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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5/19 12:33:36
Name CosmicBirD
Subject [유머] 명량해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써 보겠습니다.
◇명량해전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싸움.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8월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위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해전은 해상권을 상실한 칠천량해전 이후 남해안에서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린 해전으로,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명량)이 수로가 협소하고 조류가 국내에서 가장 빠른 점을 이용하였다. 울돌목에 쇠줄을 설치하고 일자진을 펴서 왜군을 유인하여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이는 세계 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승리였다.





왜선의 수와 우리의 배의 비율 11 : 1
단순 머리수 비교                  20 : 1






Ver . 스타크래프트

테란이 단순(병력) 인구수10으로   인구수(역시 병력만) 200을 가득채워오는 프로토스를

거의 피해없이 -_-;; 막아내며 게임의 흐름자체를 바꿨다는 거죠 ... 완전 캐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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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앙마
05/05/19 12:39
수정 아이콘
파벳 꽉찬 벙커5개에 저글링 200 어택땅 하면 어케 될지 갑자기 궁금..-.-;;
훈박사
05/05/19 12:45
수정 아이콘
입구막았는데 달려드는 저글링떼를 향해 시즈탱크 5기가 포격한 것 같군요 히히
상어이빨
05/05/19 12:45
수정 아이콘
벙커의 배치와 저글링이 어떻게 달려드느냐에 따라 다르겠군요..
05/05/19 12:47
수정 아이콘
이순신 장군님보고 캐사기라고 하는 것 같네요-_-
그 부분 정정 부탁합니다.
ForeverFree
05/05/19 12:51
수정 아이콘
싸우는 진형이 좋군요
六道熱火
05/05/19 13:21
수정 아이콘
울돌목에 쇠줄을 설치한 내용은 당시 사료나 공식 기록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후대 작성된 문건에서만 쇠줄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민간에서 구전/확대된 이야기를 적어놓았다고 보는게 옳다고 봅니다.
질럿과뮤탈이
05/05/19 13:36
수정 아이콘
육도열화님/ KBS 역사스페셜에서 쇠줄과 지탱했던 버팀목에 대한 증거자료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허구라고 보기는 힘들듯 합니다.
그리고 울돌목보다 더 빠른 해류에도 끄떡없이 잘 누비던 당시 왜선들이었습니다. 구조 자체가 판옥선보다 더 스피드한 항해가 가능한 구조니까요. 쇠줄이야기를 배제한다면 저 말도 안되는 미스터리하기까지한 명량대첩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수 있었는지 입증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전 개인적으로 쇠줄로 진로를 막고 공격을 퍼부은게 맞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선은 판옥선에 근접전을 했을 것이고 저런 대승 자체가 있을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六道熱火
05/05/19 14:04
수정 아이콘
질럿과뮤탈이사랑할때님/ 이순신 장군이 직접 서술했던 난중일기에서조차 철쇄를 설치했단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전라 좌수영에 철쇄를 설치했다는 사실은 나와 있습니다만, 이 철쇄와 울돌목 철쇄를 연관시키기에는 그렇죠.) 역사스페셜에서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관련 사료에서 나와 있지 않는 이야기를 정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듯 하군요.
그리고 명량대첩에 참여한 왜군은 우리나라 판옥선급 아다케가 아니라 세키부네였습니다. 적의 주력선이 빠진 것과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울돌목의 좁은 입구와 빠른 유속, 우리나라 해군의 우수한 화포 등으로 철쇄의 존재유무를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명량해전의 승리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Naraboyz
05/05/19 14:41
수정 아이콘
여러분.... 저글링 200마리가아니고 400마리입니다-_-;;
The Essay
05/05/19 14:44
수정 아이콘
Naraboyz// 아무생각없이 200마리로 착각을... 원츄!
양정인
05/05/19 15:00
수정 아이콘
얼마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의 탄신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KBS에서 낮 시간대와 밤에 역사스페셜과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더군요.
역사스페셜은 명랑대첩에 관한 내용을 다큐멘터리는 전승신화의 분석과 일본에서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다큐였습니다.. '육도열화'님과 '질럿과뮤탈이사랑할때' 님들의 의견처럼 명랑해전의 분석도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조선군의 전력은 모든면에서 열세였으며, 울돌목의 조류가 다른 곳과는 틀리게 엄청 빠르고 언급 합니다. -이 부분은 진도가 고향이신 저희 부모님에게도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곳은 파도가 세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통과할 엄두도 못내고 물길을 아는 사람들도 지나가려고 하지 않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왜군들도 울돌목과 비슷한 환경에서 평소에 해전을 겪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지, 격한 조류로 인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죠. 그래서, 울돌목의 지형적 설명과 해전이 벌어질 당시의 격전지였던 장소에 철쇄가 있었다는 증언과 사진을 보여주더군요. 지금은 다리를 설치하느라 없어졌다고 하구요. 아. 그리고 철쇄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언급한 사료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명랑해전에 참여했던 어느 장수의 서책에 철쇄를 사용했다고 언급되어있다고 합니다. 이것들을 토대로 철쇄와 격한 조류를 이용해 대승을 거뒀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죠.
제 의견도 역사 스페셜이 내린 결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군의 함포공격이 무척 위력적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10배 이상 차이나는 전선의 차이를 함포사격으로 접근조차 못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싶습니다. 어느정도 입구가 좁아졌다고 해도 몇대정도는 접근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고 한척의 피해도 없이 왜군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병력에서나 전선에서나 절대적인 열세인 상황에서 피해없이 승리하기 위해선 지리적 잇점과 또 다른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전략이 철쇄를 이용해서 접근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철쇄를 고정했던 부속물도 있었고, 참전했던 장수의 기록도 있었고... -다만 사령관인 이순신장군의 기록이 없었다는 사실이 찜찜한 것이지만요.-
六道熱火
05/05/19 15:21
수정 아이콘
철쇄 기록을 담고 있는 사료는 18세기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 1799년에 작성된 호남절의록, 1970년도에 발행된 현무공실기가 있습니다만 다 임진왜란 이후 한참 지나서 쓰여진 이야기들입니다. 반면 실록이나 난중일기같이 그 당시에 쓰여진 사료들에게는 철쇄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사료들에 쓰여진 철쇄 이야기는 이후 부풀려진 민간구전을 적어놓았다고 추측하는 것이죠. 그리고 증언과 사진이라면 현대의 이야기일 테니 더더욱 역사적인 가치가 떨어집니다. 임진왜란시절 설치해 놓았던 철쇄가 사진을 찍을 때까지 유지되었을 리도 없습니다.
양정인
05/05/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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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드라마에 나왔던 '한산대첩'의 해전장면에서 보였듯이 함포의 사격이 끝난 후 재장전이 필요한 시점에 아무리 선회력이 뛰어난 판옥선이 재장전 시간을 뛰어난 선회력을 이용해서 반대편의 함포를 이용해 사격을 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한산대첩과 명랑대첩은 상황이 틀립니다. 왜군보다 전선이 열세이지만 그 열세를 극복한 이유들 중에 전략도 있겠지만 왜군보다 우세했던 함포의 위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산대첩에선 뛰어난 전략과 많은 함포의 수로 왜군을 무력화 시켰다면 명랑대첩은 지형적 잇점과 함포의 위력만으론 한계가 있습니다. 한산대첩과 비교했을 때 많이 부족한 함포만으론 100여척이 넘는 전선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울돌목이 1km정도 밖에 폭이 안된다고 하지만 함포를 이겨내고 꾸역꾸역 밀고 들어올 수는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철쇄에 대한 난중일기에 언급이 되진 않지만 그 당시 사료가 난중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명랑대첩에 참전했던 장수의 기록도 발견이 되었고, 전투가 벌어졌던 그 장소에 철쇄가 설치되어있을 장소에 철쇄를 고정시킬 부속물도 있었으니까요.
철쇄를 이용해서 적선의 전진을 막고 그 사이에 함포사격을 통해 그 많은 수의 전선을 전멸시키다시피한 전투... 지금도 소름이 돋습니다. 요즘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기발한 전략을 만들어내서 우리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만 이순신 장군만큼 위대한 전략가이자 영웅이 있었을까요? 전 없다고 자신합니다. 23전 23승도 물론 놀랍지만... 매번 열세인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둔 전과이니까요.
양정인
05/05/19 15:29
수정 아이콘
실록은 사관들이 기록합니다. 일선 장군들이 전략등을 기록해 조정에 보내지 않으면 사관들이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철쇄가 문제가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난중일기 등에 언급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인데, 난중일기 막바지에 이순신 장군의 건강상태가 매우 안좋았다는 것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기록할 정신이 없었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 추측입니다. - 아.. 그리고 역사스페셜에 나오는 그 서적은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좀 오래되 보였습니다. 어느 사당에서 보관중이더군요.
六道熱火
05/05/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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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식으로 부정하신다면야 저야 할말이 없군요. 철쇄기록이 없는게 실록은 이순신 장군이 그 내용을 안보내고 난중일기에 안적힌건 이순신 장군이 몸이 아파서 그렇다라... 그리고 역사스페셜에서 나오는 그 서적은 이름이 무엇이며 언제 작성된 것인가요? 단순히 오래되 보이는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 작성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양정인
05/05/19 15:35
수정 아이콘
다리를 설치할 때 없앴던 그 철쇄를 고정시켰던 부속물을 탄소연대측정을 통해서 연대 측정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면 더 확실하게 알수 있지 않았을 까 싶습니다. 설치된 연대를 알 수 있다면 어떤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까 추정이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그 부속물을 왜 없애버렸는지... 철쇄를 이용해서 해전을 대첩으로 만들었다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일텐데 말입니다.
양정인
05/05/19 15:48
수정 아이콘
전..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알리지 않았고 아파서 기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록이란 것이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록한 것이란 겁니다. 따라서 사관들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구전이야기도 조정에서 언급이 되야 기록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철쇄를 이용해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전해져 내려오는 데도 불구하고 실록에서는 어떤 언급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 둘중에 한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조정에서 언급이 되지 않았거나 전투의 전과를 보고하는 보고서에 언급이 안되어있는 것이죠. 물론 명랑대첩에서 '육도열화'님의 의견처럼 철쇄가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난중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도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 추측은 난중일기 막바지에 이순신 장군의 건강상태가 매우 안좋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스페셜에서 알려주었습니다.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하고 매우 안좋았다고 알려주던군요. 이것들을 토대로 전 아무래도 기록할 정신이 없지 않았을 까 생각하는 겁니다. 저도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하기 싫거든요.
그리고, 정확한 역사는 많은 사료를 통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게 맞겠지만 철쇄가 언급된 다른 서책과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에 있던 부속물, 그리고 그 지역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六道熱火
05/05/19 15:50
수정 아이콘
역사스페셜의 대본을 봐도 울돌목에 철쇄를 직접 설치했다는 이야기는 없군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설치했다는 이야기와 전라좌수영에 설치했다는 이야기만 하는군요. 물론 임진왜란 직전 설치한 철쇄는 정유재란 시기와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서 명량해전과 전혀 연관시킬 수 없고, 명량해전이 일어난 진도 방면은 전라 우수영 지역이라서 좌수영 지역의 철쇄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나무기둥이 발견된 것도 진해의 제포기 때문에 진도지역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고... 역사스페셜에서 내놓은 사실들 중 명량해전과 연관지을수 있는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조류가 그렇게 센 울돌목에 나무기둥을 박아넣는다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지만요.)
05/05/19 15:51
수정 아이콘
위에 누군가가 내용을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에 거북선에 대해 들어보니,, 그당시 사용했던 우리 배들이 월들히 좋았다고 합니다. 일본놈들은 백병전이 주전략이었으나 우리는 멀리서 폭으로 적을 전멸시키는 전략이 주였다고 하더군요, 거북선은 그당시 사용하던 배(이름이기억안남;;) 의 개조품으로 거북선이 앞에서 알짱대면서 함대를 교란시키고 뒤에서 포함대가 공격을 했다고 해서 전투에서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칼로 싸우는것보다 활처럼 장거리 싸움을 좋아했다더군요.. 여튼,, 포톤과 아칸을 이용해서 저글링 다수를 잡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양정인
05/05/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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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대본을 통해 잠시 보고 왔는데.. 철쇄에 관한 기록은 일본에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울돌목에 이순신 장군이 왜란이 벌어지기전 바다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공사현장을 하루 종일 감독했다는 것이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그 바다밑에서 나무기둥들이 발견이 되었고 4~500여년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현재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쇠사슬이 있는 것과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순신 장군이 철쇄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그 전투에서 패한 왜군들의 기록에도 철쇄가 언급이 되어있구요.
happyend
05/05/1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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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만 보태보겠습니다.
수군들이 나룻터나 좁은 물목에 야간경비용 철쇄를 비치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던 것 같네요.
철쇄의 원리는
1.도르래의 원리
2.쇠마름의 아이디어
3.부력의 원리
이 세가지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중 도르래는 명량해협같은 물살이 센 곳에서는 굉장한 힘이 필요해서 강강수월래를 부르는 여인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감았다 풀었다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난중일기를 모두 보셔서 알겠지만 철쇄는 마치 보초를 세우기 위해 망루를 세우듯 이순신장군의 진지구축과 방어의 기본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기록에 장군이 쓰지 않은 것도...그런 것 아닐까요?
양정인
05/05/19 16:04
수정 아이콘
울돌목이 아니었군요. 그 공사현장이...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추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울돌목 밑에선 나무기둥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무기둥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부속물을 육지에서 발견했고 철쇄라는 언급이 명랑해전에 관해서 언급한 것인지는 판단을 내리진 못하겠지만 언급이 되어있는 것으로봐선 사용이 되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런 의견을 내는 것이 물론 추측이기 하지만 철쇄에 관해 이순신 장군이 언급이 없었기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니까요.
양정인
05/05/19 16:07
수정 아이콘
아.. 그리고 거북선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자면.. 거북선의 용도는 돌격선이었습니다. 왜군들의 전선이 모여있는 진형을 헤집고 들어가서 진형을 휘젓고 다니며 왜군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죠. 그 당시의 전형적인 왜군의 공격방식인 도선이 불가능하게끔 만든 거북선의 특징을 이용해서 왜군의 진형내를 휘젓고 다니며 조선군의 주력인 판옥선의 함포사격이 더욱 더 용이하게끔 만드는게 주된 임무였다고 합니다.
ninetofiver
05/05/19 16:32
수정 아이콘
오늘자 부산일보를 보니..세계최초의 측우기가...중국사학자들이 자기들 발명품이라고 우기고 있고, 서양학자들도.. 동조하고 있다는 쌩뚱맞죠...
래몽래인
05/05/19 17:31
수정 아이콘
그럼 그 훨씬 뛰어난 배들과 함포를 가지고도 전멸한 원균이는
발로한 장수?
ArcanumToss
05/05/19 17:36
수정 아이콘
1597년 7월 16일, 도원수 권율로부터 일본군이 주둔중인 부산본영을 치라는 군령을 받은 원균함대는,
칠철량에서 전멸되었고 경상우수사 배설 휘하 판옥선12척만이 가조도로 퇴각했다. 134척 조선연합함대
중 12척만이 살아 남았고 무적을 자랑하던 조선함대 122척이 나포되거나 격침된것이다.



패전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조정은 백의종군중인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고(7월23일),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대동하고 21일 노량진에 도착했다.
살아남은 판옥선을 점검한 결과 이순신은 앞으로 일본수군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임을 느끼고 적에게 떨어지기 직전의 전라도 읍성을 돌면서 수병, 무기, 군량등을 확보했다.(8월16일 남원함락, 25일 전주함락)



그사이 조선 조정에서는 전투력을 상실한 수군을 폐지하고 이순신을 육군지휘관으로 정한다는 엉뚱한 기별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즉시 장계를 올려 ('신에게는 아직도 전함12척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한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것입니다.')
수군 폐지론을 잠재워 버렸다. 그리고 8월 29일 이순신함대는 진도 벽파진에 이르러 척후장들을 해상에
내보내 일본 주력 함대의 동향을 살폈다. 이순신은 이때 이미 결전을 벌일 장소로 노량해협 울돌목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임진왜란전 진도군수로 발령되어 부임지로 향할때 봐두었던 곳이며 1.5km가량 되는 울돌목은 수심이 얕아 배가 지나갈수 있는폭은 400m도 되지 않는다. 폭이 이처럼 좁기 때문에 십수척의 포함으로 200척을 격파할수 있었던것이다.
벽파진은 울돌목으로 부터 15km지점이며 이순신은 보름 넘게 벽파진에 머무르며 일본주력 함대를 유인했다.그리고 9월 14일 어란포의 군관 임준영으로 부터 적함 200여 척이 어란진에 집결중이며 벽파진 이순신
함대 10여척을 깨고 한강으로 곧바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보고했다. 과연 일본수군은 이순신을 배후에 두고 한강으로 올라갈수 없어서 조선잔여 함대12척을 깨기 위해 좁은 명량해협으로 몰려 오고 있었다.
첩보를 받은 이순신은 즉시 함대를 움직여 해남 우수영 앞바다로 나아갔다. 그리고 해남 우수영에서 수병없는 판옥선 한척을 함대에 포함시켰고 백성들의 고깃배 100여척도 함대로 위장시켰다.



그리하여 조선함대 총병력은 판옥선13척에 협선 32척이었다. 9월 16일 척후로 부터 적함 200여척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고 이순신 함대는 울돌목으로 이동하여 조류에 밀리지 않도록 닻을 내렸다. 정오무렵 왜선 200여
척이 노량해협을 덮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130여 척이 공격해 들어왔고 70여척은 후방
노량해협 입구에 대기 했다. 이순신이 전함대에 닻을 올리고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것이고, 살려고 피하면 죽을 것이다. 한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키면
천사람을 막을수 있다.'



그러나 일본수군 위세에 눌린 조선수군장들이 아무도 나서서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조류에 밀려 함대를 이탈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기함만이 남게 되었다. 기함의 수병들이 벌벌떨고 있을때 이순신이 노기띤
명령으로, '죽기로 싸워라! 적이 천척이 되어도 우리배 한척에도 덤비지 못한다. 싸워라!'



몸소 활을 당기고 독전하며 지휘하자 용기를 얻은 기함수병들은 배를 움직여 적진에 뛰어 들며 일제히 함포를 쏘았다. 조선기함 단 한척의 용전분투에 기가 죽은 일본 안택선은 전진하지도 못하고 조총사격만 할 뿐이었다. 이어서 한참 뒤로 물러나 있던 중군장 김응함과 안위가 앞으로 돌격해 전투에 가담했다.



김응함의 전함과 안위의 전함이 중과부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이순신의 기함이 쫒아가 적함 3척을 한꺼번에 뒤집어 버렸다. 뒤에서 달려온 송여종, 정응두의 전함이 달려왔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전함들도 달려와 13척이 모두 전투에 참전했다. 판옥선 13척의 총통이 불을 뿜을때마다 일본전함이 수십척이 산산조각 났고 타고 있던 수병들은 물에 뛰어 들었다. 물에 뜬 일본수병들은 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이 그대로 덮어 버려 그밑에서 익사하고 활에 맞거나 창에 찔려 죽었다. 일본함대 한가운데 뛰어든 판옥선에 일본도검부대가 기어올라왔는데 조선수병들은 일제히 갑판밑으로 내려가 문을 잠그고 다른판옥선 사이로 항해하자
주위 조선함선에서 조란환을 발사하여 갑판위의 일본군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울돌목의 조류가 급해 소용돌이 치는곳이 많아 일본군은 지휘관의 명령대로 진형을 갖출수가 없었고 판옥선과는 달리 일본 안택선은 바닥이 뾰족하여 선회할때 충분한 면적이 필요한데 폭이 300여m도 안되는 울돌목에 130여척이 뒤엉켜 있으니 이동이 불가능한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발이 묶인 상태로 마냥 앉아서 조선수군의 불벼락을 맞고 한척씩 한척씩 격침된 것이다. 그사이 정오가 넘어 오후로 접어들면서 조류가 바뀌어 일본군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일본수군의 전략은 접근하여
싸우는 것인데 조류에 밀리게 되어 조선함대에 접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뒤로 밀리거나 제자리였다. 그리고 판옥선은 쌍돛이라 역풍을 헤치고 갈수 있지만 일본선은 단돛으로 순풍에서는 빠르지만 역풍에서는 느리다.



더이상 접근하지 못하는 일본수군을 보고 이순신은 진을
짜고 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모두 150문이 넘는 우수한 함포가 포탄을 날리니 한군데에 몰려엉킨 일본 함대는 피할수가 없었다. 특히 대장군전을
날릴 때는 배한척을 관통하여 다음배 갑판을 박살냈고, 현대의 산탄총과도 비슷한 조란환을 쏘면 탄알이 흩어져 갑판위에서 지휘하던 일본장수와 조총사수들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싸움도중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시체를 건저 올려 수급을 돛대에 높이 매달자 이것을 본 일본수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반대로 조선수군은 갈수록 힘을 얻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류가 일본군 쪽으로 거세게 흘렀고 조선함대는 포격전을 중지하고 충파전을 감행했다. 닥치는대로 들이 받아 11척이 가라앉았고 다른배도 전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은 퇴각을 시작했고 조선군은 추격하여 박살냈다.
전투가 끝난 후 조선수군의 피해는 단한척의 전함도 부서지지 않았고 1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리고 일본은 완파되어 격침된 배만 31척이고 나머지 170여척 또한 조선군의 대장군전과 조란환
사격 등으로 인해서 반파된 배가 절반정도 될 것이며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배는 전투중 입구에 대기했던 70여척과 전투에 참전한 전함 10척에 불과했다. 격침된 31척을 제외한 약 90여척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타고있던 일본수병은 적어도 1만명정도 피해를 입은것으로 추정됨.
이 싸움을 이순신 자신도 하늘의 운이었다고 할만큼 어려운 전투였으며 신화같은 승리였다.


내용출처 : [도서] 다시쓰는 임진대전쟁, 베니스의 개성상인 참조
ArcanumToss
05/05/19 17:38
수정 아이콘
초링글스
05/05/19 18:02
수정 아이콘
이순신 장군이 어땟는지는 모르지만

세계4대해전에 포함되더군요,,

그것도 첫손가락에 뽑히는,, 대단한 분이시죠
05/05/19 18:31
수정 아이콘
ArcanumToss님의 글 중에 '김응함의 전함과 안위의 전함이 중과부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이순신의 기함이 쫒아가 적함 3척을 한꺼번에 뒤집어 버렸다.'는 대목에서는 전율이......
제 개인적으로 명량해전의 최대 의문점은 그렇게 오래 싸운데다가 상대전함이 접근도 못할 정도로 만들려면 함포사격을 연속으로 계속 쏟아 부었을텐데..... 과연 전투가 끝날때 까지 쓸 포탄과 화약을 어떻게 배에 실었는지가 궁금하더군요.
길목잡기과 함포사격이외에 어떤 작전이 분명 있었을 듯 싶습니다. 그게 쇠사슬을 썼든 쓰지 않았든 말이죠.
그나저나 명랑해전을 본다면 이순신장군은 지장일 뿐 아니라 용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머리를 써서 좋은 자리에서 잘 싸운다고 하지만 그런 병력 차이에서는 용맹함이 어지간히 많지 않고서는 도저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군요.
05/05/19 19:36
수정 아이콘
여든 결론은 이순신 만세! 일본넘들 다 나가 뒤짐; ^^ 철쇄를 사용하건 아님 다른 무엇이건 이전투는 역사에 길이남을 큰 대첩이었다는 사실과, 이순신 장군이 대단하신건 변함이 없겠죠?
이디어트
05/05/19 20:25
수정 아이콘
뭔진 몰라도...
하나도 안 웃긴데요...??
Shining_No.1
05/05/19 22:34
수정 아이콘
이디어트 님// 그렇게 삐딱하게만 보시지 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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