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만큼 이기고 싶어지기에 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
삼성전자 프로게임단 칸 선수들이 말하는 ‘나의 인생, 나의 게임’
미디어다음 / 조혜은 기자, 사진=정재윤 기자
소년들은 중고등학생이었다.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 막 들어와 PC방에서 널리 퍼지던 시기. 소년들은 빠르게 게임에 빠져들었다. 한 소년은 게임이 너무 좋아 중학교 3학년 때 자퇴를 하기도 했다. 그 뒤로 줄 곧 게임만 하며 살았다. 주위에서는 모두 미쳤다고 했다. 소년들은 어느새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됐다. 또래의 아이들이 한창 대학교에 다니며 취업을 걱정할 나이. 이제는 수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프로선수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프로게이머 선수들은 대부분 위와 같은 과정을 겪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들은 왜 학교를 포기하면서까지 게임에 빠져들었을까, 프로가 된 지금의 생활은 어떨까, 앞으로 이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무엇일까. 삼성전자 프로게임단 칸 소속 선수들의 숙소를 찾아가 위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대답은 간단했다.
“게임이 왜 좋냐고 물어보면 사실 할말이 없어요. 그냥 좋은거죠. 그러나 막상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게 됐습니다. 목표는 당연히 스타 리그 우승입니다.”
20대 초반에 프로의 자리에 오른 선수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프로게임단 칸 선수들.
삼성전자 프로게임단 칸은 지난 2000년 6월 창단됐다. 칸에는 스타그래프트 게이머 5명 외에도, 피파 게이머 2명, 워크래프트 게이머 3명, 연습생 7명을 포함해 총 17명의 선수가 활동하고 있다. 스타급 선수는 없지만 최근 김근백, 최수범 선수가 IOPS 온게임넷 스타리그 8강에 진출하는 등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팀이다.
선수들을 찾아갔을 때는 한창 연습 중이었다. 독서실처럼 생긴 연습실 책상에는 책과 공책 대신 컴퓨터가 한 대씩 놓여있었다. 프로게이머 선수들답게 버튼 몇 개가 빠져있는 키보드가 눈에 들어온다.
선수들이 한데 모였다. 게임만 하던 선수들이라 말을 시키기가 쉽지 않다.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은 항상 짧다.
‘프로’선수들이라고 하기에는 언뜻 봐도 어려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18살에서 25살의 젊은이 들이다. 그러나 게임 경력으로만 보면 5~6년 이상이 되는 틀림없는 ‘프로’다. 이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때 게임을 시작했다.
최근 좋은 성적을 보이며 팀의 기대주로 떠오른 최수범(22)선수는 원래 비디오게임 마니아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스타크래프트라는 것을 알게 됐고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하더니 집에 있던 비디오 게임기와 게임팩들을 모두 팔고 컴퓨터를 장만했다.
“그때만해도 모뎀을 주로 썼기 때문에 인터넷을 쓰면 집 전화를 쓸 수 없었었죠. 그래서 저희 집은 항상 통화 중이었고 전화요금도 상당히 많이 나와 어머니께 항상 혼났죠.”
게임에 미쳐 학업까지 포기하고 프로게이머 생활에 뛰어들어
게임에 빠져들면서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기도 했던 최수범 선수.
박성훈(20) 선수는 게임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돈에 손을 대기도 했다. 박 선수는 집에 컴퓨터가 없어 컴퓨터가 있는 친구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게임을 했다. 그러다 ‘베틀넷’ 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게임을 하고 싶어졌다.
“그때부터 주로 PC방에 가서 게임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PC방 요금이 시간당 2000원 정도로 지금보다 비쌌죠. PC방에는 가고 싶은데 어머니가 돈을 주지 않으셔서 결국 어머니 돈을 몰래 훔쳐 PC방에 가기도 했습니다. 처음 게임에 빠져들었던 그때는 정말 게임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죠.”
게임에 빠지다 보니 당연히 학업은 뒷전이었다. 최수범 선수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는 수업시간에 한번도 졸지 않았을 만큼 성실한 학생이었다”며 “그러나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예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게임에만 매달렸다”고 말했다. 가끔씩 게임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학교를 그만둔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다.
최수범 선수와 함께 팀의 기대주로 주목 받고 있는 김근백 선수는 자신은 원래부터 학교 생활에 충실한 학생은 아니었다고 했다.
“학교 끝나면 친구들과 매일 당구장에 갔었죠. 그때는 당구가 너무 좋아 당구를 끊지 못 할 줄 알았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크래프트가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매일 당구장 대신 PC방을 찾았어요. 한창 게임에 빠져서는 수업도 빼먹고 몰래 학교를 빠져 나와 PC방에 간적도 있지요. 그렇게 게임을 하다보니 어느새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나에게 게임을 배우러 오는 친구들도 생기더군요.”
연습생 송병구(18) 선수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다 최근 한남미용정보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게임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합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 제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전학한 학교에서는 송 선수를 취업한 것으로 보고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출석을 인정해주고 있다.
“프로 선수가 된 뒤에도 좋은 성적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손목부상으로 치료에 전념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는 최인규 선수.
학업까지 포기하며 뛰어든 프로게이머 선수 생활이었지만 프로가 된 뒤에도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인규(24) 선수는 임요환, 이윤열 등 국내 최정상 프로게이머를 배출해 '스타플레이어의 등용문’으로 불리는 iTV랭킹전에서 2002년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정상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손목 부상을 당한 뒤로 지금은 치료에 집중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프로게이머들도 일반 스포츠 선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몸 관리가 상당히 중요하죠. 다친 이후로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게임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과 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치료와 연습을 병행했는데 손목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손목 치료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손목만 다 낳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프로 생활을 시작하기 전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며 ‘고수’로 불렸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는 달랐다.
박성훈 선수는 역시 처음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높은 프로의 벽을 실감했다.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상도 여러 번 타서 스스로 꽤나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나 여기 와보니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성적도 잘 나오지 안았고 그야말로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실감했다고 할까요.”
선수들은 프로에 데뷔한 이후로 수없이 많이 져봤지만 ‘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근백 선수는 “게임하다 보면 당연히 질 수도 있다”며 “그러나 지는만큼 또 이기고 싶어지기 때문에 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언뜻 생각해보면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실력 외에도 운도 상당히 많이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게임은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말한다. 선수들을 하나같이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이 실력,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다”
서른살이 넘으면 게임 해설자나 관련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김근백 선수.
이현승 선수는 “게임은 당연히 실력”이라며 “연습을 하다 보면 실력이 느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며 “단지 같은 시간 연습을 했을 때 실력이 많이 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인규 선수 역시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실력”이라며 “그러나 최고가 되려면 열심히 연습한 실력 외에도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게임의 실력은 열심히 하는 만큼 는다고 믿기에 이들은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합숙을 하고 있는 선수들의 기상 시간은 오전 10시나 정오 사이가 보통이다. 그럴만한 것이 이들의 취침시간은 대부분 새벽4-5시기 때문이다. 하루 연습시간이 12시간을 넘는다.
게임에 빠져 여기까지 왔고 또 게임만하며 살고 있지만 이들도 어느 정도 미래가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아직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신생직업인 것이 사실이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선수들은 e 스포츠의 미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선수 생활을 오래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김근백 선수는 30살 즈음에는 게임 해설이나 관련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e스포츠의 생명력은 상당히 길 것으로 봅니다. 사실 처음 게임 시작할 때도 사람들은 1~2년이면 인기 없어진다고 했지만 지금도 인기는 여전하지요. 지금은 게임에만 집중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연봉도 더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30살이 넘어서까지 게임을 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때가 되면 게임 해설자나 게임과 관련된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현승 선수 역시 “아무래도 30살 넘은 아저씨가 게임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을 것 같다”며 “20대 후반쯤에는 게임 해설자가 게임 전문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프로게임단 칸의 목표는 구단 마케팅이 아닌 인재양성”
이번엔 선수들에게 프로게임단 칸에 대해 물었다. 칸은 최근 스타급 선수를 영입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KTF나 SK에 비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김가을 감독은 “스타급 선수를 영입하고 있지 않은 것은 구단의 기본 방침이 기업 마케팅을 목표로 하고 있는 다른 구단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인재양성입니다.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데려와 큰 선수로 키우는 것이지요. 아직까지 다른 팀에 비해서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 최수범 선수와 김근백 선수가 스타리그 8강에 진출한 것처럼 조금씩 성적이 좋아지고 있어 목표를 이뤄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칸에는 스타크래프트 선수들 뿐 아니라 피파와 워크래프트 선수들도 있습니다. 다른 구단은 수입성이 없다고 운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e스포츠 선수를 육성한다는 측면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인규 선수 역시 “한 두명의 스타급 선수가 있다고 반드시 강팀이라고 말할 수 없다”며 “우리 팀에도 가능성 있는 선수들이 많은 만큼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가을 감독 “선수들에게 최대한 자유시간을 많이 주는 편”
현재 프로게임단 감독 중 유일하게 여성이자 프로게이머 출신인 김가을 감독.
프로게임단 칸은 여성 감독이 있는 팀으로도 유명하다. 김가을 감독은 현재 프로게임단 감독 중 유일하게 여성이고 또 유일한 프로게이머 출신 감독이다. 김 감독을 선수시설부터 각종 여성 스타 리그 우승을 독차지해 여성부에선 적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았었다. 김 감독이 팀을 맡은 이후로 성적이 좋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선수들에게 자유시간을 많이 주는 편입니다. 하루 종일 숙소에서 연습만 하는 답답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지요. 게임하는 것도 일일이 간섭을 하기 보다 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주는 수준입니다. 스스로 깨우치며 배워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타급 선수가 없다 보니 일부에서는 ‘칸이 선수 영입에 소극적이다’, ‘선수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밖에서 보기에는 스타급 선수 영입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선수들에 대한 지원도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수 영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수들에 대한 지원도 부족한 것은 아니다”라며 “선수들의 명성에 비해 연봉도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이고 또 다른 구단은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만 인센티브를 지급하지만 우리는 작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도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해가는 칸을 지켜봐달라”
칸 선수들은 삼성 그룹의 20대를 위한 커뮤니티ID 10100 (
http://id10100.samsung.com/)에 ‘20대의 정열’을 가진 주인공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본 네티즌들은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흔하지 않고 또 수명이 비교적 짧은 직업이기 때문에 선택함에 있어 고민이 많았을텐데 게임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어린 나이에도 프로가 될 수 있었다”며 “칸이 아직 다른 구단에 비해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칸 선수들은 와일드카드로 조만간 상 위권에 진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이들을 응원했다.
선수들은 마지막으로 네티즌들에게 “네티즌들은 저희를 웃고 또 울린다”고 말했다. 최수범 선수는 “팬카페 등을 만들어 응원해 줄때는 고맙고 큰 힘이 되지만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심한 욕설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며 “앞으로 더욱 발전해가는 칸을 지켜봐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