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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0/29 23:11:13
Name abc초콜릿
Subject [일반] [스포]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다시 한번 돌아왔습니다
소설 원작과 세 개의 영화를 비교분석 하기 위해서 작품들의 전개와 결말을 전부 서술 하였습니다. 스포일러가 딱히 중요한 작품은 아니지만 이런 것에 민감하신 분들은 소설과 영화를 감상 하신 후에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1929년에 출판 되어 18개월만에 22개국에 번역 되어 250만부가 팔린 걸작이 되었고 1930년에 이를 원작으로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여 마찬가지로 걸작으로 등극한 바 있었던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 되어 어제인 10월 28일에 개봉 했습니다.

이 작품이 전쟁 문학에서 가지는 위상이 하도 높은 지라 이후로도 1979년에 TV 영화로 한번 리메이크 된 바 있었고 2012년, 2016년에도 리메이크를 제작할 기획이 있었는데 번번히 넘어가서 그냥 끝났는 줄 알았더니 이번엔 레마르크의 조국인 독일에서 영화를 제작 했습니다.

소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나 레마르크, 그리고 당시 독일 사회나 레마르크와 반대 위치에 있었던 또다른 걸작인 "강철의 폭풍 속에서"를 쓴 에른스트 윙어와의 비교는 나무위키에도 잘 서술 되어 있으니 그 부분은 빼겠습니다.


위에서도 썼지만 이번 작이 특별한 이유는 1930년, 1979년에 제작한 영화는 모두 미국에서 제작 하였지만 이번엔 작중 인물들과 동일 국적인 독일인들이 독일어를 쓰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1차대전을 직접적으로 겪었던 독일인이랑 전쟁 막바지에 참전 했고 경험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미국인과의 감성 차도 있을 것이고 해당 시기가 독일군도 연패도지 하는 매우 절망적이었던 시기이기에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를 제작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작들과 이번 작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동시에 제작진은 이미 앞서서 제작된 두 개의 작품에서 이미 원작에서의 주제의식이 충분히 표현 되었다 생각한 것인지 어떻게 보면 원작 파괴에 가까울 수준의 파격적인 각색을 감행 하였습니다.

레마르크의 소설은 전쟁에 던져진 한 병사의 시점에서 모든 것들이 표현 되기 때문에 주인공인 '파울 보이머'의 시점을 철저히 따라갑니다. 원작에서 시점이 바뀌는 장면은 마지막의 한 페이지 정도의 후일담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모든 전개는 파울이 직접 겪은 일이나 들은 것들을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 되지 파울이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체 묘사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1930년과 1979년에 제작된 두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 되어 영화의 시점과 전개는 철저히 주인공 파울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세 명의 시선에서 극이 전개 됩니다.

1. 주인공 파울 보이머
2. 파울이 소속된 연대의 지휘관 프리드리히 장군(극중에서는 이름이 안 나옴)
3. 1918년 11월 콩피에뉴에서의 강화 협상을 진행 했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영화는 이렇게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 되면서 전개 되는데 1918년 11월의 강화협상을 넣기 위해서 시간적 배경도 원작과 달라졌습니다.

원작 소설에서의 사건들은 대체적으로 1916~1917년에 벌어진 일이며 1918년의 일은 마지막의 11, 12장 뿐이고 그마저도 11장은 여름에 회상하는 내용, 12장은 종전이 임박한 10월의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 파울 보이머가 입대하는 것을 1917년 봄으로 늦췄으며(원작에선 1915년 말 즈음으로 추측) 파울이 죽는 것도 전쟁의 마지막 날인 1918년 11월 11일로 변경 되었습니다.(원작에서는 1918년 10월)


동시에 등장인물들도 대폭 변경 되었습니다. 원작에서는 파울 보이머가 담임 교사 칸토렉의 선동에 빠져 학급의 20명이 다 함께 자원입대를 하였다는 설정이고 이들이 전부 묘사 되지는 않지만 파울이 대전 말까지 살아남은 케이스이므로 파울이 주워들은 내용으로라도 상당수가 운명이 언급이 됩니다만 영화에서는 파울과 함께하는 친구들이 딱 3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들도 변화가 있습니다만 원작에선 아예 등장하지 않는 다른 주인공인 프리드리히 장군과 에르츠베르거를 먼저 살펴 봅시다.

전쟁 영웅인 아버지를 찬미하며 전쟁이 없는 벨 에포크 시대를 싫어하는 연대 지휘관 프리드리히 장군은 당시의 군대의 속칭 '높으신 분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센 융커를 대표하는 듯한 프리드리히 장군에게 있어서 독일제국(Kaiserriech)과 전쟁은 무엇인지, 동시에 나라를 들어엎으려는 사회민주당의 소위 '빨갱이'들이 융커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통신으로 공격을 명령하고 전투 중에 전선에서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멀리 떨어진 사령부(본인의 저택에 사령부를 차린 것으로 보임)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영화의 제목처럼 "서부전선에 새로운 소식 없음"이라는 보고가 들려오는 동안에도 전선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정작 프리드리히의 부관인 브릭스도르프 소령은 프로이센 군국주의나 전쟁에 썩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브릭스도르프는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운영하는 승마기구 공장을 잇겠다고 하는 등 프로이센 융커보다는 오히려 그 융커들을 혐오 했던 서독의 부르주아를 연상 시킵니다.

실존인물인 에르츠베르거는 협상국과의 강화협상을 주도하는 인물로 본인도 전사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협상국의 강압적인 요구에 "이게 무슨 강화 협상이냐, 이건 무조건 항복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펄쩍 뛰는 군인들을 상대로 "이미 무기도 식량도 없고, 협상군은 매달 미군 25만명이 증원되는 상황인데 왜 아직도 전쟁이 안 끝났느냐, 군인들의 헛된 자존심 때문에 애먼 사람들만 죽는 것이다. 우리가 버텨봐야 몇십만이 더 죽고 무조건 항복하는 것 뿐이다"라고 전면에서 반박합니다. 그나마 에르츠베르거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 애를 쓰지만 상대방도 거기에 넘어가 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협상국측의 대표로 나왔던 사람들도 모두 실존인물로 협상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모리스 가믈랭, 영국의 로슬린 웨미스 경, 조지 호프 제독인데 제대로 된 대사가 있는 인물은 포슈 원수 뿐입니다.

에르츠베르거는 협상을 위해 72시간 동안 전투를 멈춰달라는 말을 꺼내지만 포슈는 "당신들에게 72시간을 줄 테니 우리 조건을 전부 수용하라. 협상은 없고 서명할 때까지 전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최후통첩만을 날립니다. 에르츠베르거가 이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72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라고 애원해보지만 펜을 주면서 "그럼 서명하시오"라고 긴 말이나 미사여구 따윈 하나도 안 붙이고 에르츠베르거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협상국 측 대표단에서 유일하게 대사가 있지만 그렇다고 대사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 정치인인 에르츠베르거의 의도에 넘어가기는 커녕 짧은 몇몇 대사 만으로 에르츠베르거를 압도하고 협상국의 요구를 관철해내는 가히 프랑스의 구국영웅다운 카리스마를 그 짧은 시간동안 여실히 보여줍니다. 동시에 베르사유 조약을 두고서 "이렇게 관대한 조약이라니! 이건 20년 짜리 휴전조약에 불과하다"라고 하고 평가할 정도의 대독강경파였던 역사적 인물 포슈의 면모를 보여주기에도 충분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포슈의 포지션과 대사는 마찬가지로 독일의 패전을 다룬 "몰락(Der Untergang)"에서 시간을 벌려고 독일 측 대표 한스 크렙스가 이런 저런 말을 꺼내보지만 소련 측 대표로서 회담하는 추이코프가 "무조건 항복, 협상은 없다"라고 하는 장면을 연상 시킵니다.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파울이 알 수도 없었을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은 파울과 주변의 등장인물입니다.

위에서 썼듯이 파울의 20여명의 급우들은 언급도 되지 않고 파울의 친구로서 딱 3명만 나옵니다.

프란츠 뮐러, 루트비히 벰, 알베르트 크로프. 이렇게 셋만 나오는데 뮐러와 벰은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각각 프리드리히와 요제프입니다.

프란츠 뮐러는 마지막까지 겨우 겨우 살아남아 초반부의 전개와 유사하게 수미상관을 이루며 끝나게 되는데 이 전개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원작의 프리드리히 뮐러는 1장에서 죽는 급우 프란츠 켐머리히의 부츠를 이어 받은 후, 본인도 죽어 주인이 파울로 넘어가고 언급이 없습니다. 1930년판 영화에서는 부츠가 주인을 여러번 바꾸는 장면을 짤막하게 편집하여 보여줌으로서 그 사이에 많은 급우들이 또 죽어나갔음을 묘사 했었습니다.

루트비히 벰은 원작과 비슷하게 함께 지원한 급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죽는 포지션입니다. 원작에서는 파울이 벰과 딱히 친했다는 묘사가 없고 벰에 대한 묘사도 "벰이 제일 먼저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끝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유약한 인물이고 파울과 절친한 것으로 나와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하는 거야 파울"이라는 대사도 남기지만 그게 마지막 대사입니다. 1930년판 영화에서도 가장 먼저 죽는 것으로 끝나고 특별히 친했다는 묘사는 없습니다.

알베르트 크로프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나마 짤리지 않은 급우들 중에서 이름도 안 바뀌고 그대로 출연했는데 중반의 전투 때 몰려오는 프랑스군에게 투항하려다가 프랑스군이 화염방사기로 지져버리면서 파울이 보는 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원작에서는 1917년말 플랑드르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하고서 충격으로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이후 병원에서 다른 부상병들과 지내며 정신적으로 회복했다는 묘사가 나왔습니다. 1979년판 영화에서는 뭐 필요한 거 없냐는 파울의 질문에 "총"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후 파울은 회복되고 전선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파울이 아버지처럼 따르는 고참병, '캇'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슈타니슬라우스 카진스키는 이전에 나온 두 영화에서는 풍채 좋은 능글능글한 아저씨로 나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말쑥하게 등장해서 보는 내내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카진스키의 경우에는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변경이 가장 적은 편입니다.

설정이 변경되어 카진스키와 비슷한 급의 고참병으로 조정된 탸덴은 원래 주인공의 훈련소 동기였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이후에 출판된 후속편 '귀로'에서 등장하여 살아남아 돌아갔음이 확정 되었지만 여기선 설정 변경의 피해를 정통으로 맞아서 죽었습니다. 삼림보호관이 되고 싶어 했는데 하필 다리를 다쳤으니 될 수 없다고 절망하다가 먹을 것과 함께 가져온 포크로 자살합니다. 삼림보호관이 되고자 했는데 다리를 다쳐서 절망하다 죽는 건 원작에서는 프란츠 켐머리히였습니다.


내용은 설명할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원작의 에피소드가 많이 각색 되어 시간 순서나 맥락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얼개는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아직 전쟁이 치열하고 누가 이길 지 미지수였던 1916~1917년의 일이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초반부에 주인공 일행이 막 배치된 1917년 봄과 중반부부터는 독일의 패전이 확정 되었고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1918년 11월이 배경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1차대전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는 연출과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의 서부전선을 다룬 영국 영화 1917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도 1917을 의식한 듯한 연출이 몇가지 보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극초반 도입부에서 주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하인리히 게르버'가 참호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무인지대로 돌격할 때 중간에 한번을 빼고는 계속 하인리히의 시선을 따라 롱테이크로 연출 됩니다.


위의 뮐러 항목에서 설명했듯이 1917과 같은 수미상관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917에서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자고 있었던 윌리엄 스코필드를 토머스 블레이크가 깨우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스코필드가 토머스의 형을 만나고 소식을 전한 후 다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잠드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이번 영화판에서는 하인리히가 참호에서 뛰쳐나가 돌격하며 쓰러진 나무를 엄폐물로 삼아 숨어 있다가 뛰어들어가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장면은 중반부 전투 씬에서 파울도 비슷한 연출이 나옵니다. 또한 초반부에 벰이 죽었던 포격에서 별 부상 없이 살아남은 파울에게 상관이 주머니를 던져주며 "할 일 없으면 인식표나 수거해 와"라고 명령하고 파울은 도중에 벰이 죽은 걸 보고 충격을 받는데 프란츠 뮐러 역시 마지막 전투 후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차에 같은 말을 듣고서 인식표를 수거하던 중 파울이 죽은 것을 보며 영화가 끝납니다.


1917처럼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다뤘지만 두 영화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참호만 해도 전혀 다르게 묘사 됩니다.
1917은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므로 똑같은 비교는 불가능 하겠지만 맑은 하늘에 참호도 물에 잠겨 있다던지 하는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는 영화 내내 하늘은 우중충하거나 비가 쏟아져서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궁창이 되어 있습니다.

1917의 전설적인 마지막 돌격씬과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묘사되는 돌격도 전혀 다르게 묘사 되는데 1917에서는 풀도 자라 있는 넓은 들판을 달려가지만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무인지대는 온갖 포탄구덩이와 수많은 시체, 쥐가 들끓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고 가는 곳마다 물이 차 발이 푹푹 빠져서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데 그마저도 가시철조망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리 만큼 영화가 전개 되는 동안 독일군이 공격할 때에는 우중충한 날씨 속에 안개도 가득 껴서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습게도 중반부 전투씬에서 날씨가 밝아지고 해가 뜨게 되는데 독일군에게 더없이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병사들의 묘사도 사뭇 다릅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독일군 측이 상대적으로 고지대를 선점한 덕에 "60 고지 전투"에서 묘사 되듯 독일군은 상대적으로 뽀송뽀송한 환경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저지대였던 협상군측의 참호는 물난리가 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1917의 영국군 참호는 이런 개판인 환경까지 묘사 되지는 않습니다만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는 이전 작들 이상으로 말 그대로 시궁창이 되어 있는 참호에서 물을 퍼내면서 진흙바닥에서 뒹굴며 적들을 향해 총을 쏘는 풍경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보니 1917의 깔끔해 보이는 영국군들과는 다르게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선 독일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제대로 씻지도 빨래도 못하는 환경에서 진흙탕 속에 뒹구느라 다들 거지꼴을 하고 있습니다.

전투 묘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17에서는 대규모 전투 씬 자체가 없었지만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는 전의를 상실한 적 병사를 독일군이나 프랑스군이나 다를 거 없이 무자비하게 쏴죽이는 모습이 내내 보이고 총으로 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 뿐만이 아닌 사람을 물 속에 담가서 익사 시키거나 돌이나 야전삽으로 내려쳐 죽이는, 당대 유럽인들이 충격을 받았던 "야만적인" 전쟁의 풍경을 여과 없이 노출 시킵니다.


그리고 이건 독일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묘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독일군의 묘사도 지금까지의 매체에서의 묘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과장하지 않고, 당시 독일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묘사한 영화는 처음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영상 매체의 경우 일반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측에서 만든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은 당시 수뇌부를 비판하기 위해 협상군이 무모하게 독일군 참호로 돌격하다가 떼죽음 당하는 묘사가 일관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사실과 부합하느냐는 둘째 치고 그러한 인식이 협상국측 사람들에게 있었고 그런 인식을 담은 영상 매체를 통해 1차대전을 겪지 않은 현대의 한국인들도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협상군 측의 시선으로 보다보니 독일군이 가진 문제는 나타나지 않고 협상군측의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법인데 독일 측에서 당시의 곤궁함을 여과 없이 노출 시킴으로서 당시의 독일군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지, 반대급부로 적으로 등장하는 프랑스군이 악마의 군대로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 하게 묘사 됩니다. 1차대전의 프랑스군을 이렇게 강력하게 묘사한 영화도 이 작품이 처음일 겁니다.

중반부에 독일군이 돌격하여 프랑스군 제1선의 참호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는데 고참병으로 묘사 되는 카진스키와 탸덴의 경우에는 확연히 잘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병사들은 한번 사격하고 나서 당황해서 볼트를 안 당기다가 당한다던가 볼트를 당기면서 조준을 풀어버리는 모습이 묘사 되는데 카진스키와 탸덴은 조준을 유지한 상태에서 침착하게 재장전 하고 프랑스군을 사살합니다. 그러고 나서 처음 하는 일이 프랑스군의 취사반에 있는 음식을 입에 욱여 넣는 것입니다. 거의 3년을 순무만 먹다가 1918년 즈음에 와선 순무도 다 떨어져서 전국이 굶어죽을 판이었던 독일의 현실입니다.

파울도 그걸 보고선 양손에 소시지를 들고서 입에 욱여 넣던 찰나에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이 울리며 참호에 수두룩한 쥐들이 떼를 지어 도망가고 프랑스군이 반격해온다는 걸 깨닫고 참호로 다시 나가 조준합니다. 우습게도 공격할 때까지 안개가 끼고 어두웠던 하늘은 어느새 해가 떠서 밝아졌고 안개도 걷혔습니다. 해가 밝아오면 희망적이어야 할 상황에서 갈색 연막 뒤에서 나타나는 것은 프랑스의 생샤몽 전차입니다.

1918년 시점에서 협상군의 주력으로 사용된 것은 르노의 FT-17 전차였습니다만 실제 르노 FT는 조그맣고 귀여운 인상이어서 원작 소설에서도 묘사되는 협상군 기갑부대의 무시무시함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생샤몽 전차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만 이 생샤몽 전차는 역대 전쟁영화에서 묘사된 어떤 전차보다도 무시무시한 사신으로 묘사됩니다. 독일군이 가진 화력을 총동원 해서 공격해보지만 그런 공격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전부 튕겨내면서 접근하여 1891년식 75mm 야포로 독일군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자 독일군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붕괴되고 못 버티고 도망가는 독일군 병사들을 추격하며 야포와 기관총으로 마치 벌레를 잡듯이 학살해버립니다.

주인공 일행이 어찌어찌 한대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내 프랑스군 보병들이 도달하여 방금 전까지 독일군은 소총과 총검으로 힘겹게 몸싸움 하며 점거했던 참호였거늘 프랑스군은 화염방사기로 참호에 남은 독일군을 순식간에 몰살 해버리고 완전히 무너져서 도망가는 독일군을 추격하자 독일군은 전면적으로 후퇴하지만 전투기를 풀어 기총소사를 해댑니다.

1차대전 영화에서 제대로 된 기갑전이 묘사되는 일도 적지만 현실에서도 대전 막바지에 제병협동의 정석을 만들며 독일군을 일방적으로 박살 내버렸던 프랑스군의 무서움을 독일 입장에서 여실히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 초기에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푸왈리라고 부르며 두려워 했던 이유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전투 장면은 전후로 콩피에뉴에서 협상국과 협상을 하는 장면과 교차 되어서 나옵니다. 에르츠베르거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전투를 멈추자"라고 애원하지만 포슈는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든지 계속 전쟁을 하든지"를 고집합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독일군이 무력하게 학살 당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협상국 측의 요구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한다며 이러느니 그냥 전쟁 하다가 패전하고 말겠다고 떼를 쓰는 군인을 상대로 에르츠베르거가 "그러면 수십만명이 더 죽겠죠. 이제 군인들이 싼 똥 우리가 치워야 할 때 아닙니까? 싫으면 가시든가, 난 여기서 마저 할 겁니다"라고 응수합니다.

우스운 것은 이 와중에도 협상국이 열차와 기관차를 내놓으라는 부분을 걸고 넘어지며 "열차랑 식량이 없으면 빨갱이(볼셰비키)들에게 괴멸 당할 겁니다. 병사들은 명예롭게 전사하는 게 아니라 굶어 죽을 거예요"라고 이 와중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이자 에르츠베르거는 기가 막혀서 "내 아들도 전사 했는데, 내 아들 명예는 어디 있느냐?"고 반박하는 장면이 지나간 후에는 프랑스군 제라르 듀발을 찔러 죽이고 고통스러워 하는 파울을 보여준 다음 전쟁을 지속하고자 하는 프리드리히 장군을 보여줍니다.

프리드리히는 브릭스도르프 소령과 집안 얘기를 하면서 고급스러운 식사를 하고, 키우는 개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당장 바로 앞 부분에서 병사들은 먹을 게 없어서 삐쩍 꼴은 상태였는데 말이죠. 이건 강화협상단들도 아침식사로 빵에 달걀, 커피, 주스까지 곁들여서 고급스럽게 먹는 장면을 스토리와 무관함에도 정면에 잡아 보여주고 그걸 보고 에르츠베르거의 표정이 굳어지는 모습 역시 중앙에 잡고 보여줍니다.

전선의 시궁창에서 쫄쫄 굶어가며 힘겹게 싸우는 병사들과 후방에서 호화스러운 식사를 하고 계신 높으신분들의 대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 장면을 직접 본다면 굳이 깊은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원작에서도 프랑스군 병사인 제라르 듀발을 칼로 찔러 죽이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주요한 이벤트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후반에서 파울이 완전히 망가지는 트리거로 작동합니다.

기총소사까지 동원하며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피해 포탄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구덩이로 떨어진 제라르 듀발을 칼로 찌르고 고통스러워하는 듀발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결국 고통스러워하다 죽는 모습을 보는 파울은 얼굴의 반쪽이 진흙에 범벅이 된 모습입니다.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요. 이는 마지막 전투에서 얼굴이 완전히 진흙에 범벅이 된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일 겁니다.

원작에서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18년 10월에 죽은 것으로 되었지만 시간이 더 늦추어져서 카진스키가 죽은 것이 하필 11월 11일 아침이 되었고 원작과 마찬가지로 파울은 충격을 받고 완전히 망가져 버립니다.

프리드리히 장군은 휴전 조약이 발효되는 11시 직전에 공격하여 탈환한다는 계획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는데 이는 2011년에 개봉했던 한국전쟁 영화 고지전을 연상 시키는 부분입니다.

실제 1918년 11월에는 저격수 등의 존재로 전쟁 마지막 날까지 죽어나가는 사람은 있었지만 전선을 밀어내기 위한 공세는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마지막 공격을 위해 개연성을 희생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서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후술할 파울의 심리에 대해서는 오히려 원작을 더 잘 따라갔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 만큼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카진스키까지 죽고 파울이 망가진 것에 대한 묘사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차이점을 보입니다.

이전의 전투까지 파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꺼리는 모습을 여러번 보여주었습니다. 중반부의 전투에서도 프랑스군 병사를 야전삽으로 내려쳐 제압해서 최후의 일격을 넣어서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해서 우물쭈물 대고 있었는데 탸덴이 총으로 쏴 프랑스군 병사를 죽입니다. 제라르 듀발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공세에서 파울은 중간에 엉겨붙은 프랑스군 병사를 철모로 머리를 때려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이 장면도 고지전에서 오기영 중사가 인민군의 황선칠을 철모로 때려 죽이는 장면을 연상 시킵니다.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참호로 난입해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프랑스군 병사가 파울을 질식 시켜 죽이려고 진흙바닥의 흙탕물에 머리를 담가 죽이려고 하지만 파울은 가까스로 돌을 잡아 프랑스군 병사를 후려치고 방공호로 굴러 떨어집니다. 이전에 제라르 듀발을 죽일 때는 얼굴의 반만 진흙을 뒤집어썼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완전히 진흙을 뒤집어 쓰고 있었던 파울은 방공호 안에 숨어 있던 다른 프랑스군 병사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그리고 진흙 때문에 하얘진 얼굴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바깥으로 나가며 1918년 11월 11일 11시가 되고 전쟁은 끝나고 뮐러는 인식표를 수거하다가 진흙이 많이 떨어져 나간 상태인 파울이 죽어 있는 것을 보며 영화가 끝납니다.

원작과 1930년, 1979년 영화판에서는 동료들이 대부분 죽어나가고 고향에 휴가를 나가서도 도저히 적응을 못 해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카진스키마저 죽어버리자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합니다. 원작에서는 전쟁으로 파멸한 자신들 세대는 금방 도태될 것이라고 독백 하며 삶을 포기하고 참호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30년 영화판에서는 멍하니 앉아 있다 나비를 잡으려다가 총을 맞고, 79년 영화판에서는 알베르트 크로프에게 편지를 쓰며 급우들의 운명을 암시하고 새를 그리다가 총에 맞는 결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쟁으로 파멸된 세대에게 이는 모험담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소설의 서문과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오히려 죽음을 택함으로써 편안해졌다는 최종장의 묘사를 생각해 볼 때 1930년, 1979년 영화판의 묘사는 레마르크의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1930년판에서는 나비를 잡으려다, 1979년판에서는 새를 그리다가 총에 맞는데 이는 명백하게 삶에 대한 순수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러한 희망이 전쟁이라는 암울한 현실에 짓밟혀 스러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데 원작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파멸 되었고 그로 인해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여 오히려 죽음으로서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었음을, 오히려 삶이 지속 되어 봐야 이미 전쟁을 겪으며 너무나 닳고 늙어버린 자신들은 돌아가 평화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도태될 비참한 미래만이 남을 것이라고 독백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파울이 마지막 순간에 희망을 붙들고 있는 장면은 원작을 생각하면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2022년판 영화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저 싸우기만 하는 괴물이 되었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빛을 향해 걸어나가 괴로운 현실에서 해방 되는 파울의 모습이 원작과는 얼개와 개연성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오히려 돌고 돌아 원작의 심리묘사를 더욱 살린 묘사가 되었다고 봅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2022년판 영화는 원래부터 암울 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웃긴 에피소드도 있는 원작에서도 암울한 부분만을 더욱 강조하여 극이 진행 되는 내내 우중충한 날씨, 물난리가 나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 된 참호, 돌격하는 중에 떼죽음 당하는 동료들을 보며 주인공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일관적으로 묘사 하여 더욱 암울해졌습니다.

감상문을 쓰면서 영화 크레딧을 전부 확인해 봐야 했는데 극 중에서 이름이 아예 불리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고 가뜩이나 똑같은 옷에 배우들도 평범한 얼굴인데다가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이라 다들 얼굴만 내놓고 껴입고 있는데 그마저도 흙먼지를 뒤집어 쓰기까지 해서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누가 누구였는지 잘 구분도 안 됩니다. 아마 감상문을 쓰면서도 다른 인물로 착각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와는 별개로 일반적으로 1차대전의 서부전선 참호전을 다룬다 해도 보통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5~1917년 즈음을 다루지 독일군이 절망적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던 1918년을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더러, 참호전 하면 호루라기를 불면 기관총 탄막을 향해 떼죽음을 당하며 돌격하는 이미지만 있지 1차대전에서 전차를 앞세워서 참호를 돌파하는 것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1930년, 1979년판 영화에서도 주인공 일행은 초반에 피켈하우베를 쓰다가 후반에 슈탈헬름으로 바뀌고 실제로도 독일군 전군이 슈탈헬름으로 바뀐 건 1918년에 가서 일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모든 독일군들이 천모자 아니면 모두 슈탈헬름만 쓰고 나오는 것도 어느 정도 감점 요소라 할 수 있겠으며 마지막에 11시 15분 전에 공격을 하라고 떠미는데 병사들이 폭동 안 일으키고 그걸 고분고분 하게 공격에 나서는 묘사도 개연성을 해치는 전개라고 생각합니다. 11월 11일에는 부대 단위의 전면적인 공격이 있지도 않았으니 고증도 무시하는 전개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을 두고서도 1차대전 말의 서부전선의 전투를 포함하여 PTSD, 생활의 묘사를 이 정도로 철저하게 한 작품은 흔치 않고 영화의 전개와 주제의식의 표현은 이전에 만들어졌던 작품들에 비해서도 모자람 없습니다. 전쟁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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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2/10/30 07:13
수정 아이콘
와우 엄청난 리뷰네요. 리뷰만으로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습니다.
똥꼬쪼으기
22/10/30 11:01
수정 아이콘
볼까말까 고민했는데, 리뷰보니 보고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머심슨
22/10/30 17:22
수정 아이콘
굉장한 리뷰군요.감사합니다.
toujours..
22/10/31 11:52
수정 아이콘
저는 재밌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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