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지난 2004년 7월17일 부산 광안리 해변. 아침부터 하나 둘 인파가 몰리기 시작하더니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변을 가득 매웠다.
인기가수의 콘서트? 아니었다. 화려한 조명과 함께 설치된 세트는 대형 스크린과 함께 무대 양쪽에 위치한 투명한 박스 2대였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박스 안에는 컴퓨터 한 대씩이 들어있을 뿐.
무대에서 관중석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관중을 불러들인 이 행사는 일반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이 아니었다. 하나의 스포츠였다. 2004년 젊은이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e스포츠 경기의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축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야구. 같은 시간 부산 사직구장에 벌어진 프로야구 올스타전의 관중은 1만5천여 명에 불과했다.
◆왜 e스포츠에 열광하나
가장 인기있는 프로게이머 임요환(SK텔레콤 T1). 그의 팬카페에는 1월 현재 55만 명에 이르는 회원들이 가입돼 있다. 인기스타 보아(46만 명)나 이효리(37만 명)의 팬카페 회원보다 많은 수치다.
임요환과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리는 홍진호(KTF 매직엔스), 이윤열(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 박정석(KTF 매직엔스) 등 스타 프로게이머의 인기도 이에 못지않다.
온게임넷 '스타크래프트' 리그 경기가 열리는 날, 코엑스 메가 스튜디오는 언제나 관중들로 만원을 이룬다. 주요 경기가 펼쳐지는 날에는 아침부터 자리를 맡으러 오는 팬들도 있고, 결국 입장을 못해 복도에 마련된 TV 화면을 보면서 응원하는 이들의 수도 적지 않다.
프로게이머들은 뼈를 깎는 훈련으로 매 경기마다 기발한 전략과 전술, 그리고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준다. 여기에 전용준과 같은 인기 캐스터는 "일부는 시즈모드 하고, 일부는 퉁퉁 퉁퉁퉁..."이라고 열을 올리며, 경기를 재미있게 해설한다.
과거 일반 모니터에 컴퓨터를 연결해놓았던 게 전부였던 방송중계 시설도 최신식으로 교체된 지 오래다. 조명과 함께 대형 스크린, 다각도에서 촬영하는 카메라, 그리고 경기 및 전략 분석을 위한 자료화면까지, 방송시설은 e스포츠 팬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도록 완비돼 있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게임리그의 후원자로 속속 나서기 시작했다. 직접 프로게임단을 꾸린 기업들은 소속 선수들에게 억대 연봉을 쥐어주고, 스타 게이머로 거듭나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활발한 게임리그의 개최와 기업들의 지원, 그리고 프로게이머들의 화려한 플레이는 물론 철저한 자기관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팬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연예계에서는 소녀팬들을 중심으로 '오빠 언니 부대'가 형성되는 반면, e스포츠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더 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e스포츠의 출생지는 동네 PC방
e스포츠란 단어가 등장하기 전인 지난 90년대 말, PC방 프랜차이즈를 중심으로 게임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 붐'을 타고 전국적으로 PC방이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이용자를 대상으로 이벤트 대회가 개최됐던 것이다.
단순한 이벤트, 게임대회에 불과했던 '스타크래프트' 대회는 오래지 않아 게임리그로 거듭났다. 98년 국내 최초의 게임리그라 할 수 있는 KPGL(Korea ProGame League)을 필두로 배틀탑, 넷클럽, 마스터즈 등 대회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이처럼 e스포츠의 출생지는 바로 동네 PC방이었던 것이다.
지난 2000년에 이르러 프로게임협회(현 한국e스포츠협회)가 출범할 때 당시 박지원 장관이 축사에서 'e스포츠'란 단어를 처음으로 거론했다.
이로써 e스포츠가 게이머들 사이 거론되기 시작했지만, 현재처럼 융성하기에 앞서 혹독한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2000년 들어 KIGL(Korea Internet Game League) 등 3대 프로리그가 정착되면서 e스포츠 시대가 형성되는가 했지만, 수익구조 악화와 사회 인식의 부족으로 도태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21세기 대표 문화콘텐츠로서 가능성 보여
쓰러져가는 e스포츠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케이블 게임채널 온게임넷과 MBC게임의 양대 방송사 리그였다. 본격적으로 '보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e스포츠가 방송 콘텐츠로 각광받게 되면서 프로게이머는 새로운 직업군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방송사를 중심으로 개인 및 팀 리그가 활성화되자 기업들이 후원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게다가 2000년부터 국내 업체가 개최하는 월드사이버게임즈(WCG)가 열리면서 수십개 국의 프로게이머들이 참석, 한국의 e스포츠는 세계로 뻗어나가게 시작했다.
e스포츠가 21세기 대표 콘텐츠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지난 2004년에 이르러서였다.
SK텔레콤과 팬택앤큐리텔 등 대기업들이 임요환과 이윤열 등 걸출한 선수들을 영입해 프로게임단을 창단, e스포츠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2~3년 전만해도 e스포츠가 뭔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기업들이 게임리그를 후원하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기업들이 단순히 가능성만을 보고 e스포츠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니다. 프로게임단의 연간 운영비는 인기 프로스포츠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인 10억~20억원에 불과하지만, 팀 운영으로 인한 마케팅 효과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나타났다.
KTF는 최근 지난 5년간 게임단에 45억원을 투입한 결과 46팔억원 규모에 이르는 마케팅 효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e스포츠 행사 개최 및 KTF 매직엔스가 언론에 노출된 횟수 등을 고려해 얻은 홍보효과를 금액으로 환산한 수치다.
같은 맥락에서 SK텔레콤도 지난 2004년 게임단에 20억원을 투입했고, 150억원에 이르는 마케팅 효과를 얻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e스포츠의 활성화로 이익을 얻은 것은 대기업뿐만은 아니다. e스포츠가 일반인들에 널리 알려지고 프로게이머가 하나의 직종으로 자리잡으면서, 40~50대의 부모세대는 게임이 더 이상 중독과 범죄를 유발하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한국e스포츠협회의 장현영 팀장은 "e스포츠가 '게임'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실어주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국내 게임업체들은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적지 않은 이익을 얻게 된 셈"이라고 말한다.
또한 e스포츠의 향유 계층이 게임업계의 타깃과 일치하는 10~20대에 집중돼 있는 만큼, 업체들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마케팅 통로를 얻게 됐다.
게임방송사는 리그 운영에 따른 수익 외에 방송 콘텐츠를 해외에 수출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게 됐다. 최근 중국에서는 한국의 e스포츠 및 프로게이머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비롯해, 해외 수십 개 국가에서 e스포츠가 활성화되고 있는 만큼 수출전망은 밝다고 하겠다.
◇일반 스포츠와 e스포츠 시청률 비교 (2004.4~5월 케이블 10대 남자) 일자 방송시간 전국 서울 경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A방송리그 평균 0.587 0.626 0.346 0.336 0.012 0.306 0.677
메이저리그 평균 0.323 0.151 0.723 0.136 0.164 0.000 0.327
프로야구 평균 0.150 0.070 0.119 0.037 0.537 0.000 0.427
일자 방송시간 전국 서울 경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A방송리그 평균 0.587 0.626 0.346 0.336 0.012 0.306 0.677
메이저리그 평균 0.323 0.151 0.723 0.136 0.164 0.000 0.327
프로야구 평균 0.150 0.070 0.119 0.037 0.537 0.000 0.427
(2004.4~5월 케이블 20대 남자) 자료:한국e스포츠협회 (메이저리그는 한국선수 선발경기 기준)
◆산업으로 정착이 최대 과제
'광안리에 10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 그래서 국내 게임업체에게 도움 되는 거 있나?'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들에게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e스포츠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게임산업에 기여하는 바는 많지 않다는 얘기다.
실제 국내 e스포츠 리그는 '스타크래프트' 종목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는데다,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임대회도 '워크래프트3', '피파(FIFA)' 시리즈 등 외산 게임을 종목으로 하고 있다.
이들 PC 게임은 상대방과 대전을 기본으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e스포츠의 재료로 적당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온라인 게임들은 대개 상호관계와 집단플레이를 중심으로 하다보니 e스포츠 종목으로 채택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국내에서 PC 게임업체들은 불법복제로 인해 고사직전에 놓인 상황이다.
이렇다보니 막상 e스포츠 대회가 크게 열려도 외산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만 높아질 뿐, 국내 게임업체들은 얻을 것이 거의 없다.
WCG만 해도 '스타크래프트', '카운터스트라이크', '헤일로'를 포함해 8개 정식종목이 모두 외국 게임들이다. 국산 게임은 시범종목으로 1개가 선정되고 있을 뿐.
지난해 'e스포츠 붐'을 타고 각 업체들이 '팡야', '카트라이더', '시티레이서', '스페셜포스' 등 여러 온라인 게임들을 가지고 전국 규모의 대회를 개최하고 방송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정도의 e스포츠 종목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정부나 한국e스포츠협회에서도 e스포츠가 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고, 국내 게임업체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따라 2005년이 'e스포츠 산업화'의 원년이 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는 계획이다.
일단 문화부는 오는 2007년까지 140억원을 투입해 기초 인프라를 조성하는 등 e스포츠가 산업으로 꽃피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특히 2008년에는 e스포츠 전용경기장을 세워 e스포츠 산업의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e스포츠 전용경기장은 경기 진행 및 중계방송의 기능을 갖추고 관람석이 배치되며 게임박물관, B2B B2C 총판, 신작게임 체험관 등으로 꾸며진다. e스포츠와 국내 게임산업이 동시에 커갈 수 있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e스포츠협회는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e스포츠 전용게임을 개발할 예정이다. 보통 게임은 최대한 플레이하기에 재밌게 만드는데 중점을 두지만, e스포츠 전용게임은 '보는 재미'까지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하는 법.
따라서 협회는 '스타크래프트'처럼 '하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 e스포츠 산업의 핵심 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우리 e스포츠 문화와 함께 국산 전용게임을 해외에 널리 알리고 수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한편 국내 게임업체들 사이 e스포츠를 마케팅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고 있으며, 대기업들의 참여 또한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다양한 콘텐츠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e스포츠는 21세기 문화 콘텐츠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e스포츠에 대한 일반인들의 보다 전폭적인 관심과 성원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될 것이다.
/권해주기자 postma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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