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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0/10 20:51:16
Name Farce
Subject [일반] [창작] 문제의 핵심 1편 (수정됨)
1. 전쟁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일반적인 기준은 이렇습니다. 이긴 전쟁은 좋은 전쟁이고 진 전쟁은 나쁜 전쟁입니다.
이영도, “그림자 자국”

2.
“똑바로 세라. 한 놈이 두 녀석 되면, 본부에 지역 확보했다고 무전 때리고는 총 맞아 죽는 거야.”
묘하게 거슬리는 목소리를 가진 사내가 입은 녹색 위장복 상의에는 희미하게 검은 줄이 두 개 그어져 있었다. 남쪽 군대의 중사 계급장이었다. “총 여섯 명입니다. 분대원이 여덟 명을 맞췄다고 했습니다만 둘은 시신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수습하여 후퇴한 것 같습니다.” 그에게 답하고 있는 어린 병사의 어깨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움직일 때마다 그 위의 밝은 초록색 견장이 반짝거렸다.  

“3분대는 여섯 명.” 중사는 가슴팍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위장무늬가 겉표지에 들어간 작은 수첩에 분대장으로부터 보고 받은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크레모아는 불발. 그러나 조명지뢰 방향으로 사격을 개시했고. 혁명군 제식 장총 6정과 아군으로부터 노획되거나 망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자동소총 1정 및 탄창 3개 회수.” “그렇습니다. 부소대장님.” 부하의 확인에 중사는 수첩을 다시 가슴 주머니에 접어 넣고는 또 다른 책을 품에서 꺼냈다. 겉 생김새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위 아래로 때묻은 포스트잇이 빽빽하게 달려있었다.  “공식적인건 여기까지 적고. 바로 물어보자. 돈 될만한 건 얼마나 나왔어? 피복, 담배, 또 ‘혁명 물질’은? 몇 개야?”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두 부사관으로부터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는 땅 위에 구덩이가 몇 개 파여있었다. 간밤의 매복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분에 이제서야 피곤함이 올라오기 시작한 세 명의 병사들은 개인호에 다양한 자세로 기대 누워서, 총만 대충 한 손으로 전방을 향해 잡고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크게 하품하고는 실없는 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 막내! 잘 쏘던데? 네 맞선임보다 잘 맞추더라” 오른쪽 가슴에 꺾여있는 병장 계급장을 붙이고 있는 병사의 말이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 말을 들은 다른 병사는 적당히 입으로는 웃는 소리를 내면서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오른편 참호에 있을 상병 방향으로 눈치를 살피었다. 1년간의 군대 생활이 그에게 알려준 것이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말에 대답하면 피곤한 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몇 번이나 총을 쏘고 분해조립을 해본다고 해도, 어깨 위에 총을 올려놓고 조준만 잘한다면 겨누고 있는 것에 5밀리미터짜리 탄환이 탁하고 박히고 쓰러지는 경험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북쪽의 얼어붙은 설원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산송장들이 몸을 지탱하는 마법의 실은 남부인들이 들고 있는 성스러운 화포 앞에서 힘없이 끊어졌다. 그러나 병사의 뺨과 잠시라도 따뜻해졌던 총몸을 때리는 칼바람은 그런 성취조차도 비웃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을 총을 쏴서 멈출 수는 없었다.

군복에 두 줄이 꺾여있는 상병은 자신을 곁눈질하는 후임 쪽을 향해서 말없이 대충 눈을 흘기고는 탄입대에서 담뱃갑을 꺼내 하나를 물어, 그 옆의 둥근 수류탄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아 당기었다. 틱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도저히 불이 붙지 않았다. 부사관들이 무어라 서로 말하며 진지 건너편의 산들을 가르키기 위해 등을 돌리자, 상병은 ‘시발’이라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멍텅구리 라이터를 호 밖으로 집어 던졌다.

그 방향에는 얼굴에 잿빛 털이 가득한 현지인 보조병 두 명이 갈색 군복을 입고 쓰러진 한 혁명군 병사의 시신에 달라붙어 검은 방한 가죽장갑을 낀 손을 염하듯이 옷 안에 집어넣고 휘젓고 있었다. 이들은 옆에서 라이터가 날아와 굴러떨어지는 것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안에 길게 자라난 손톱 때문에 장갑이 움직여 아직 따뜻한 시체의 살에 닿을 때마다 잉크 빠진 만년필 같은 자국들이 위에 그려졌다. 그 중 나이 든 얼굴을 한 보조병이 무언가를 느끼고 놀라 잠시 손을 뗐다. 둘은 서로의 눈을 잠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체가 입고 있던 옷을 익숙하다는 듯이 한 겹씩 벗기기 시작했다.

전선의 모든 일이 평소와 같았다.

3.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부재중이십니다.” 오늘따라 상병에게 답한 것은 인사담당관의 살집 있고 굵은 목소리가 아니라 그를 보조하는 인사계원의 얇은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즘 병사들치고는 보기 드물게 머리를 짧게 깎은 왜소한 체격의 병장이 의자를 뒤로 돌려 그를 반겨주었다. 등 뒤의 모니터와 방의 형광등 빛 때문에 계원의 얼굴을 대부분을 덮고 있는 커다란 안경은 단지 하얗게만 보였으며, 그 밑에 씰룩거리면서 웃고 있는 입만 보일 뿐이었다.

“외출증 받으러 왔습니다.” “준비해놨습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서 서류철을 무릎 위로 옮기더니 거기 적힌 이름을 상병의 오른쪽 가슴에 적혀있는 이름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더 다른 말 없이 오른손바닥을 꺼내 보이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상병은 자신의 팔죽지를 뒤적거리고는 순대를 배달시키면 소금을 넣어주곤 하는 작은 지퍼백을 두 개 꺼내서 내밀었다. 타버린 나뭇조각이나 쇳조각, 또는 누군가 검은 페인트를 칠해둔 것이 벗겨진 덩어리처럼 생긴 물질이었다.

“마철가루 아시죠? 이거 귀한 거예요. 망자들 전연사단을 하나 털어도 자일리톨 통 한 개가 안 나옵니다. 담당관님께 하나 드려야겠어요.” 그리고는 두 개를 모두 꼬옥 상대방의 손에 쥐여주었다. 계원은 그게 무슨 의미라도 있는 마냥 천장 전등에 내용물을 비춰보았다. 적어도 그가 고개를 드는 덕분에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치 명절에 예상보다 비싼 선물을 받아 어디에 쓸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 꼬마의 모습이었다.

“이제 곧 병장 달고 전역하시겠네요? ‘장독대’에 돈 좀 있어요?” 신이 난 계원이 끄덕이면서 인사장교의 보라색 도장이 선명한 코팅 종이를 내주었다. “요즘은 병장 달아도 한참 아닙니까? 금방은 무슨. 남들 하는 만큼은 했고. 집에 그거 들고 돌아가야죠.”

“이야 남쪽에 할 일이 있습니까?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은 역시 다르구나. 부모님이 장사라도 하시면 최고죠. 우리 집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군인에게 국밥을 팔아도 번다더니 이제는 카페도 다들 서로 제 살만 깎아 먹고 있잖아요. 군인도 적어지는데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어요. 모이네도 너무 많고…”

상병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여기보단 사람이 더 많이 사는 도시가 기회도 더 많겠죠.”

“그 말을 누가 믿습니까? 백억이니 천억이니 뭘 파는지 몰라도 사람을 안 쓴다잖아요. 요즘 돈이 모이는 곳은…”

뻔해지는 이야기에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상병은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결국 요즘 군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은 다 비슷했다. ‘어디에 투자해라’, ‘이건 믿을만하다더라’, ‘월급의 반은 어디에 쓰고 저기에 썼다’ 마치 한몫 잡기라도 하면 춥고 망자들만 돌아다니는 국경지대에 영원히 황송하게 뼈라도 기꺼이 묻을 것처럼. 시체조각 모아서 진짜 천금이라도 가지고 뭐라도 크게 시작하는 것처럼. 어쩌다가 지금 총을 쥐게 되었는지, 어제 무얼 쐈는지, 언제까지 쏠지도 관심이 없고 지나간 청춘의 핏값만 받으면 족하다는 사람들. 자기 삶을 관통하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낼 올바른 질문조차도 던질 수 없는 사람들.

“좋은 거 주신 김에 아저씨한테만 알려준다니까요. 거기 가면은…”

“모레 봅시다. 고생하십쇼.”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모니터 속 흰 종이를 안경 가득 채우는 그를 뒤로하고 생활관에 들어서니 이미 분대원들은 위장복에 어울리는 칙칙한 초록색 대신 밝은색으로 빛나는 외출 복장을 규정대로 군복 찍찍이에 붙이고 있었다.

“어데가시꺄?” 방을 같이 쓰는 두 명의 보조병 중에서 나이가 지긋한 보조병, 그러니까 직책으로 부르자면 ‘보조병장’이 이 땅의 말투로 떠보았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명분은 분대 회식이었지만 부사관인 분대장 빼고, 현지병은 못 믿는다고 빼고, 남부인 셋이서 놀러 나간다는 사실은 소대가 아니라 중대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일이었다.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은 전혀 아니었고, 도대체 이번에 혁명군 보따리에서 어떤 귀한 것을 찾아 팔아먹었길래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나 다들 질투하는 눈치였다.

병사들에게 외출증을 나눠주던 상병이 제대로 대답할 수도 있기 전에 병장이 먼저 씩 웃으면서 큰소리를 쳤다. “돈 좀 만져서 술 마시러 간다. 모이네들은 근무 잘들 서시고! 졸지들 말고! 나라 지켜야지.” 그러면서 보조병장의 어깨를 호기롭게 툭툭 쳐서 뺨의 흰털들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다라이에 비누끼가 흥건한 걸레와 마른 것을 같이 담아서 아침부터 침대 밑 시멘트 바닥을 미싱하고 있던 더 어린 보조병이 그 말을 듣고는 바닥에서 고개를 치켜올렸다. “뭐이 어드레? 같이 고생 해고서 길쎄 술은 느으만 먹네? 에무나이 옆굴레…”

무어라고 상스러운 말을 더 보탰지만, 보조병장이 그의 상체에 군홧발을 찍어버리면서 ‘아야야야’소리로 덮어버렸다. “왜 씰데 없이 고구 기래. 가만히나 있으라우.” 잠시 입을 다물고는 자빠진 놈을 노려보는 것 같더니만 곧 다시 실실거리면서 남부병들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별일 아니우다. 올 때 쌔주 맷 병이면 대갔시다.”

4.
“어머, 오빠들 이번에 돈 좀 벌었나 봐?”
이 동네에서 ‘마담’이라고 불리는 술집 주인의 말이었다. 병사들에게 ‘오빠들’이라고 불렀지만, 마담의 외모는 두꺼운 화장에 속아주기에도 병사들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상병이 근무 중에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생각해보자면 일병의 어머니가 저 정도 뻘은 될지도 몰랐다. 물론 국경지대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여인에게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은 없었다.

“마담, 양주 비싼 거 있으면 하나 꺼내줘.”

북쪽에서 나온 물건은 전부 그녀를 거쳐서 남쪽에 팔린다. 거꾸로 원하는 게 있고 돈만 충분하다면 도시에서 나온 지 하루가 된 전자기기라도 손에 들어왔다. 원정군 사령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PX도 있다지만, 언제부터 군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이 PX에서만 나오던가.

상병은 대부분의 병사와 마찬가지로 마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께름직한 소문을 너무나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친하게 구는 이유는 단순히 다음에 어려운 일을 시킬 호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중대장에게 끌려가서 한 소리 듣는 걸로 끝나면 다행인 일도 있었지만, 근무지를 이탈해서 북쪽을 오가는 것 같이 군대의 범위를 벗어난 일도 쉽게 시켰다. 이곳에서 돈이 떨어진 인생들은 그걸 멍청하게도 기회라고 불렀다. 그러다간 헌병대에 잡혀가는 수준이 아니라 얼음에 박히고도 차마 죽지 못하는 백골이 될 수도 있었다. 아까 인사과의 안경잡이 같은 놈들이나 좋다구나 하고 받을 일들.

그나마 이번에는 작전 중에 분대가 발견한 물건들을 전당포 맡기듯이 마담에게 보여주고 술값을 달아놓으면 그만이었다. 귀한 물건이라도 섞여 있으면 빳빳한 현금으로 거스름돈을 더 받을 생각에 제 각자 상상력이 충만했다. 물론 그 시작은 먼저 술 고민에서 시작할 것이었다. 내일은 북쪽에서 무슨 급변사태가 일어날지,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서쪽 바다부터 동쪽 바다까지 가득한 군바리 중에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술에 실전같이 달라붙을 수밖에.

상병과 일병은 탁자를 마주 보고 앉아서 소주와 맥주를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병장은 마담을 바라보는 의자에 앉아 혼자 양주를 들이켜면서 더플백에 넣어온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서 모두 앞에서 흔들었다.

“미련한 북쪽 놈들. 밥이 없고 기름이 없으면 총이나 버리고 투항하지. 흰밥에 고깃국이라니 얼마나 내주기도 쉬워. 시대가 무슨 시대인데 철 지난 ‘혁명주의’로 버티려다가 이렇게 된 거 아냐? 죽기도 싫다. 총알은 없지만 싸우고 싶다. 그러니 현실을 무시하고 싶다. 그래서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이젠 죽지도 못해요. 그래도 시체 대가리들에 총알을 박으면 이런 귀한 게 나오니 우리 세대는 땡잡은거지.”

병장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한 유리병 안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액체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아주 맛없는 깔라만시 음료이거나 외계인이 소 간으로 과일청이라도 담근 비주얼이었다.

“‘혁명 물질’,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모든 과학기술에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것들이 다양한 성질과 형태로 그렇게 저기 위에 가득하다. 우라늄 할아버지가 와도 얘네는 못 이겨.”

마담이 거들었다. “어머 ‘병 안의 괴력난신’이네, 뜬구름 애들이 좋아하겠어. 부르는 게 값이라던데?”

“뜬구름은 무슨, 철쭉산 가서 팔아야지. 외국 애들이 잘 쳐주는 걸 왜 반토막 난 반도 돈으로 받아?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서 애를 토끼처럼 많이 낳고 살려면 제값 받아도 한참 모자라. 여기 지천으로 땅이 널린 것 같아도,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고 또 괴물에게 안 물려가는 땅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뭐가 귀하다고 하면 남들도 알아서, 기업 놈들이 맨날 장난쳐놓잖아.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닌데 몇 배를 뻥튀겨 놓는지 알아?”

어느 사회집단이 그렇듯이 막내에게 술을 많이 나눠주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그날은 돈을 좀 벌어서 기분이 좋아졌다고 해도 말이다. “병장님 그런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통제구역 넘어 다녀온 사람끼리 애를 낳으면 모이네가 나온다지 않습니까? 물질을 한번 만진사람은 그 DNA가 바뀐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 요즘 멀쩡한 애들이 나오질 않으니까 보충대도…”

병장뿐만이 아니라 상병까지 이빨에 힘을 줬다. 눈이 풀어졌던 일병은 자신의 말실수에 갑자기 입을 가리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두가 믿고 있는 헛소문, 아니 상당히 근거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인정하고도 싶어하지 않는 끔찍한 이야기가 술잔 앞에 나와서 얻을 수 있는 이로움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식이 후임 빨리 안 들어온다고 별소리를 다 믿네. 통제구역은커녕 국경지대 근처도 안 알짱거리는 대기업 한량들이 드라마에서처럼 애 하나 안 싸주겠냐? 나도 건강해! 걔네보다 더 건강해! 아주 준비가 만땅이야. 기회만 있으면 보여주겠다고. 도시에서 과학도 설명 못하는 유독 매연 뒤집어쓰고 키보드 만지는 놈들보다 여기 사람들이 더 건강해! 혁명군 놈들만 봐도, 계속 기어 나오잖아? 다 죽었다면서? 무슨 흑마법으로 새끼를 까는 거야? 대후퇴 이후로 어디서 장총을 파내서 들고 다니는 고아들도 많고… 모이네도 사방에 가득하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선임병을 지켜보던 병장이 끼어들어 말을 자르고는 일병을 보면서 말했다.

“맞는 말이지. 여기 더 오래 있는다고 무슨 좋은 일이 생겨? 한 몫 챙겨서 내려가야지. 좋은 기술 많이 수출하는 기업체에 군경력 살려서 취직하고, 그게 삶 아니야?”

“남쪽? 도시? 대기업에 누가 꽂아라도 준대? 야, 너 수도 놈 아니야! 도시는 안 죽는다고 잘난 척을 맨날해요 이것들은… 더 남쪽 가봤어? 남쪽의 남쪽 가봤냐고? 거기 뭐가 있는 줄 알아?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 빌어먹을 설원보다 더 아무것도 없어! 내가 왜 배를 만들다가…” 술이 들어간 탓인지 얼떨결에 서로 큰소리를 지르게 된 두 병사는 갑자기 찾아온 무안함과 당황스러움 때문에 서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잔만 계속해서 채워나갔다. 적어도 이곳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동안, 서로 간의 벽이 너무 깨져서는 안 되었다.

“아무튼 이게 내 수출 금자탑이고 이게 우리 집 금송아지야! 다음에는 더 대박 터트려서 회장인지 하는 것들이 내 전리품에서 뭘 알아가겠다고 벌벌 기는 꼴을 보고 말겠어...”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잠이 오기 시작한 그들은 술집의 푹신한 의자에 아무렇게나 늘어붙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스틱으로 만든 흰색 모자를 쓰고 있는 헌병들이 하나둘씩 술집에 들어오는 것을 상병은 볼 수 있었다. 그는 외투의 지퍼를 내리고는 손을 집어넣어서 외출증을 찾아보기로 했다. 병사들이 시체에서 얻어낸 물자로 연대 보일러 기름을 채우는 요즘 앵벌이 군대에서 헌병이 시간이 늦었다고 단속을 하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아니면 술은 취했는데 돈이 있어 보이니까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작당한 것이던가.  

그러나 어제 작전에서 봤던 부소대장 중사 말고도 익숙한 간부들이 그 뒤에서 줄 지어 술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비상이다. 비상! 전원 복귀한다. 진돗개다. 진돗개!” 헌병들이 한 명씩 달라붙어 여기저기 널브러진 병사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욕지거리와 만취자들의 옹알이가 반씩 섞인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났고 괴성을 지르는 녀석도 있었다. 소란을 뒤로한 부소대장이 마담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담, 연락 못 받았어?” “미안, 늦어서 나도 졸았나 보네.”

뒤뚱거리며 헌병이 끌고 가던 한 병사의 붉은 페즈 모자가 걸음걸이만큼 흔들리더니 갑자기 주저앉아버렸다. “구아아아아악” 이 늦은 시간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인솔헌병은 그의 입을 닦아주지도 않고 대충 일으켜 세우고는 뒤에서 연거푸 밀치기만 했다. 그들을 따라서 바닥에 흥건한 자국이 길어져만 갔다.

5.
“산신령은 새벽에 내려오고 지랄이야!” “조용히 해라.” 분대장 하사가 야간투시경을 두 눈에 붙인 상태 그대로 병장에게 말했다.

초소로 뛰어가는 길에 분대장이 말해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악천후로 중단되었던 공중정찰이 재개되자마자 바로 전날 거대개체 ‘산신령’이 북쪽으로부터 사단의 책임 구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포착이 되어 새벽에 비상이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산신령이라니, 내일 누군가는 아주 부자가 되어있겠구만’. 상병은 생각했다. 그놈의 ‘혁명’이 도대체 우리의 세계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북쪽에서 죽은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안식을 얻지 못했다. 많은 존재들은 훨씬 따뜻하고 인간이 많은 남쪽이 그리운 것인지 되돌아가기 위해서 얼어붙고 뒤틀린 몸을 움직였다.

자연법칙도,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 북부 설원 내부로 3개 군단을 동원했다가 나라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젊은이를 잃어버리고 괴물무리만 키워버린 ‘대후퇴’ 이후로 남부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살아남은 병력을 추려 국경지대를 잇는 거대한 경계구역을 만들고, 이따금 길을 잃고 작위적으로 그어놓은 선 이남으로 내려오는 괴생물체들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길 잃은 불청객의 수준을 벗어나 거대한 무리가 통으로 이동하는 큰일이 되기도 하였다.

어떨 때는 청설모 같은 작은 들짐승이었다. 대부분은 지난 40년의 반도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이었고, 다른 때에는 죽은 신이었다. 아무리 인류의 기술력이 지난 몇 번의 대전쟁을 통해서 빠르게 발전했고, 어떤 과격주의자들은 ‘혁명주의’라는 것을 만들어서 신들을 없애보려고도 시도한 것이었지만, 소총만으로 수백 년 묵은 돌산이 움직이는 것을 쏴서 멈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혁명주의가 똑바로 죽음을 선사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죽이는 것이야말로 남부군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었다.

이런 작전에서는 사단 직할 7 중포대대 “날벼락”이 지원을 해주었다. 날벼락은 식민지 시절 여우 놈들이 항구에 미완성으로 놓고 갔다는 15 센티미터 순양함 포탑을 국경까지 끌고 와서 화력기지라고 박아놓은 물건이었다. 그게 제대로 몇 발 내려 찍히면 옛 신의 시체라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고작 함포가 터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지금 병사들이 총을 붙들고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경에 설치해둔 조명지뢰가 하늘로 솟고, 크레모아가 벼락처럼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기 시작했다. 중대 화기반의 익숙한 기관총 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사격은 지시에 따른다.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언제나 항상 산신령 자체보다는 그것을 따라서 움직일 수많은 망자들이 문제였다. 북부고원에서부터 황토색 옛 군복의 넝마를 입고 손톱질만 할 존재들이야 현대 남부군의 화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존재가 흥분하여 다른 산송장들을 따라오고 있을 것이었다. 모든 폭발음이 아군의 것이 아니었다. 놈들의 척탄통은 바들거리는 시체 손꾸락이 제대로 조준하지 않고 쏴서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기 일쑤였지만, 방심하고 휘말렸다간 충분히 치명적일 것이었다. 망자 무리와 교전하는 병사들은 다양한 꼴을 볼 수 있기에 자신의 신에게 빌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피골이 상접해서 이미 죽어가는 민간인도 있었지만, 팔이 거대하게 자라서 총알이 박히지 않는 괴물이 된 개체, 피부색도 거의 변하지 않고 아군의 녹색 위장복 차림으로 응사하는 녀석, 뭉쳐서 여섯 발로 기어가는 것도 있었다. 나중에 모든 것이 끝난다면 시체를 하나씩 까뒤집어보면서, 쩐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 고생을 했다 웃으면서 말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스무발 들이 탄창이 순식간에 동나고, 탄입대에서 여러 번 새것을 갈아끼니 손을 넣어보아도 빈 통 밖에 없었다. 어느새 일병의 것을 빌려서 총에 끼우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아보니 모이네 보조병들이 뛰어다니면서 탄이 떨어진 인원들에게 새 탄창을 배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군 앞을 가득 채운 회색 파도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화력의 벽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불이 약해지는 순간 달라붙어 사람을 고깃조각으로 쪼개버릴 것이었다.

분명 옆에서 새 탄알집을 받아 재장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총기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탄피가 노리쇠에 말려들어가 박혀있었다. ‘시발’ 노리쇠 멈치를 세게 누르면서, 노리쇠를 당기고, 총을 쳐보기도 하고, 뒤집어도 봤지만 이미 전진하려던 노리쇠가 강하게 씹어버린 구리 탄피는 도저히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상병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충분히 다가온 산신령을 볼 수 있었다. 달빛에 비치는 구름인 것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 무해한 배경으로 위장하고 있는 거대한 사체. 이렇게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그 덩치에 비해서 새삼스럽게도 악취는 나지 않았다. 충분히 오래된 북쪽의 망자들은 썩은 내를 내지 않았다.

3-thumb

쓸 수 있는 총도 없이 감상에 젖으려는 그때,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누군가 투명한 철도를 수직으로 지었고 그 위를 포탄이 경적을 울리면서 내리꽂고 있었다. ‘부우우웅’ 소리도 아닌 더 크고 낮은 소리, 더 강한 괴물의 울부짖음. 그리고 그걸 얻어맞은 살아있지 않은 것의 분노. 누가 더 소리를 크게 지르는지 경쟁하는 듯한 굉음들.

“쓰러진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 같이 외쳤다. 타버리는 고기 냄새, 흩어지는 살덩이, 하지만 상병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산신령이 죽었다. 가장 먼저 도착하는 병사가 가장 귀한 것을 얻을 것이었다. 수십 년도 아닌 수백 년의 말도 안 되는 역사가 마침내 남쪽에서 올라온 한 청년에게 돈이 되는 미소를 지어줄지도 몰랐다. 어쩌면 분대원들에게도…

황금을 생각하며 앞으로 뛰어나가던 상병이 뒤늦게 뒤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분대원의 호 안으로 정확히 들어가는 척탄통의 유탄과 그 폭발이었다.

6.
병원에는 환자만이 있다. 술집에는 망가진 사람만이 있다. 병장이 하루 전에 앉아있던 그 자리에는 그날보다도 더 취해있는 상병이, 마담이 그날 뚜껑을 다시 닫아둔 위스키 옆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건 두 시간 전에 끝난 일이었다. 이제는 눈에서 나오는 것도 없었다. 차라리 핏줄이 터졌다면 남들에게 보여주기라도 좋을 텐데.

“마담… 아까 내가 준 종이 가지고 있지?” “아직 손에 쥐고 있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상병이 내민 종이를 마담은 아직 치우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걔네 장독대 위치야. 내 것도 좀 넣어놨어. 가족에게 돈 가는 거 맞지?” “내가 믿는 사람을 보낼게.” 딱하다는 듯이 등을 두드려주던 그녀가 마침내 엄청난 인내심의 끝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혹시 산신령이 죽을 때, 좀 떼어놓은 것 있어?” “있어… 가장 먼저 가서, 총칼로 쑤시고 갈라서…” “이 정도 일이면 VIP가 직접 올 거야. 잘 팔아볼 궁리를 해봐. 동료들 핏값 생각하고.” 여기서 ‘핏값’이라는 단어를 마담은 뭔가를 씹듯이 말했다. “거미가 이곳에 올까?” “거미는 항상 왔었어. 큰 게 잡힌다면.”

상병은 반도의 남쪽 절반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거미 사또가 국경지대를 오가며 군인들의 소중한 물건을 사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뜬소문이나 동화 속의 이야기도 아니었고, 한 체제의 노골적인 통치수단이었다. 반짝이는 것에 대한 집착은 있으나 아둔한 거미는 돈이 무엇인지, 경제가 무엇인지, 오르고 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반도의 풍요는 어떤 가격도 신성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원칙으로 사람을 선택하고는 버렸다. 그럴수록 거미 신에 대한 경외감은 땅에 깊게 자리 잡았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땄다. 누군가는 얻었어야 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상병에게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빠져있는 부분이 자신의 자리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일어나는 하우스에서 유일하게 슬퍼질 사람. 거미가 원하지 않는 것을 많이도 샀노라고 세상 모두에게 알리는 머저리.

그러니 상병이 스무 몇 살 평생 소박하게 꿈꿔왔던 전역은 가격을 속삭이는 괴물들과 마주치는 것 없이, 도시에 돌아와 그의 방에 짐을 풀어놓고는 부모님에게 돌아왔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등에 메고 내려온 가방 속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을 것이었지만, 그건 알아서 팔아먹을 문제였다. 어차피 전방의 이야기를 다 허풍인 척 넘겨버리는 도시도 알 것은 다 알았다. 그곳에도 밀수업자들이 있고, 괴상망측한 이론을 성취하려는 넋 나간 학자들도, 대학원생들도 많았다. 아니 학문의 학 자도 모르지만 어디서 번 것인지 모를 돈으로 일단 모으고 보는 졸부들도 많았다. 병장이 말했듯이 회장들조차 고개를 조아릴 북방의 비밀이 그의 가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가방을 단단하게 묶고, 그걸 열어보지 않은 상태로 방에서 늙어 죽자고 그는 생각했었다. 남들만큼 군 생활도 했으니 손가락질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받아내야 하는 돈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기적으로 안으로 기어들어 갈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우리가 피를 흘렸노라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내밀어야할 때였다. 그렇게 상병은 각오를 다졌다. 거미! 이 나라의 상징! 지도자! 군대의 통수권자! 분대원을 잡아먹은 그가 재롱을 부리면 척탄통 박힌 고깃덩어리에 금일봉을 쳐줄 나라의 어르신. '나라에게 있어서 핏값이란 무엇일까?' 그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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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변칙성이 있지만 쓸모 있는 용도로 쓰긴 힘든 물건이군요.” 병장이 마담에게 보여줬던 것과 같은 물질이 가득 찬 병을 보면서 신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상병은 그의 가혹한 평가에 놀라 도대체 유물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반복해서 문질러 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더플백 속에서 서로 부딪혀 손상이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다섯 푼 어때요?” 그 돈으로는 지금은 과자 한 조각도 사지 못할, 수십 년 전에나 꼬마들 용돈으로 쓰였을 단위였다. 지배자는 자신의 뒤에 황금을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다른 이들의 마철가루와 작은 조약돌에도 쉽게 내어주었다. 그러나 상병에게는 내색도 없이 사람을 잡아죽이려는 것이었는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불렀다. 병장이 숨겨두었던 것들, 예전에 북부인 주술사에게서 얻은 목걸이,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반죽, 야생 동물의 가죽, 멈춰버린 시계, 모든 것을 내밀었지만 거미는 밝게 웃으면서 그것들의 가치를 부정했다. 아니 정확히는 발밑의 먼지만큼만 쳐주었다. 마침내 상병의 보따리에는 밑바닥에 유일하게 단 한 물건이,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절대로 꺼내지 않았을 마지막 보물만이 남았다.

“값을 매길 수 없어요.” 거미의 어린 목소리는 비꼬는 말투가 아니라 진심으로 곤혹스러워하는 말투였다. “산신령을 잡다니 이곳에서 정말로 고생하셨군요. 그런데 이게 뭐죠? 냄새도 이상하네요.” 오래된 것에서 떼어낸 몸의 일부, 창자의 끝부분 같기도 하였고, 초록색 담즙 주머니 같기도 하였다. “그날 저는 전우들을 잃었지만, 산신령 안에 있던 이것은 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낸 물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신께서는 사람과 사물의 이야기와 그것에 얽힌 추억까지 중요하게 여기신다니…” “이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페즈 군모를 어루만지는 상병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내가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 가치가 없었다고 지껄여! 네가 뭔데!” 단순히 충격을 받은 수준이 아니었다. 슬프기도 했고, 허무하기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못난 걸 왜 소란을 부려? 차례가 끝났으면 꺼져!” “저 자식 끌어내!” “나는 더 비싼 게 있다고!” 사방에서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정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상병보다는 두둑한 정산을. “입 닥쳐! 닥쳐! 나만 끌려왔어? 나만 끌려왔냐고! 똑같이 보람 있었고 가치 있었다고 몸뚱이 파는 놈들이…” 여기서 더 뭐라고 지껄어야 하지? 지금 나는 뭐라고 떠드는 것이지? 어떻게든 상병은 항변하려고 했지만, 거미가 먼저 자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 이유. 그러니까 당신에게 물어봤던 맨 처음 질문을 다시 물어볼게요.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또 어떤 값진 것을 손에 얻었나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를 쳐다보고 있는 다른 군인들. 그리고 거미의 눈은 많다. 너무 많다. 심지어 몇 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움직이고, 몇 개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없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이 없다고 했다고! 어디서 찾아야 하는데?” 거미의 목소리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건 당신이 찾아와야죠.” “내가요? 제가요?” “그건 당신이 찾아와야죠. 기다릴게요.”

말로는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없어 소리라도 질러보려는 상병을 누군가 거칠게 밀쳤다. 그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 비키지도 않고 시간을 끌었기에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무리는 나자빠진 그를 멀리 끌어냈다. 황금빛으로 가득 찬 모임의 중앙에서는 이런 말들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저들조차도 순서를 지키지 않았다. 각자 지껄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신이시여 보십시오. 제가 이곳에서 얻은 것은…” “황금처럼 빛나는…” “청춘의…” “비싸다! 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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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0 21:12
수정 아이콘
막연한 발상으로 시작해서 부족한 글을 쓰는데 조언 해주시고, 채워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특히 그림으로까지 도와주신 바단님께 특별히 감사를 표합니다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셨습니다: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ygs7318 )
Foxwhite
22/10/10 23:20
수정 아이콘
와 굉장히 몰입감있게 잘 읽었어요
글솜씨가 부럽네요
22/10/11 19:47
수정 아이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뒤로도 엄청나게 많으니 기대해주세요~ 이제야 시작입니다 흐흐흐.

아 저도 드디어 이제야 군대에서 전역을 한 기분이 드네요. 몇년간 이걸 써내려가지도 못하고 빠져나오지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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