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로 빚은 진주 빛날 때 희열"
"게임에 무슨 감독이 필요해?"
프로게이머라는 용어 조차도 낯설었던 몇년 전만 해도 그랬다. 사실 과거 개인리
그 위주의 e스포츠 시스템에서 감독이란 일정을 조정하고 수입을 관리하는 '매니
저'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여기에 신인 발굴 정도가 능력의 부가적인 잣대였을 뿐
이다.
그러나 지난 2003년 본격적인 단체전 시대가 열리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객
관적인 전력이나 선수들의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팀이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
은 바로 감독의 용병술과 팀 운영 때문이었다.
한빛스타즈 이재균 감독이야말로 딱 떨어지는 예다. 단체전 시대 이전에는 스타
리그 우승자를 줄줄이 배출한 '스타 제조기'로, 프로리그를 맞아서는 팀을 '최고 명
문'으로 끌어올린 최고 감독.
슈퍼 스타 한명 없이 맞은 이번 시즌에서도 초반 3연승으로 또 한번의 신화를 만
들고 있는 이 감독에게 물었다. 과연 단체전 시대의 최고 감독은 무엇을 말할까.
선수 개인기에 의존 탈피 '팀 운영의 묘' 주력
슈퍼스타 없이 시즌 3연승 출발 '신화' 재창조
"노하우? 강한 정신력- 소속감 심어주는 거죠"
◆나를 믿는다
첫 단체전이었던 2003년 EVER 프로리그에서 한빛스타즈는 오리온(현 SK텔레
콤)에게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비가 흩뿌리던 그날 밤, '패장' 이 감독은
관중들이 모두 떠난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자책했다.
"선수들을 너무 믿었다. 강도경 나도현 박경락 박용욱 박정석 변길섭…. 당시 우
리 팀 선수들은 나가기만 하면 이겼다. 그러나 내 뒤통수를 친 것은 스스로의 방심과
상대의 선수 기용이었다."
그때부터 이 감독은 180도 변했다. '개인전은 선수 책임, 단체전은 감독 책임'이
라는 답이 나왔다.
단순히 팀을 정상에 올려놓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배수진을 쳤다.
당시 집안 사정 때문에 고액 연봉이 절실하던 박정석과 변길섭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다른 팀으로 내보낸 것. 사실 다른 팀 감독이라면 가겠다는 선수를 잡아도 시
원치 않을 판이었다.
그러나 이 감독은 말한다. "선수가 뛰어나서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체전 만
큼은 내 힘으로 이뤄내고 싶었다."
◆개념이 중요하다
이 감독의 '선수 만들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한빛스타즈에서는 꾸준히 '대
체 스타'가 나왔다는 게 그 예다. 박정석과 변길섭이 빠진 뒤에는 나도현과 박경
락이 에이스 자리를 메웠고, 이후에는 조형근이나 김준영 등이 스타리거로 성장
했다.
불과 반년도 안 된 신인들이 어떻게 금방 에이스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 감독은 '개념잡기'라는 말로 압축한다.
"초중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운동을 한 다른 스포츠 선수들과는 달리 게이머들은
기술과 정신력 모두 체계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잘 나가던 선수라도 한
번 삐긋하면 끝없는 슬럼프에 빠지기 쉽다."
선수들이 이 감독으로부터 지겹게 듣는 말은 '네가 왜 연봉을 받고 팬들의 박수
를 받는지 깨달아라'는 것이다.
최근 선수들의 실력 평준화를 맞으며 e스포츠 관계자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
고 있다. e스포츠는 '마인드 게임'이다. 결국 생각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또 하나의 핵심은 '팀'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는 한빛스타즈다"라는 선수들의
짧은 말 속에 그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
◆욕심이 나를 키운다
선수 관리와 전술 준비, 팀 운영, 심지어 운전까지 게임팀 감독에게는 엄청난 업
무량이 뒤따른다. 그래서 2년전부터는 감독 말고 코치까지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한빛스타즈에는 코치가 없다. 선수 기용은 물론 전략까지도 감독이 직접
챙긴다. 상대 팀의 비디오를 뜯어보는 데이터 분석도 감독의 몫이다. 특히 결승
전이라도 낀 주에는 며칠 전부터 꼼짝을 못한다.
이 감독의 스케줄이 헐렁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게을러지면 감독으로서
의 역량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게 이유다.
물론 게임에 대한 욕심이 크다는 것이 중요하다. "선수 한 명이 스타급으로 성
장하고 1승을 추가할 때마다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욕심은 단순히 이기거나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아니다. 몇년전
까지만 해도 불모지와 같았던 e스포츠계에서,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서 보겠다는 야망 때문이다.
"나는 선수 출신이 아니다. 그러나 선수보다 더 유명한 감독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목표는 이미 절반쯤 이뤄졌다.
< 전동희 기자 te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