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천황을 울린 사나이 최연성은 누구?
‘2004’ 최고의 프로게이머 SK T1 최연성 인터뷰
미디어다음 / 심규진 기자, 사진=정재윤 기자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플레이에 집중하고 있는 최연성 선수. 이날 최선수는 '천적' 이운열 선수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스승 임요환을 울린 ‘괴물’ 최연성은 정말 ‘악당’일까?” 최연성을 인터뷰하는 기자의 머리 속을 내내 맴돌았던 질문이다.
지난 한 해 최연성의 성적은 어마어마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 ‘2004년은 최연성의 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연성은 지난 한 해에만 4차례의 우승을 차지한 ‘그랜드슬래머’다. 특히 중요한 경기마다 호적수들인 ‘5대 천황’을 잡아냈다. 절대 강자의 이미지에다 인기 스타들을 연거푸 패배로 몰아 넣었으니 자연히 안티 팬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최연성을 e스포츠 사상 최고의 ‘악역’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몽상가’ 강민은 MBC 게임 스타리그에서 최연성에게 연거푸 패배하며 장기간의 슬럼프에 빠졌다. 최초의 메이저리그 대회 우승컵을 눈 앞에 두고 ‘폭풍저그’ 홍진호는 신인 최연성에 패해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프리미어리그 결승에서는 ‘천재테란’ 이윤열을, 에버 스타리그 4강에서는 ‘영웅’ 박정석을, 에버 스타리그 결승에서는 ‘스승’ 임요환을 차례로 꺾었다. 이쯤되면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는 ‘지존’이다. 6개월째 프로게이머 랭킹 1위를 고수하며 2위 이윤열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다.
e스포츠 전문지 파이터포럼은 `2004 최고의 프로게이머`로 최연성을 선택했다. 임요환, 이윤열 이후 최강 테란의 계보를 이은 최연성은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제 4종족’ (물량, 콘트롤, 전략을 겸비한 완성형 테란)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순진함 속에 숨겨진 오기
자신만만한 말투는 포커페이스
인터뷰 중 최연성의 핸드폰이 울린다. 기자가 전화부터 받으라고 했더니 “그래도 되나요?”라며 수줍어한다. 의외였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과 때로는 거만함까지 느껴지던 TV 속의 최연성은 온데 간데 없다.
“경기 할 때마다 사실 많이 긴장되고 떨려요. 그런데 절대 안 그런 척, 언제나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은 상대의 심리를 좀 이용해보자는 생각에서죠. 제가 너무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은 기가 꺾이거든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유리하게 이용해야 승리 할 수 있어요. 거만해보이는 말투 때문에 이미지는 좀 깎일 지 몰라도 실리를 얻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
죽여도 죽여도 끝내 살아나는 불사신, 영화의 라스트 신까지 죽지 않고 다시 등장하는 악당의 이미지는 그 스스로 자초한 면이 없지 않은 듯 했다. 엄청난 방어력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무디게 하다 한 번에 몰아쳐서 경기를 끝내는 플레이 스타일도 그런 이미지 형성에 일조한다. 거기에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의 화법은 보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게 사실이다. 에버 스타리그 조 지명식에서 최연성은 “이윤열이 아니면 아무도 두렵지 않다”는 발언으로 다른 프로게이머들을 도발했고, 어쩌다 경기에 진 후 한 인터뷰에서도 “지는 경기는 미리 하는 게 좋다. 우승하려면 계속 이겨야 하니까”라며 넘치는 자신감을 보였다. 스타리그를 앞두고 실시한 설문에서는 모든 질문에 노코멘트 해 거만한다는 인상을 줬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포커 페이스’였다니! 순진한 23살의 청년 최연성은 역시 냉혹한 승부사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선생님과 불화로 학업 중단
군대냐 게임이냐 갈림길에서 프로입문
일찌감치 학업을 중단하고 어린 나이에 프로의 세계로 뛰어든 게이머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21살에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접한 것은 중 3때. 그 후 중독되다시피 게임에만 매달렸단다.
“아버지가 집에서 게임하라고 컴퓨터까지 사주셨는데 정말 꼼짝 않고 스타만 하니까 나중에는 컴퓨터를 집어 던지기까지 하셨어요. ”
상위권을 달리던 성적이 내리막길을 걸은 것도 스타 때문이다. 익산 출신의 그는 비평준화의 마지막 세대로 지역 명문고인 익산 남성고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게임만 하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담임 선생님과도 불화를 겪게 됐다.
“고등학교 때 시험을 아주 잘 본 적이 있었어요. 담임 선생님이 믿을 수 없다고, 부정행위를 한 것 아니냐고 다그치는 거에요. 그러면서 한 번 더 좋은 성적을 보여주면 믿어주겠다는 거에요. 오기가 생겼죠. 그래서 다음 시험 볼 때까지만 죽어라고 공부해서 시험을 봤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냥 게임만하고 공부는 안 했죠.(웃음)”
공부는 뒷전인 채 게임만 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혼이 나고 매를 맞아도 하고 싶은 것은 죽어도 해야 하는 그의 고집과 오기는 꺾이지 않았다.
최고의 선수를 만드는 것은 치열한 승부 근성과 헝그리 정신이듯, 오늘의 최연성을 만든 것도 혹독한 시련이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대학 입학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과의 불화로 학교마저 그만 둔 그에게 남은 선택은 군대와 게임 뿐이었다. 그러나 군복무 후 취직을 하는 것도, 불안정한 게이머 생활에 도전하는 것도 어느 하나 쉬워 보이는 것은 없었다.
“프로게이머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어차피 게임은 운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한다고 안정적인 성적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했거든요. 그런데 문득 오기가 생기더군요. 이렇게 중독될 만큼 게임을 했다면 방송 경기는 한 번 해보고 관두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선뜻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당대의 최고 스타 임요환과 주훈 감독이었다. 배틀넷에서 프로게이머 잡는 초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를 눈 여겨본 주훈 감독이 동양제과팀의 입단을 권유한 것.
프로 입문 후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 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중원을 평정한 무림의 고수’로 그를 기억하지만 2003년의 그는 대회 예선 탈락을 밥 먹 듯 하는, 수 많은 스타 지망생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게임 실력에 대한 회의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그만 둘까’ 고민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련은 2004년의 스타탄생을 위한 담금질에 불과했다.
악당 이미지 개의치 않아,
최연성에게는 팬보다 안티가 더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구름 같은 팬을 몰고 다니는 5대 천황의 ‘천적’이다. 그의 경기는 임요환이나 강민, 홍진호 등 가난하고 기발한 플레이가 보여주는 아슬아슬함이 덜하다. 대신 풍부한 자원에서 터져나오는 블록버스터급 물량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따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선지 그에게는 ‘머슴’, ‘괴물’, ‘뽀록 멀티’ 등 부정적인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성적에 비해 과소 평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정작 그는 “악역이 있으면 착한 주인공도 있고, 주연이 있으면 조연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의연해 한다.
“예전에는 이윤열 선수가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제가 그 이미지를 이어 받은 것 같아요. 악당 이미지나 안티들의 비난은 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다소 거만한 듯 말하는 것도 사실 그래야 보는 사람들도 재미있을 것 아니에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겸손하고 착한 모습만 보여주면 너무 뻔하고 재미없잖아요.”
하지만 ‘최연성의 경기는 물량 밖에 없어 지루하다’. ‘앞마당을 먹지 않으면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다’ ‘콘트롤이나 공격력은 별로인데 수비만 하면서 멀티 시간을 번다 ’는 등의 지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모든 경기에는 전략이 있어요.”
‘몽상가’ 강민은 기습 다크템플러 전략을 위해 ‘배에 힘을 딱 주고’ 테크 트리(공격력이 좋은 유닛을 생산하기 위한 건물 건설)를 올린다. 반면 최연성은 폭발적인 물량을 선보이기 위해 역시 배짱 두둑하게 멀티부터 먹고 시작한다. 자신이 짜온 ‘빌드’(건물 건설 순서)를 주저없이 감행하는 배짱, 상대를 속이면서 시간을 버는 심리전, 소수 물량으로 방어하는 기술 등은 좋은 선수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요소다. ‘전략’과 ‘물량’으로 대변되는, 정 반대의 플레이를 펼치는 두 선수지만 결국 경기 운영을 주도할 수 있는 기본기가 훌륭하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강민의 경기에서는 ‘테크트리’가 전략적 요소라면 최연성의 경기에서는 ‘동시 멀티’가 전략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경기에는 전략이 있어요. 전략이 없는 경기는 없어요.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플레이만이 전략이 아니란 얘기죠. 정석도 전략이고 빠른 멀티도 전략이에요. 병법서에도 보면 매복도 전략이고 삼십육계도 전략이잖아요.”
계속되는 승부의 세계에서 생존해야 하는 프로게이머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답은 일반인보다 ‘안티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에 대한 긴장감이 덜하고 패배했을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거다.
최연성이 강한 이유는 거기에 있는 듯 했다. 긴장과 심리전을 즐기는 여유, 대회 탈락을 ‘휴가 기간’으로 여기는 낙천성까지. 때려도 때려도 지치지 않는 강한 맷집의 소유자 최연성의 전성 시대는 당분간 계속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