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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6/15 13:26:39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5
Subject [일반] 도둑질 고치기 上편 (에세이)
도둑질 고치기 (上편)
- 뽑기를 하고 맞은 것



꿈이의 아빠가 되면서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종종 떠올리게 된다. 1980년대에 유아기를, 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나는 장사하는 여느 집의 맏이와 마찬가지로 동생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에게 할당된 돈은 보통 100원. 그마저도 쉬이 얻어지는 동전은 아니었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가게 안 깊숙이 엄마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쉽게 갈 수 없는 신체였다. 가뜩이나 바쁜 상황에서 나는 거치적거리는 존재였고, 자칫 화를 돋게 할 수 있었다.



가게의 입구에서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다 보면, 우리를 본 손님이 부모님께 알리고 그러면 100원이 나왔다. 물론 모든 손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고, 또 우리의 인내심도 태공망 같지는 않았기에 한 번씩 가게 안으로 진출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와 들어와서 걸리 적 거리노! 나가 있어라!”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어필이 화를 돋우긴 해도 동전이 나오는 시간을 단축시키긴 했다. “엄마, 100원만!”



100원을 얻은 우리는 문방구를 가거나 슈퍼마켓을 가곤 했다. 가끔 과일 집 아들내미가 오락실을 가자고도 했는데, 나는 그런 험한 곳은 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렇게 배웠고, 정말 과일 집 아들내미는 거기서 돈을 빌리지만 갚지 않는 형들에게 상납을 당하곤 했다. 나와 동생은 안전한 뽑기 집에 갔다.



과일과 잡동사니를 팔던 그 가게에는 뽑기 기계가 있었는데, 50원을 넣으면 막대 종이가 한 장 나왔다. 막대 종이를 구부리면 그 안에 숫자가 나오는데 대개는 ‘꽝’이었고, 가끔 50원짜리 바나나빵이, 1년에 한두 번쯤 오리 인형이 나왔다. 1등이 나오면 드래곤볼 게임기를 준다고 쓰여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는 그걸 받은 사람이 없었고, 다른 동네에서는 그 뽑기를 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게임기는 전설의 용신과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나는 드래곤볼의 신봉자였기에 그 볼이 그려진 뽑기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바나나빵도 맛있었다. 무엇보다 동네 형님들이 출몰하지 않는 안전 구역이었다. 그랬는데, 그날은 오락실보다 더 위험한 곳이 되었다. 모래에 떨어뜨린 사탕을 집어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을 한 탓이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날도 나와 동생은 인내 끝에 얻은 100원을 뽑기의 막대 종이 두 장과 교환했다. 하나를 구부려보니 어김없이 ‘꽝’이었다. ‘제발, 바나나빵이라도!’ 하지만 그날도 대개의 그날이었기에 나머지 막대도 어김없이 ‘꽝!’ “오빠, 이럴거면 차라리 오락실 행님한테 상납하는 게 낫겠다!”라고 동생은 말하지 않았다. 세상 착한 동생이었다. 내가 죽일 놈이지 뭐.



여하튼 탕진잼은 재미없었고, 우리는 망연자실하며 뽑기 옆에 앉아 세월을 낚는 어부가 됐다. 그러고 있으니 대개의 동네 아이들이 와서 대개의 날들을 보내며 ‘꽝’을 뽑았다. 그렇고 그런 대개의 날이었고, 우리는 어쩔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한 형아가 왔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모습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아니, 하얀 티셔츠였는데, 노랗게 변했던 것이었나? 그 형아도 100원으로 두 개의 막대 종이를 뽑았는데, 하나가 문제였다. 그 막대는 하얗지가 않았고, 뭔가 노랗게 보였는데, 세상에, 진짜가 나타났다! 꺾인 종이는 오리의 주둥이가 되어 꽉꽉 댔다. 뽑기 아저씨는 놀란 눈을 하며 몇 번이나 확인했고, 종국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봉지에서 오리를 꺼냈다. 그 샛노란 오리의 빛깔은 눈부셔서 손오공이 초사이어인이 될 때의 머리 같았다. 노래진 형은 오리 궁둥이를 흔들며 떠났다. 그러고 나니 다시 세상은 잿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랬는데, 어라? 저게 뭐야!



때깔부터 다른 그 당첨 막대를 아저씨는 회수통에 넣지 않고 바닥에 던졌다. 우리는 세월을 낚는 어부에서 악마의 열매를 낚은 죄인으로 전락한다. 아저씨는 물건을 들이기 위해 창고로 갔고, 동시에 나의 손가락은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이 되어 노란 막대를 사냥했다. 떨어져 있던 막대 주위에 개미 몇 마리가 돌고 있었지만, 나의 하강은 성공적이었다. 돌아온 아저씨에게 맹수의 손을 내밀어 노란 새를 달라고 했다. 그랬는데, 그는 그 아저씨가 아니었다. 몰랐다. 그분이 공의와 정의의 심판관이었는지. 말씀하셨다.



“개놈의 자식이네?”



세상의 타락을 우려했던 심판관은 개놈의 자식이 있다며 외치기 시작했고, 그 개놈의 어미가 동네방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불려왔다. 동네에서 우리는 그 장사치의 자식이라는 표식이 있었고, 장사에 치여 살면서도 바르게 자라길 바랐던 엄마는 그날 우리를 개잡듯 잡았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잡아서는 안 된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 개에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리라. 그러나 그 시절엔 그렇게 잡는 것이 바르게 잡는 것이라 생각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심각성은 그렇게 먼지가 개같이 날렸는데도 한 해 뒤에 그 짓을 반복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바닥에 버려진 뽑기를 주웠을 때는 일이 이렇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버렸던 것을 그저 주웠을 뿐이었다. 물론 그 막대를 줬을 때의 조마조마함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뭔가 좋지 않은, 이상 할 수 있는, 그런 짓이라고는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악질적인 도둑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저지른 반복은 투명한 도둑질이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도 자행하게 된다. 나의 전전두엽은 미숙했고, 유년기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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