 일본군 9천명이 사망한 기록이 있다고 했다.


패주하는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 섬멸치 못함이 아쉬웠다. 이 해전은 대단히 치열한 해상결전이었던 바 우리는 함선을 잃지 않았지만, 19명의 전사자와 115명의 전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숫자 속에는 다음날의 당골포해전 사상자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구분이 불명확하다. 7월 8일 저녁, 날도 어두워지고 견내량의 물길도 험할 뿐만 아니라, 노 젓는 격군들의 연일 누적된 피로를 고려하여 일단 추격전을 유보했던 것이다.


원균은 이때 자기가 이순신 보다 계급은 낮지만 선배란 자부심을 갖고 이순신의 적 유인작전 계획을 반대하면서 협수로 상에서 정면공격으로 승부를 걸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유인작전의 당위성을 다음 4가지로 제시하면서 원균의 주장을 일축했다.
  ①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험하다.
  ② 적 함선이 매복 가능한 섬이 많다.
  ③ 우리 판옥선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기동간 상호충돌이나 좌초할 우려가 있다.
  ④ 적이 불리해지면 해안이나 섬에 접근하여 배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다.


(2) 안골포해전(7월 10일)


한산도의 결전에서 대승을 거둔 통합함대는 승조원들이 몹시 피로해졌기 때문에 7월 8일 밤을 가까운 견내량에서 결진 유박하였다. 그 다음날 오후에 적을 찾아 가덕도를 향해 항진 출발직전에 척후선이 일본함선 40여 척이 앙골포(진해시 웅천)에 정박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서 외줄포(온천도)에 도착 작전준비를 갖춘 후 경야했다. 약 21KM의 거리인 앙골포 외항에 7월 10일 오전 7시경 도착한 통합함대는 앞 바다의 가덕도옆 송도에 이억기 함대를 은폐 대기시켜 유사시 신호에 따라 지원하도록 해놓은 다음 원균 함대와 함께 적을 덮쳤다. 이때 앙골포에는 적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을 합해 모두 42척이 정박해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중에서 2층 누각배 한 척과 1층 누각배 두 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수군 사령관이 탄 기함임에 틀림없었다. 이들 적선은 한산도 해전에서 혼비백산 겨우 도망하여 앙골포에 숨어있는 배와 이들을 구출하고자 부산에서 급히 달려온 대선이 대부분 이었다.


그런데 앙골포만의 썰물시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에 판옥선이 연안에서 싸우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 해전시와 같은 요령으로 이들을 넓은 앞 바다로 끌어내려고 계속적으로 시도했으나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왜의 제1제대 59척을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고 적을 쳐죽였으므로, 적은 형세가 불리하면 상륙하여 도주할 계획으로 험한 선창에 배를 매어 두고 겁이 나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임진장초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부득이 이순신은 이억기 함대를 불러 들여 교대로 들락날락 하면서 부두에 정박한 적선에 접근하여 각종 화포를 비오듯 퍼부어 적을 국부우세에 의한 소모전으로 각개격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13시간(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만에 적선을 거의모두 괴멸시킨 것이다. 앙골포 앞 바다는 적의 시체로 가득찼다.



아울러, 충무공전서 제2권의 임진장초에 보면, 「경상도 수군으로 공을 세웠다는 제장들은 작은 배에 타고 뒤에서 싸우는 것을 관망만 했으니, 그 수가 무려 30여 척에 이르렀다. 적선이 당파되면 이 작은 배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어 왜의 머리를 베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바,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흡사히 지난날 한국군이 월남에 참전했을 때, 일부 비전투부대 요원들은 미군 PX를 돌아다니면서 물품을 구입해서 암시장에 팔아 돈벌이나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자가 없지 않았으니,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7월 10일 하루종일 안골포의 적 수군을 공격한 이순신 함대와 이억기 함대는 날이 어두워지자 일단 안골포 외항에서 결진하여 경야한 다음, 새벽에 잔적을 소탕할 계획을 했다. 7월 11일 새벽에 통합함대가 안골포를 포위했으나, 일부 잔적은 부서진 배를 타고 도망쳤고 죽은 시체를 산더미 같이 모아놓고 불태운 흔적을 발견하였다. 일본군의 손실은 당시 부대이동 병력과 승조원을 포함하여 약 6천명으로 계산되지만, 일부는 육로로 도망치고, 일부는 배타고 도망한 것을 전제로 그 2/3인 4,000명은 되지 않을까 판단한다.


한 일본의 사료(續群書類從 第593卷上 月品坂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대패를 그대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 조선 배가 뒤를 쫓아와서 해가 질때까지 안골포 항구에서 싸움을 했다. 여기서도 우군은 전패했으며, 구귀(九鬼 : 일본수군 제2전투제대장)의 배도 범주(帆柱)가 적탄에 맞아 부러졌다. 밤이 되자 조선 배는 거제도로 물러갔다.」


7월 11일 아침에 이순신은 안골포의 격전지를 돌아본 다음에 통합함대를 이끌고 가덕도 북쪽에 전선을 결진 대기시켜 놓은 다음, 협선으로 낙동강 하구까지 해상수색을 실시한 후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알고, 전함대가 전투대형을 취하고서 부산영도 앞 바다까지 10여시간 동안 해상시위를 하였다.


불과 부산의 일본군 기지까지 14KM 거리를 두고 행한 세력시위는 일본수군의 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수군의 위용을 보고 위축된 적 수군은 무반응이었다. 완전히 위압당한 것이었다. 이날 자정쯤 한산도로 돌아와 밤을 세우고, 그 다음날 7월 13일 여수로 귀영했다.


(3) 한산도해전 종합


조·일 7년전쟁의 전환기를 마련한 이순신의 한산대첩 장계는 서울로 7월 15일 발송되었다. 며칠후 의주에서 이를 받아본 선조는 너무도 기뻐 이순신에게 지금의 장관격인 정2품(상)의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시키고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함을 불꽃 속에 던져 넣음이여 당항포에 쌓인 송장 강물 흐리고, 악독한 적을 파도 위에서 무찌름이여 한산섬 비린내 풍기는 피가 바닷물을 불렸도다.」


선조도 평양에서 일본군 장수 고니시(小西行長)로부터 일본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를 통해 서울로 올라오는데 그때는 어디로 도망할 것인가라고 조롱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작전계획이었는데, 이순신이 바로 이 계획을 실행 못하도록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막아낸 것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1592년 6월 어느날 의주에서 고민 끝에 「일이 급한지라 마땅히 내부(內附)할 터이라」라고 명나라로 망명함이 당연하다고까지 말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그때 임금의 나이가 겨우 48세였다. 그래도 역대 이조의 평균수명 보다는 오래 살았던 것이다.


당시의 국무총리격인 영의정 유성룡은 한산대첩의 전략적 의의를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는데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 싸움에 의해서 적의 한 팔이 잘렸다. 고니시가 평양을 얻기는 했으나 군세가 고립되어 감히 더는 북침하지 못했다.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의 연해안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이 일대에서 군량을 조달할 수 있었고, 호령을 전하여 통할 수 있음으로써 국가를 중흥시켰을 뿐 아니라, 요동의 금주, 복주, 해주, 재주와 더불어 천진 등지가 무서워 떨지 않게 되어 명군으로 하여금 육로를 따라 원군차 오게 함으로써 적을 물리칠 수 있게 한 것은 모두 이 싸움의 압승 때문이다. 순신은 3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주박함으로써 적의 서침의 길을 차단했다.」


예기치 않은 조선수군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도요도미는 해양전략의 변경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한산해전의 중요성을 알만하다. 1592년 7월 14일, 도요도미는 와기사까(脇坂安治) 등 장수들에게 해전을 중지하고 거제도 및 그 주변에 성을 쌓아서 주둔하고 육지로부터 조선수군을 포격하도록 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또한 도오도오(藤 高處)에게는 조선수군의 화공작전에 말려들지 않도록 큰 배를 건조하고, 그 배의 주위를 튼튼히 만들 것, 거제도 주변에는 성이나 초소를 구축하는 경우, 입지조건이 좋은 곳을 선택하고, 병력을 집결해 조선수군을 공격할 경우에는 그 지역의 상황을 잘 검토하여 신중히 대처할 것 등도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도요도미는 자신이 조선에 가서 직접 격파할 것이니, 그때까지는 명군과 조선군이 공격해와도 지나치게 추격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지키면서 군량미를 비축해둘 것이며, 부산포에서 각자가 있는 곳까지 보급로를 확보하고 선원을 휴식시킬 것을 아울러 지시하였다. 한산대첩이 일본에게 얼마나 큰 전술적·전략적인 타격을 주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순신의 승전보고에는 한산도 해전을 다음과 같이 박진감있게 적고 있다. 「.......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은 배끼리 부닥치게 될 것이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이 만일 전세가 궁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다........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서 습격할 기세를 보인즉,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옴으로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거나 돌아오매(佯退而還) 적선들도 줄곧 쫓아오는데,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와 같이 각종 총통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린즉....... 한편 왜적의 큰배 20척, 중간배 17척과 작은배 5척 등을 좌우도의 여러 장수가 힘을 합하여 불태워 깨뜨렸으며.......」


이와 관련하여 일본측의 기록(脇坂記)에 의하면, 한산도 해전에서 왜장 아키자카(脇坂安治)는 갑옷에 화살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김해로 도망쳤고, 막하 선장 마나베(眞鍋左馬允)는 자결하였다고 한다.


또한 H. B. Hulbert(Hulbert's History of Korea, Vol. Ⅱ, 1962)는 한산대첩의 의의를 평가하여 「이 해전은 실로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도미(豊臣秀吉)의 조선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며, 중국정벌의 야욕을 분해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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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렛
05/05/26 21:22
수정 아이콘
원했던건 그림이었는데..
박서[CtrL]
05/05/26 21:25
수정 아이콘
당황
오케이컴퓨터
05/05/26 23:17
수정 아이콘
조일전쟁이란 표현 마음에 안듭니다. 그냥 임진왜란으로 하죠. 개인적으로 倭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힘만 쎈 깡패들의 난이라고 생각하네요.
오케이컴퓨터
05/05/26 23:19
수정 아이콘
倭가 우리나라 국사책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표현대신 제1차 일본군의침략 제2차 일본군의 침략으로 바꿔달라고 계속해서 시정요구하는것을 보면 울화통이 터집니다. 자신들의 역사왜곡은 고칠생각도 안하고 우리나라 역사책의 자신들을 낮추는거에대해선 민감하죠.
오케이컴퓨터
05/05/26 23:20
수정 아이콘
앞으로도 전 평생동안 그들의 국호를 왜, 그들의 왕을 왜군(倭君)으로 부를 예정입니다.
deathknt
05/05/26 23:27
수정 아이콘
예전에 여기서 한산대첩을 그림으로 그린것을 봤었는데 그것도 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혹시 그 그림 아시는 분 계시는 가요?
대막리지2002
05/05/27 03:29
수정 아이콘
임진왜란 이라고하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느낌이 강해...
임진왜란이라 안하고 조일전쟁으로 바꿨다는군요
미네랄은행
05/05/27 03:57
수정 아이콘
조·왜전쟁도 아니고 왜 조일전쟁인가요...국호가 일본이었던 것도 아니고...침략의 주체가 국가도 아닌데....실질적으로야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라고는 해도....그냥 바닷가 왜적놈들의 난인거죠. 그럼에도 너무 어처구니 없이 무너지 조선 조정이 너무 무능했던거고, 치욕입니다만..
어느날부터인가 조일전쟁이라고 하는거...참 근거가 궁금합니다.
기억상실
05/05/27 08:45
수정 아이콘
윗분들 좀 과민반응이신데 .. 무조건 깍아내린다고 좋은게아니죠
그렇다면 고작 왜라는 나라의 바닷가 해적정도 되는놈들정도를 못막아서 7년동안이나 전국토가 유린당했다고 하면 더 웃긴거아닐지요?
기억상실
05/05/27 08:50
수정 아이콘
아시다시피 당시 일본군이 우리보다 훨씬 강했고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하지않은건 사실이고 당시 국호도 일본이 아니라니요... -_-; 일본맞습니다. 그리고 침략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란건 더더욱 이해가 안가네요.. -_-; 그냥 바닷가 해적정도가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노략질 한정도가 아니란말입니다. 엄연히 전쟁입니다 전쟁 .. 명이라는 동맹국이 원병을 올 정도로 큰전쟁이란말입니다. 한쪽에서 일방적인 침략을했다고 전쟁이 아니란논리는 참 어이가없네요. 그렇다면 세계 제 2차대전도 어떻게보면 독일의 일방적인 유럽국가들 침공으로 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도 2차대전이 아니라 2차독란 이라고 해야하는건지 -_-;;
하늘 한번 보기
05/05/27 09:07
수정 아이콘
리고렛 님//
예전에 유게에
단테VS베아트리체 님께서 올려주신
한산도 대첩 학익진 사진입니다^^
https://pgr21.com/zboard4/zboard.php?id=humor&page=52&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672
눈시울
05/05/27 10:55
수정 아이콘
삼국시대 이후 천년만에 벌어진 동아시아의 대전이었는데 이게 '전쟁'이 아니면 대체 뭐가 전쟁에 속합니까. -_-;;
05/05/27 10:59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는 비록 전쟁을 통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의 승리자입니다.
단지 난하나 진압한게 아니라 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겁니다.
그런의미에서 임진왜란보다는 조일전쟁이 더 나은 표현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이순신장군이 고작 왜적의 난하나 진압한 정도였던가요? 아니요.
이순신장군은 조선과 일본의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였던겁니다.
05/05/27 10:59
수정 아이콘
그리고 조선을 공격한 주체는 엄연히 일본 전국토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일본이아니라니요
05/05/27 11:01
수정 아이콘
오히려 왜군으로 낮춰 부르는게 우리 조선을 더욱 낮추는 일이 되는거 같군요. 일본도아니고 그저 왜군 바닷가 놈들에게 수도털리고 의주까지 쫒겨갔다는게 치욕아닙니까? 우리는 엄연히 전쟁의 승리자이고 따라서 일본을 한 국가로 인정할수록 그에 승리한 조선을 더 높이는 결과가 되는겁니다.
기억상실
05/05/27 11:54
수정 아이콘
SEIJI 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윗분중에 전쟁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었단말 참 어이가없었습니다. 국사시간에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 안배우셨나요? 당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에 의해 철저히 계획되고 일본 전국민의 모든역량을 쏟아부어 일으킨 전쟁입니다. 일개 바닷가 해적들이 일으킨 난 정도가 아니구요. 그런식으로 열등감에만 사로잡혀 헐뜯고 깍아내리기만 하는것만이 우리 역사를 빛내는것이 아닙니다. 일례로 제가 정말 어이없어 하는것중에 우리나라에선 일본군의 총을 '조총' 이라고 표현하는겁니다. "새 조(鳥)" 자 인데 그럼 이순신장군이 새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하면 좋겠습니까. 탄금대에선 새총에 맞아 조선군 주력이 다 전멸하고.. 어이없죠?^^
오케이컴퓨터
05/05/27 16:11
수정 아이콘
그건 왜가 수십년간 전쟁만 하니깐 순식간에 쓸린것이지 결국 조선이 이겼지 않습니까? 조선이 마음만먹고 준비만했으면 쳐들어온거 바로막고 큐슈,본슈,시코쿠,훗카이도까지 다 쓸 수 있다고 봅니다만.. 요새도 정신나간 소리해대는 것보면 정신이상자나 과대망상자들이 정치하는 멍청한 깡패조직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힘만쎈 깡패가 세력이 큰것일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언젠간 그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멸종시켜버려야겠죠
오케이컴퓨터
05/05/27 16:31
수정 아이콘
왜가 그당시 쳐들어 올때 국가 체계를 가지고 있든 안가지고 있든 저는 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굳이 국가로 높여줄 필요도 없죠. 아직도 맛이간 행동을 하고있는것 보면 새대가리를 가지고있는 아주큰 조폭세력이 국가의 가면을 쓴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왜도 국가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명칭을 불러줘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倭를 日本이라 불러주고 왜의 임금을 하늘의 황제라 불러주고 독도를 다케시마로 불러주나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눈시울
05/05/27 17:16
수정 아이콘
밑에 글에 그래도 논리있게 답변한 후 새로 달린 덧글을 보니까 그저 허탈할 뿐입니다. 시간이 아까워지네요.
오케이컴퓨터
05/05/27 17:37
수정 아이콘
저도 시간이 아까워 지는 군요
05/05/27 17:56
수정 아이콘
그냥 임진전쟁.정유전쟁으로 부릅니다.
'일'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한 통일국호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라고 하는것은 우리나라의 오만일뿐입니다. (언제까지 동이족으로 살아야합니까..으흠 --)

일본은 현재 정식국호입니다. 그리고 천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왕 혹은 일본천왕. 으로 부릅니다.
스갤칼럼가
05/05/28 00:34
수정 아이콘
동이 라는 것이 오만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동이의 뜻이 좋은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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