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만과 임요환, 공통점과 차이점
K-1와 스타리그가 진정한 스포츠로 자리잡으려면
이정환(bangzza) 기자
올해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누구일까. 단연 최홍만이다. 밥샙을 이겨서? 본야스키와의 경기 순간 시청률이 22.8%를 기록해서? 아니다. 최홍만 신드롬이 그동안 이종격투기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각종 논란을 일시에 잠재웠기 때문이다. '피의 굿판'?, 이제 적어도 K-1은 할머니에게도 구경거리로 자리 잡았다.
최홍만 같은 스타가 또 한 명 있다. 임요환이다. 이전까지 스타크래프트가 오락 게임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그의 환상적인 드롭십 컨트롤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스타크래프트리그(이하 스타리그)는 확실한 프로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지난 11월에 열린 임요환과 오영종의 결승전 현장에는 무려 3만여 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역대 스타리그 사상 최고 순간 시청률(3.29%)을 기록했다.
K-1과 스타리그... TV에 의한, TV를 위한 스포츠
▲ 임요환이 속해 있는 스타리그 SK텔레콤 T1 팀.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사람만 700만. 스타리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다.
ⓒ 김민규
최홍만과 임요환으로 대표되는 이들 스포츠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승부가 빠르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툭탁거리지 않는다. K-1의 경기 시간은 짧다. 복싱보다 KO율이 높기 때문이다. 스타리그 경기도 보통 10∼20분 안에 승부가 끝난다.
승부가 빠르다는 것은 광고가 들어갈 여지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빠른 '광고회전율'은 오늘날 새로운 스포츠가 미디어에 어필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이를 위해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스포츠들까지도 룰을 바꾸는 형편이다.
박진감이란 미명 아래 탁구는 21점제에서 11점제로 바뀌었다. 배구도 25점 랠리 포인트 제도를 선택했다. 미식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에서 알 파치노는 대사 한마디로 스포츠와 상업미디어의 관계를 명쾌히 드러내기도 했다. "TV가 모든 걸 바꿔 놨어. 광고하려고 경기를 중단시키기 시작했을 때 다 끝장 난 거야."
허나 오늘날 TV스포츠는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K-1과 스타리그는 미디어가 원하는 조건, '빠른 승부'를 충족시킨다. 여기에 다음 시합 전까지 선수를 소개하고, 분위기를 만드는 일종의 '쇼'도 가미시킬 수 있다. 물론 이 사이에도 광고는 들어간다.
최근 방송시장의 재편구도 또한 두 스포츠의 성장에 중요한 촉매가 됐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지상파방송에서 이들의 경기 중계는 꿈도 꾸지 못한다. 하지만 케이블TV에서는 가능하다. "지상파는 10%의 시청률이 나와야 하지만, 케이블은 1%만 나와도 성공"이기 때문이다.
임요환이 '스타지존'이 될 수 있었던 이유
▲ 프로게이머 임요환. 그의 드롭십은 환상적이다. 팬들은 임요환의 화려한 손놀림과 허를 찌르는 작전에 환호한다.
ⓒ 김민규
그러나 이종격투기와 스타리그가 '빠른 승부'를 장점으로 미디어의 효과를 빌어 저변을 확대시켰지만 두 종목(?)을 대표하는 스타 임요환과 최홍만의 등장 과정은 매우 다르다. 우선 임요환은 국내에서 스타리그가 프로스포츠로 자리잡을 무렵에 떠오른 스타다.
스타리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자리잡은 프로스포츠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스타리그는 환상적인 인프라를 기반으로 갖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무수한 사이버 잔디구장이 있다.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언제든 배틀넷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저변 확대가 용이하다. 우리나라 사람 중 7백만명이 스타크래프트를 즐길 줄 안다고 한다. 손가락이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선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경쟁은 치열하고, 리그는 세분화된다. 게임전문방송 <온게임넷>의 경우 챌린지 예선-챌린지 리그-듀얼 토너먼트-스타리그로 나뉜다. 스타리그에 올랐던 선수라도 언제든지 하위 리그로 떨어질 수 있는 구조다. 세계적인 축구 리그들과 비슷한 형태다.
치열한 경쟁만큼, 선수들의 플레이는 최고 수준이다. 관중 동원으로 이어진다. 스타리그는 보통 결승전을 제외하고는 경기장이 아닌 스튜디오에서 열리지만 관중 숫자는 엄청나다. 지난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E-스포츠의 부상과 향후 과제'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스타리그를 보기 위해 스튜디오나 경기장을 직접 찾는 관객이 연간 60∼70만명 선에 이른다고 한다. 인터넷과 TV의 영향력 아래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오프라인에서 관중 동원도 할 수 있다는 검증을 거친 셈이다.
2004년 7월 스타리그 결승전에서 나타난 이른바 '광안리 10만 사태'는 프로스포츠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다. 더욱 특이한 것은 승패에 연연하는 관중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직접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을 즐길 줄 알기 때문이다.
임요환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선수가 아니다. 임요환은 스타리그가 프로스포츠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출한 스타로 봐야 한다.
최홍만은 어떻게 K-1 선수가 됐나
▲ 지난 3월 K-1에 진출한 최홍만의 선전으로 이종격투기는 전 국민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 인터넷 공동 취재단
최홍만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실 국내에서 이종격투기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 투기보다 강도 높은 폭력성에 거부감을 가졌고, 경기와 별도로 요란하게 이뤄지는 등장 이벤트도 스포츠와는 거리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껏 응원할 만한 한국 스타도 없었기 때문에, 이종격투기는 일부 마니아들에게만 편애받는 스포츠였다.
또한 K-1의 인기는 일본에서도 추락하고 있었다. 판정 승부가 늘어나면서 밋밋한 경기가 많아졌고, 이로 인해 많은 일본 팬들이 더욱 화끈한 프라이드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이종격투기 마니아들 역시 프라이드에 관심이 높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K-1의 최홍만 영입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자국 내 위기 상황을 타파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한국 시장을 이용하고, '거인'을 링에 세워 양국 팬들의 눈길을 잡으려는 K-1의 시장 전략이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려는 얼마 후 현실로 나타났다. 씨름판을 떠났던 최홍만이 K-1 선수로 국내 팬 앞에 당당히 나타났던 지난 3월 서울 대회. 많은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지만, 엄청난 수익은 일본 이벤트사가 챙겨갔다. 한국 대행사들은 대회 개최권만 획득하고 본전도 건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상술에 놀아났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어쩌면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이종격투기는 일본발 프로스포츠고, 그들의 마케팅 능력을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안방을 내주다가, 자칫 국내 이종격투기가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고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멕시코나 도미니카 등 남미국가들이 메이저리그 선수 생산공장 역할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일본 이종격투기 시장의 선수 공급국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K-1 리그에서 문대성(태권도 금메달리스트)과 전기영(유도 금메달리스트) 등에게도 러브콜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같은 가능성이 한 때 거론된 바 있다.
하지만 최홍만의 잇따른 선전이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제까지 거론됐던 문제점들은 한꺼번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최홍만의 선전에 박수를 보내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은 그의 성공 뒤로 K-1 리그를 이끌고 있는 일본의 '상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최홍만의 '니킥'과 임요환의 '드롭십 컨트롤'이 다른 이유다.
'게임'과 '쇼'에서 벗어나려면
▲ K-1이 진정한 스포츠로 거듭나기 위해선 과도한 '상업성'을 벗어야 한다.
ⓒ 박상규
전문가들은 일본 대회의 인기몰이만으로는 이종격투기 정착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최홍만 선수만 바라봐야 하는 K-1리그의 생명을 짧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국내 경기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지난 5월에 일어났던 이종격투기 선수 사망 사건은 열악한 현실을 상징한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맞춰 있는 마니아들의 눈높이가 갑자기 국내리그로 낮춰지길 바라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일본 이종격투기 시장을 흉내만 내서는 어렵다. 대회 진행이나 경기 방식에 있어, 우리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해야 한다. 아울러 최소한의 인프라부터 차근차근 확보해야 한다. 특히 이종격투기는 높은 수준의 안전 대책이 갖춰져야 한다. 전문 훈련을 거친 심판과 의료 대책은 선수들의 경기력 보존을 위한 기본 장치다.
스타리그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장 임요환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병역 문제다. 임요환은 모 일간지 연재 코너를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게임 환경, 한눈을 팔면 순식간에 후퇴하는 게임 감각 등을 고려하면 군 입대 이후를 기약하긴 쉽지 않다. 머리도 느려지고, 손도 둔해질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만큼 프로게이머의 선수 생명은 짧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청소년들이 프로게이머를 꿈꾸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이들이 모두 임요환은 될 수 없다. 병역 혜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미래는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외적으로는 화려해졌으나 프로게이머로 살아가기엔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작년 한국프로게임협회가 조사한 결과 프로게이머 1년 평균 수입은 635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