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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8/30 16:42:31
Name aura
Subject [일반] 낡은 손목 시계 - 3





문득 이상한 긴장감에 떠밀려 눈을 떴을 때 불 켜진 방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불안한 박동을 느낌과 동시에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이 후각 세포를 짓이긴다.

곧 이어 사방을 새빨갛게 물들인 혈액의 향연, 그 주위로 갈기갈기 찢긴 아내의 잠옷 조각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살 조각들,



팔과 다리 그리고... 내 아내의 머리.



우욱.



인지하고 나니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먹은 것도 없어 게워낼 것도 없는 위장이 쓰라리게 요동친다.

위장을 넘어 식도를 타고,



우웨에엑! 우웩!



입으로 투명한 액체를 쏟아내다 곧 이어 노란 액체를 밀어냈다.

머리 속은 온통 하얘지고, 손과 발이 덜덜 떨린다.

자는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 때 문득 든 생각은 낡은 손목 시계였다.

분명 손목에 차고 잤을 터 인데, 손목이 허전하다.

지금 내가 기댈 것은 오직 그 낡은 손목 시계 뿐이다.

한 번만 더. 다 시 한 번만 더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 드는 구토감과 현기증을 억지로 억누르고 낡은 손목시계를 찾아 열심히 눈알을 굴린다.



젠장!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손목에 채워둔 시계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시계에 발이라도 달린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시계를 가져갔다?

합리적인 의심이다.



시계를 누군가 가져갔다면, 가져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단 둘 뿐이겠지.

내 아내를 다시 한 번 끔찍하게 살해한 '무언가'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내 아내, 윤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홀린 듯이 방 안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아내의 조각들을 찾아 모았다.



우욱.



제발 손목 시계가 있기를.

아내의 주검 조각을 모아야 하는 지옥 같은 순간이었지만, 오직 그 일념 하나만이 내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아슬하게 이어 놓았다.



다리에는 역시 없다. 그렇다면 팔목엔? 없다.

잘린 아내의 팔 아래 손이 꽉 쥐어져 있다.

팔의 단면이 매끄럽지 않고 찢어진 듯 지저분하다.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때문이었을까?

죽는 순간 아내가 느꼈을 고통에 가슴이 미어지 듯 가슴을 옥죈다.



미안해, 윤아.



나는 딱딱하게 쥐어진 아내의 주먹을 억지로 펼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경직된 주먹을 펴기 위해 힘을 내면 낼수록 눈에서는 비통한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아,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제발, 손 안에 시계가 있기를.



나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내의 손 안은 텅 비어있었다.



하하, 하고 미치기 직전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 작은 손으로 손목시계를 쥐어보았자 시계줄이 삐져나왔을 것을.

고통으로 인해 말아 쥔 주먹이 시리게 마음을 찔렀다.



작고 앙증맞다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내 아내, 윤이. 그런 아내가 만약 죽음의 순간에 시계를 숨기고자 했다면 숨길 수 있는 곳은...

있다.



아아, 나는 그것을 깨닫고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내게는 너무나 잔혹할 시간.

입이 남아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머리를 끌어 안고 오열했다.

미안해, 미안해, 윤아.

다만, 죽은 아내의 얼굴은 꽉 움켜쥔 주먹과 달리 평온했다.

그래서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어쩐지 아내의 입 속에 시계가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억지로 턱을 벌리고, 그리고 그 안 에는.

있었다. 내가 선물했던 아내의 낡은 손목 시계가!



아아, 제발. 아아, 제발 부탁이야. 제발!



미친 듯이 시계의 용두를 다 시 거꾸로 돌린다.

세계의 시간선을 반대 방향으로, 역천한다.

이 지옥같은 시선을 내게서 없애줘!



나는 느꼈다. 내 스스로 광기에 사로 잡혔음을. 그럼에도 나는 이 행동을 멈출 수가 없다.



아아아.



그것은 절규 같기도, 비명 같기도 나의 외침.

눈 앞이 점점, 서서히 하얘진다.

그제야 나는 나의 비명과 같은 절규가, 절규와 같은 비명이 하늘에 닿았음을 깨달았다.



다시 세상의 빛이 망막을 투과하여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2022년 10월 20일, 아내가 죽는 그날의 아침으로 돌아왔다.



으아아아악.

오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발작하는 듯한 나의 비명에 아내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자마자 흐느끼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흐으읍. 흐으윽.



평범한 소시민인 내겐, 견디기에 지나치게 무거운 형벌.

다시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발작할 수 밖에 없는 끔찍한 광경들.



윤아, 오늘은 그냥 회사에 가지마. 그냥 오늘은... 같이 있자.

오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휴. 오빠, 아무리 그..

아무리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그래. 그래도 윤아 오늘 하루만! 그냥 오늘 딱 하루만 이유 없이 같이 쉬면 안 될까?



말도 안 되는 땡깡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어떻게는 너를 지키고 싶어.

나의 말에 아내는 순간 멈칫, 굳어버렸다.

평소와 달리 쫓기 듯 절박한 나의 행동에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알았어. 하루 정도는...



아내는 마지 못해 나의 땡깡에 수긍했다.

집에 함께 하루 종일 머물기에는 지난 밤의 참혹한 광경이 아른거렸다.



같이 나가자. 여행 가는 거야.

무슨 여행이야 오빠. 딱 하루라고 했잖아, 이틀은 무리야. 그냥 같이 집에서 편히 쉬자. 응?



안 될 말이다.



멀리 말고! 그냥 근교로 놀러 가자. 인천도 괜찮고, 남양주나 이천은 어때? 아니면 가평도 괜찮겠다. 내가 회사에는 늦지 않게 데려다 줄게, 응?



단호한 아내의 태도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아내를 졸랐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그 재앙 같은 시간을 또 겪을 순 없으니까.



정말 오늘 왜 이래?

한 번만! 오늘 딱 하루 만이야. 응?



마치 다섯 살 난 아이 같은 억지에 아내는 비로소 마지 못해 내 제안을 승낙했다.



알겠어. 정말 난 몰라!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우린 각 자의 회사에 연차를 통보했다.

그리고 쫓기 듯 하루 짜리 여행 짐을 챙겨 다짜고짜 여행길에 올랐다.

가급적이면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아내는 기어코 인천 외에 양보는 없다고 통보했다.



날카롭게 쇠약해진 신경이 운전하는 데 자꾸만 거슬렸다.

꾸역꾸역 머리 속을 파고드는 불길한 생각들은 아내의 따뜻한 손을 쥐며 억지로 털어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도착한 인천 바다엔 드넓은 뻘이 펼쳐져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탁 트인 뻘의 시야가 잠시나마 마음을 차분하게 식혀주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오니까 좋긴 좋네.



아내도 제법 그 풍경이 마음에 들었는 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정리하며 미소 지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잃고 싶지 않은 미소다.



우린 바닷가로 나온 김에 한껏 기분을 냈다.

탁 트인 바다 옆 도로를 달리고, 함께 조개구이를 구웠다.



언제부터 인지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 사실 아침까지만 해도 오빠가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이젠 그냥 좋게 생각하려고. 가끔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네?



불안감에 다그쳐 데리고 나왔을 뿐인데도, 오히려 웃으며 나를 다독여 주는 소리.

아이처럼, 울보처럼 실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돌아가자는 아내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땡깡을 부렸다. 이미 방을 예약해 두었고, 취소한다 하더라도 환불은 어렵다는 내 말에 아내는 나를 째릿 흘겨보았으나, 이내 군말 없이 나를 따라 와줬다.



그 때 밖은 이미 충분히 어두워져 있었다. 스물스물 물드는 어두운 밤자락에 도무지 맨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나는 방에 들어가기 전 다량의 술과 안주를 구매했다.



다 마시지도 못할 술을 왜 이리 많이 사냐며, 아내의 핀잔도 들었지만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급하게 예약한 방 치곤 평일인 덕분 이었는지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꽤 넓은 크기에 에어컨이며 냉장고도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방에서 우린 흐릿한 불빛 만을 키고, 마치 연애하던 시절처럼 편히 재잘거렸다.

다만,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술이라면 마다 않는 아내가 술 대신 음료수만 마시고 있다는 것.



윤아, 웬일이야? 술을 안 마시고?

아, 그게...



쭈뼛거리는 아내의 태도에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원래라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야 하는 기쁨이,



에이, 사실 나중에 더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오빠! 사실 나 임신했어.



쾅! 견디기 어려운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내게 떨어진다.

아아, 아아.



뭐야, 그 반응...



나의 무반응에 아내는 잔뜩 시무룩해졌다.

미안해, 윤아. 평소라면 기뻐 날 뛰고, 환호 했을텐데...



나는 도저히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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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만레벨업
22/08/30 20:37
수정 아이콘
4편... 4편이 필요합니다!
붉은빛의폭풍
22/08/30 21:45
수정 아이콘
흐음... 부디 액자식 결말만 아니면 좋겠네요. 4편 가능한 한 빨리 보고 싶습니다!!!!
그럴수도있어
22/08/31 10:18
수정 아이콘
목은 메여도 손은 글을 쓰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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