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12/27 03:03:45
Name firebat
Subject [일반] 깨진 컵과 킨츠쿠로이 (수정됨)
가끔 그릇이나 컵을 깨뜨립니다. 설거지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때가 있더라고요.
아끼던 컵을 실수로 깨뜨렸다가 너무 아쉬워서 구매한 지 몇 년이나 된 걸 똑같은 제품이 있을까 싶어 한참이나 인터넷을 뒤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산산조각이 난 경우에는 힘들겠지만, 두 동강 난 컵을 바로 집어 들어 손에 들고 맞춰보면 깨진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들어맞습니다.
아마 그때 접착제로 잘 붙이면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조각들 사이의 미세한 틈을 접착제로 잘 메꿔준다면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깨진 단면이 점점 무뎌지고 모양이 바뀌어 잘 맞던 아귀에 빈틈이 생깁니다.
가장 강력한 접착제를 써서 억지로 붙여놓아도 전체 구조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조금 쓰다 보면 금방 같은 곳이 갈라져 떨어져 나가기 십상입니다.

사실 이 글은 이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에 서로가 금방 잘못을 깨닫고 화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이별의 아픔은 화해의 기쁨으로 금세 덮여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호호 지내는 겁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봉합된 자국은 추억이 담긴 이야깃거리가 되고요.

하지만 이별 뒤에 바로 화해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서진 단면이 채워지고 무뎌지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별한 연인들이 화해하고 다시 사귀는 건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맞춰보려 해도 잘 맞지 않거든요.
억지로 만남을 이어간다 해도 이전에 헤어졌던 이유와 똑같은 이유로 다투다가 또다시 파국을 맞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뎌진 단면만큼 이별의 아픔이나 후회도 많이 줄어들겠고요.

다시 깨진 그릇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일본에 '킨츠쿠로이'라는 공예가 있다고 합니다.
깨진 도자기 그릇을 옻칠을 해 다시 조립하고 접합된 부분에 금가루를 붙여 복원한다고 하는데요,
깨진 부분을 오히려 예술로 승화시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미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1065306633

사실 이 글은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저는 최근에 여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저는 그동안 말로만 행복을 찾으면서 바로 눈앞에 있는 파랑새를 몰라보았고, 무기력의 우물에 빠져 혼자 웅크리고 있는 저의 모습에 지친 여자친구가 결국 떠나버렸죠.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지만,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마음을 굳힌 후였습니다.

4년을 만났고, 이렇게 좋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녀에게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력을 들여 다시 하나로 만들만한 훌륭한 그릇- 아니, 커플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녀가 저에게 돌아올 그 날, 그녀와 저는 다시 하나가 되어 깨졌던 부분을 황금색으로 멋지게 메우고 전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행복을 누릴 겁니다. 그렇게 다짐했어요. 그걸 위해 열심히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갑갑한 우물 속에서 나오려고요. 거의 써본 적 없는 공개된 게시판에서의 이 글이 그 첫걸음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미고띠
22/12/27 08:47
수정 아이콘
멋진 킨츠쿠로이로 재탄하시길
22/12/27 10:3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파프리카
22/12/27 12:31
수정 아이콘
멋있으십니다! 응원드립니다!
22/12/27 13:54
수정 아이콘
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Hammuzzi
22/12/27 17:32
수정 아이콘
응원드려요. 잘 되실겁니다!
22/12/27 23:14
수정 아이콘
정말 감사드립니다.
22/12/29 01:06
수정 아이콘
ㅠㅠ
22/12/29 09:03
수정 아이콘
ㅠ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7575 [일반] 돌아온 ‘염전노예’ 오빠의 첫마디… “니, 대학은 졸업했나” [109] 서브탱크18545 22/12/31 18545 21
97539 [일반] 뒤늦게 써 보는 배달인으로 오해 받은 썰 [81] 지니팅커벨여행13565 22/12/27 13565 3
97533 [일반] 깨진 컵과 킨츠쿠로이 [8] firebat8001 22/12/27 8001 12
97528 [일반] 재벌집 막내아들. 실패한 결말. 그리고 의외의 희망. [148] Taima20572 22/12/26 20572 21
97519 [일반] 쓰라린 마음 [10] Red Key7743 22/12/25 7743 14
97505 [일반] 교육에 대한 개인적인 철학 몇 개 [23] 토루7844 22/12/23 7844 22
97503 [일반] 이대로 괜찮을까. [38] aDayInTheLife14247 22/12/23 14247 5
97497 [일반] [넋두리] 심각한 슬럼프가 왔습니다. [57] 카즈하13038 22/12/22 13038 31
97491 [일반] 배려왕 [13] jerrys7728 22/12/21 7728 10
97484 [일반] 아바타2 - 놀랍지도, 설레이지도 않아(약스포) [50] v.Serum9823 22/12/21 9823 6
97457 [일반] [더러움 주의/뻘글 주의] 겨울철 나를 괴롭히는 것 [9] TAEYEON8496 22/12/17 8496 7
97428 [일반] 겨울철 노벨상 후보들 / 난방기기들의 역사 [23] Fig.114812 22/12/14 14812 12
97413 [일반] [풀스포] 사펑: 엣지러너, 친절한 2부짜리 비극 [43] Farce11708 22/12/13 11708 19
97400 [일반] [성경이야기]삼손과 들릴라 [9] BK_Zju10112 22/12/12 10112 18
97363 [일반] 나는 안걸릴 줄 알았는데... [37] EZrock11549 22/12/08 11549 2
97362 [일반] 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벗어나기 [14] 나는모른다11652 22/12/08 11652 19
97359 [일반] 고백: '써야지 리스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1] Farce8997 22/12/08 8997 9
97358 [일반] "저렴한" RTX 4060/4060 Ti는 2023년 9~10월 계획으로 알려짐 [35] SAS Tony Parker 12300 22/12/08 12300 0
97354 [일반] [일상글] 나홀로 결혼기념일 보낸이야기 [37] Hammuzzi9229 22/12/08 9229 28
97351 [일반] 이무진의 신호등을 오케스트라로 만들어 봤습니다. [21] 포졸작곡가9244 22/12/08 9244 16
97348 [일반]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성경적인가. [140] Taima15013 22/12/07 15013 15
97333 [일반] 노동권이 한국사회를 말아먹는 메커니즘(feat 출산율) [148] darkhero17114 22/12/06 17114 36
97317 [일반] [창작물] 천마들의 회동 < 각 내용의 스포 주의! > [4] 마신_이천상10095 22/12/04 10095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