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권일 기자, 사진 허태주기자
"와아~!"
지난 8월 7일, 베이징 TV 홍관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한국의 프로게이머 임요환, 홍진호, 박정석, 강민 등이 차례로 소개되며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장내는 온통 열광의 도가니다. 이날은 제1회 WEG(세계 전자 스포츠 게임대회, World E-sports Games)가 개막한 날이다. WEG는 워크래프트 3, 스타크래프트 등 e-스포츠(전자 스포츠) 종목의 한․중 국가대항 정기전.
한국은 '카운터 스트라이크' 종목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종목에서 중국에 압도적인 실력차를 선보이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편 스타크래프트 종목의 중국 대표인 장밍루 선수는 한국의 임요환 선수와의 경기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둔 뒤 "임요환 선수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상이었다"며 감격하기도 했다.
2003년 11월 18일, 중국의 국가체육총국은 '전자오락'을 99번째 국가 정식 스포츠로 결정했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 e-스포츠를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할 것"이라 밝히는 등 국가차원에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e-스포츠 육성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e-스포츠가 가장 활성화된 한국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자오락이라 폄훼되던 컴퓨터게임이 이제 국가 간 자존심을 건 스포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기의 중심에 한국의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있다.
스타리그 규모, '장난'이 아니다
한국 프로게이머의 현황을 보면 2002년 194명으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4년 8월 현재 170 명이다. 프로게이머의 수는 줄어들었지만,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다. 이를 반영하는 가장 극적인 예가 지난 7월 17일 열린 '온게임넷 스카이 프로리그 2004' 대회.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열린 결승전에 무려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는 3만 명이 수용가능한 구장에 불과 1만 6천명의 관중뿐이었다. 시청률(10대 남성 기준)도 스카이 프로리그 결승전이 9.77%로 프로야구 올스타전의 6.32%를 훨씬 웃돌았다. 20대 시청률도 스카이 프로리그 결승전이 10.39%, 올스타전이 11.34%로 거의 비슷했다. 케이블 방송 시청률이 공중파를 위협하는 믿기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프로게이머 수가 가장 많았던 2002년이야말로 프로게임 리그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99년~2001년 당시 벤처기업들이 대거 스타크래프트 리그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배틀탑'과 같은 리그운영 전문 업체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그러나 뚜렷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지 못했던 이 업체는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고, 다른 기업들도 벤처거품이 터지면서 프로게임이라는 산업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게임단을 운영하던 업체가 망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벤처기업이 빠져나간 자리는 온게임넷과 엠비씨게임이라는 양대 케이블 방송이 주관하는 리그가 자리잡았다.
방송사가 주관하는 게임리그가 팀리그 등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스타급 선수들이 속속 출현하자 10대들을 중심으로 스타리그 인기가 다시금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 창단 및 스폰서 역할을 대기업들이 맡기 시작했다. 이미 리그 상금은 10억 원을 훌쩍 넘었다. 문화관광부가 e-스포츠를 정식 스포츠로 인정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는 말도 들려온다
디지털 타임스』의 이택수 기자는 "스타크래프트 리그는 아직도 성장기다. 적은 비용으로 높은 홍보효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대기업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밝혔다.
"'파이터포럼'이라는 리그전문 매체도 생겼다. 그곳에 가면 그야말로 반응이 엄청나다는 걸 체감한다. 선수들 경기결과를 분석한 기사에 달리는 리플이 대부분 수백개, 많게는 수천개에 달한다."
프로게이머의 인기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례는 임요환 선수의 팬클럽 회원 숫자다. 자그마치 50만명. 현재 한국의 어느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도 50만의 팬클럽을 거느리진 못한다. 임요환 선수는 어느새 대중문화의 '거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잘 나가는 게이머들의 연봉 역시 억대를 훌쩍 넘겼다. 현재 연봉 랭킹 1위는 '천재테란'이라는 별명의 이윤열 선수. 팬택&큐리텔로 팀을 옮기면서 연봉 2억이 됐다. 2위는 임요환(SK텔레콤)으로 1억 8천만원. 3위는 1억 3천만원의 강민, 홍진호 선수(둘다 KTF 소속) 2명이다. 특히 임요환 선수는 각종 CF출연에다 이제는 '임요환의 드롭쉽'이라는 피씨방 체인의 '사장님'이기도 하다.
'21세기 소년'들의 보편적 성공신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프로게이머의 길을 선택했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현역 프로게이머로 활동하고 있는 박상익(23) 선수의 말이다. 프로게임단인 'SouL'팀의 주전선수인 그는 "학교라도 졸업하고 하라"는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2001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약사인 아버지는 박상익 선수는 한의사, 그의 형은 의사가 되길 바랐다. 둘째 아들이 스타크래프트 선수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까지 포기한다고 말하니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상익 선수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나서부터는 부모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대회에서 꼭 우승을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옆에 앉은 최석민 코치가 슬며시 끼어든다.
"너 고등학교 때 공부를 썩 잘했다며."
이 말에 박상익 선수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뭐 공부는 좀 하는 편이었는데, 당시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너무 좋았어요. 리그도 활성화되는 시점이기도 했고, 학교공부보다는 뭔가에 도전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어요"라고 설명했다.
기실 스타크래프트 리그 초창기에는 프로게이머로 입문하는 선수들의 스테레오타입은 '가난한 집안의 공부 못하는 소년'이었다. 그런 입지전적 스토리의 대표격이 바로 임요환 선수였다. 그러나 박상익 선수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듯, 스타크래프트는 이제 10대와 20대의 보편적 성공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선수들 간 경쟁이 격화되어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프로게임계 역시 다른 스포츠나 연예계가 거쳐온 과정을 고스란히, 그러나 몇 배 빠른 속도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박상익 선수나 'SouL' 팀은 다른 스타급 선수들이나 팀에 비해 아직 인지도나 인기가 떨어지는 편이라 할 수 있다. 'SK텔레콤 T1'이나 'KTF 매직엔스' 같이 대기업이 운영하는 팀들은 인기 있고 실력있는 선수들을 대거 스카우트해서 각종 대회 성적도 화려하다. 억대 연봉 선수들을 몇 명씩 보유하고있는 팀들이다. 훈련환경도 타 게임단에 비해 월등하게 좋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정규리그에서 활동중인 프로게이머들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한다. 박상익 선수도 자신의 실력이 '잘 나가는' 다른 프로게이머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팀을 지원할 스폰서 기업이 현재 없는 상태이고, 그러다 보니 주전선수들 수도 적어져서 약간 의기소침해 있는 상태. '만일 대기업 스폰서가 있는 팀이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면 이적할 것이냐'라고 묻자, 박상익 선수는 "안 간다"라고 대답했다. 다른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선수들끼리 '감독님과 끝까지 같이 간다'고 결의했다는 것이다. 'SouL'팀은 이러한 끈끈한 팀워크와 솔직담백한 팀컬러 때문에 유달리 '올드 팬'들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로게이머, 팀 간 빈부격차 심각"
억대 연봉을 받지는 못해도 현역선수로 활동하는 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는 그 몇 배에 달하는 '연습생'들이 주전자리를 꿰차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프로팀 연습생도 되지 못한 수많은 소년들이 사발면으로 끼니를 떼우며 '배틀넷'(스타크래프트를 온라인상에서 익명의 유저와 즐길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을 헤매고 있다.
신림동의 어느 주상복합 아파트. 박스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어수선한 분위기다. 세 명의 연습생이 열심히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하고 있다. 여기저기 음료수 페트병이 나뒹굴고 있고, 다들 '츄리닝' 차림의 부스스한 모습이다.
"어, 오셨어요?"
반갑게 맞아주는 이는 프로게임팀 '한빛스타즈'의 이재균 감독이다. 그는 집이 지저분하다며 미안해한다. 한빛 팀은 조만간 이사를 할 예정이다.
"저희가 원래 새벽에 주로 훈련하고 낮이 되어야 일어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이웃들이 곱지 않게 봐요. 항의도 자주 들어오고 욕도 많이 먹습니다. 프로게임팀이라고 하면 백안시하는 면도 좀 있는 것 같구요.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오피스텔로 숙소를 옮길 작정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게임이 좋아서, 그리고 선수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게임판에 뛰어들었다는 이재균 감독. 그러나 이제는 '장가도 못 가고' 프로게임계라는 판의 전체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여러 고민 가운데 그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선수들의 군입대 문제다.
"프로게이머가 워낙 평균연령이 어려요. 하지만 전성기가 짧다는 것에는 군대문제가 가장 큽니다. 군대에 가면 감각이 죽어버려요. 군대 갔다 오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도저히 못이깁니다. 요즘 신인들 게임하는 것 보면 완전히 기계예요, 기계."
군대문제는 이 감독뿐 아니라 모든 감독들의 딜레마다. 군대에 다녀와서 '재기'에 성공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무턱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돌려보내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군입대 이전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오'가 된 소수의 아마추어들은 철저한 실력검증 뒤에 팀에 입단하게 된다. 올해 스무 살인 박영민씨도 그렇게 해서 한빛팀의 연습생으로 들어왔다. 그는 "박정석 선수를 가장 존경한다"면서" “프로게이머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했다. 연습생이 언급한 박정석 선수는 한빛 출신의 '스타'급 프로게이머인데, KTF로 이적했다. 한빛 팀은 요즘 에이스급 선수가 없어 각종 대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구단들 사이의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어린 선수들이 경기 전부터 벌써 주눅이 든다며 이 감독은 걱정스런 표정이다. 잘하는 선수가 돈 많이 버는 것을 탓할 까닭은 없지만, 리그가 장기적으로 발전하려면 전체 선수들에게 최소한의 의식주와 휴식, 그리고 '품위유지'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이 감독의 지론이다.
협회 통한 체계적인 운영 절실
스타크래프트 리그는 아직 한국에서는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다. 시장은 커졌으되, 제도적인 면은 미비한 것이다. 양대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대회를 유치하다 보니 어린 선수들은 쉴 틈도 없이 1년 내내 혹사당한다. 감독이나 구단과 선수 사이에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선수들이 일방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다. 프로게이머협의회의 김은동 회장(그는 'SouL'팀의 감독이기도 하다)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작년에 방송사들과 선수들에게 1년 중 특정기간(3월과 10월)은 휴식기간을 주자고 합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올해 들어 합의를 모른 체하고 리그를 강행해서 우리와 마찰이 있었다. 방송사들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대기업 스폰서를 따오다 보니 일정을 무리하게 진행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협회나 선수들이 대기업이나 방송사들에 의해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지난 8월 31일, 방송사와 협의회가 만나 소위 '대타협'을 한 것은 이런 부분들을 서로 양보하고 합의한 것이었다."
이번 '대타협'에는 양대 방송사 경기 맵을 통합하는 안도 들어 있었다. 맵은 글자 그대로 경기가 펼쳐지는 경기장인데, 스타크래프트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게임이므로 지형이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방송사마다 다른 맵을 자인해서 대회를 치르다 보니 그에 대비하려면 선수들은 그만큼 힘들어진다.
▲ 황형준 국장
온게임넷 황형준 편성국장은 "맵은 대회의 개성을 드러내는 주요 장치인데, 통합해버리면 그만큼 팬들 입장에서는 재미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황 국장은 선수보호라는 협의회의 취지에는 적극 공감했다. 온게임넷에서 스타리그 해설을 하고 있는 김창선 해설위원은 방송사 중심의 리그운영에서 게이머협의회가 좀더 목소리를 높이고 균형을 잡아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실수하거나 눈 밖에 나면 선수들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풍조가 있다. 그런 일들은 없어져야 할 것"이라 일침을 놓았다. '유명 프로게임팀 감독이 선수들을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이냐'라고 기자가 묻자 김 해설위원은 "과거에 그런 일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감독도 선수에게 배트를 쥐어주고 똑같이 맞았다. 팀 분위기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하지만,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스타크래프트는 국민스포츠"
또 하나 문제점은 대기업들의 스폰서십에 리그가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스타리그 전체가 몇몇 자본에 휘둘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프로스포츠에 비해 투하자본이 적은 e-스포츠의 특성을 상기해볼 때 대기업이 참여하는 순간부터 이미 스타리그는 극단적 자본종속의 운명에 처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SK텔레콤이 프로팀을 창단한 뒤 이동통신사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우려는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또한 프로게이머협의회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게이머가 아닌 감독들이 활동하고 있다. 프로게이머협의회가 아니라 감독협의회인 것. 향후 리그의 덩치가 더욱 커질 경우 이는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기자가 만나본 선수들은 모두 "감독들에게 믿고 맡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제도화하지 않고 인간적인 신뢰에만 맡겼다가는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런 제도적 허점들을 방치할 경우, 몇 년 전 프로야구의 선수협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란 법이 없는 것이다.
지난 9월 4일 프로리그가 펼쳐진 코엑스 메가 스튜디오에는 발디딜 틈 없이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최대의 라이벌 팀인 SK와 KTF가 팀 대결을 펼치는 날이다. 경기가 열리는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응원도구들을 들고 몰려오는 여학생들이 "강민 파이팅" "박용욱 파이팅"을 외친다. 어린 학생들이 많았지만, 대학생으로 보이는 팬들도 상당수다. 특히 30대 직장인들이 눈길을 끈다. 고양시에서 경기를 보기 위해 왔다는 정우식씨(34)는 '팬 치고는 나이가 지긋하다'고 기자가 농을 걸자 "마흔 먹은 우리 큰형도 스타(크래프트)한다.
스타크래프트는 이미 국민스포츠"라고 받아쳤다. 일세를 풍미하던 프로스포츠들이 침체기에 빠진 요즘이다. 특히 프로야구는 병역비리로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한다. 반면 스타리그는 이렇게 젊은 세대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경기가 시작되고 10분 여, 어느 선수가 절묘한 컨트롤로 상대편 유닛을 모조리 잡아내자 장내는 갈채와 환호로 떠나갈 듯하다. 흥분한 정우식씨가 기자를 돌아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것 좀 보세요. 피가 끓지 않습니까?"
"스타리그는 스포츠이자 엔터테인먼트"
인터뷰_ 온게임넷 황형준 편성국장
프로게이머라는 신종직업을 낳은 스타리그.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새로운 시장을 처음 개척해 낸 사람이 있다. 바로 온게임넷의 황형준 국장이다. 그는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결국 옳았음을 증명해 냈다. 세계 최초의 게임전문 케이블채널로서 온게임넷이 생겨나고 여전히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황 국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잡은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사실 게임리그라는 게 도대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황 국장이 1999년 애니메이션 전문 케이블 채널인 투니버스에서 처음 선보인 스타크래프트 경기 중계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게임을 피씨방에서 단순히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브라운관을 통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이 벌이는 곡예에 가까운 플레이들을 '보는' 재미를 선사했던 것이다.
세계최초의 게임중계, 그 험난한 과정
-어떻게 스타크래프트를 중계방송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원래 나는 투니버스에서 애니메이션 기획파트에 있었다. 그런데 1997년 IMF사태가 터지자 다른 회사들처럼 투니버스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여러 사업들이 사라졌고, 내가 속했던 사업팀도 날아가 버렸다. 직장에서 당장 잘리진 않았지만, 정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회사에 나와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선배랑 구석에 가서 몰래 게임을 하며 소일했다. 1998년에는 알다시피 프랑스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던 축구시뮬레이션게임인 '월드컵 98'이 출시된 상태였다. 선배와 나는 만약 그날 한국과 네덜란드가 붙는다고 하면 각자 해당 팀을 선택해서 일 대 일 대결을 벌이곤 했다. 하다 보니까 게임이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데 감탄했다. 그래서 실제로 캐스터와 해설자를 붙여서 중계를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디어는 결국 '예측! 98 사이버 프랑스월드컵'이란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실제 월드컵 경기의 대진표에 맞춰서 총 16경기를 가상으로 중계방송하게 됐다."
-반응이 어땠나
"의외로 반응들이 좋았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그 16경기 중 12경기의 승패를 맞춰버렸다는 점이었다. 게임을 통해 반은 장난삼아 해본 경기예측이었는데, 놀라운 적중률을 보인 것이다. 시청자들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돌릴 게 아니라 실제로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게 어떨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 갓 출시된 게임 중에서 축구게임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인기게임이 있었다.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대회도 가능하고 중계도 가능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중계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중계진부터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막막했다. 그런데 정말 일이 풀리려고 그랬는지, 해설을 맡길 만한 사람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도 온게임넷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엄재경씨였다. 그는 원래 만화 시나리오 작가다. 다른 일로 종종 만나서 같이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얘기를 나눠 보니 이 사람이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상당히 해박했고 엄청난 달변이었다. 속으로 '완전 하일성이구나' 했다. 그리고 캐스터와 다른 해설자 한 명도 영입해서 중계진을 꾸렸다. "
-대회를 치르려면 스폰서를 구해야 하는데, 만만찮았을 듯하다.
"그렇다. 가장 힘들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2000년 초 하나로통신배 스타리그를 준비할 때였다. IMF의 여파가 남아서 회사에서 거의 지원도 없는 상황이었고, 스폰서를 따기 위해 직접 서른 군데가 넘는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기업에서 결정권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40~50대다 보니 설득은 고사하고 이해시키기조차 힘들었다. 방송 들어가기 일주일 전까지도 스폰서를 못 잡았다.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하나로통신의 상무님한테 일주일간 매달렸다. 그분은 60대였고 사실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는 세대다. 하지만 젊은 놈이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데 감동했는지, 결국 방송 4일 전에 스폰서로 결정이 되었다."
"스타리그 인기는 지속될 것"
-6년 정도 스타리그를 이끌어 오면서 가장 위기라고 느꼈을 때는 언제였는가
"2003년이 위기였다. 스타리그가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었는데, 작년에는 관중 수가 줄어드는 것을 체감했다. 타 게임채널이 생긴 탓도 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 중계가 신비스럽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상황을 돌파하게 된 것이 '팀 체제'였다. 프로게이머들 개인이 일 대 일로 경기하던 방식에서 프로야구처럼 팀끼리 대결하는 구도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서울에만 집중되던 경기들을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지역팬들의 호응이 폭발적이었다."
-'e-스포츠협회'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사회에서는 게임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공고하다. 실제로 프로게이머들 대부분이 10대에서 20대 초반이고 팬층도 젊은 층에 너무 한정되어 있다는 지적도 많다.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 아닌가.
"스타크래프트는 멘탈스포츠다. 육체운동은 25세에서 35세가 절정기이지만, e-스포츠는 15세에서 25세가 절정인 것 같다. 가장 집중력이 강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젊다 보니까 소위 '오빠부대'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여전히 20대~30대 팬들도 많다. 프로게이머를 나는 스포츠맨과 엔터테이너를 결합해 '스포테이너'로 부르고 싶다. 하나의 새로운 대중문화이고, 대중들이 건전하게 즐길 만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중국이 e-스포츠를 99번째 스포츠로 지정했다고 들었다. 한국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향후에도 계속될 거라고 보는가
"얼마나 갈 것이냐는 질문을 매년 받는다(웃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본다. 정답이 없다. 프로스포츠가 성공하려면 팬(fan), 머니(money), 스타(star)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지금 프로씨름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말로 프로스포츠의 위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프로야구는 정말 '프로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었지만,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고 투자가 안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스타리그는 아직까지 3박자가 맞아떨어지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는 나 자신도 모르지만, 지금은 매우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