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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5/23 11:32:55
Name Walrus
Subject [일반] [15] 프롤로그 (수정됨)
원체 말이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다보니,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것이 집 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님은 어미 아비의 도리를 다하시려고 밤늦게까지 밥벌이를 하셨고, 동생은 역마살이 낀 것 마냥 항상 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나는 주로 일기를 쓴 뒤 내 방 전등 밑에다 끼워 숨겨 놓거나, 어머니 화장품으로 장난을 치거나, 항상 부족했던 간식거리를 아껴 먹으며 하루종일 TV와 영화를 보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참고 기다리는 것들에 익숙해진 것은 아마도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때의 시간들을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르막길 집에서 달을 보며 이런저런 망상을 했던 기억이나, 집 맞은편 피아노학원에서 유치원을 다니며 피아니스트가 될거라고(집에 피아노도 없으면서) 소리쳤던 기억들, 애들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게 부끄러워 유치원 캠핑을 맞은편 집 창문에서 구경했던 기억도. 가끔 ‘그 때 진짜 행복했다’ 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면 ‘문디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라. 나는 그 때만 생각하면 진저리 난다’라고 하셨던 걸 보면 어머니는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어른들의 사정이었겠지. 어렸던 나와 동생은 집에서 항상 생각없이 즐거웠다. 그 땐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사를 몇 번 더 하고 나서부터는 집의 크기만큼 먹고사는 문제도 나아졌던 것 같다. 집에는 피아노가 생겼다.

그렇게 딱히 부모님 속을 썩힌 적이 없이 머리가 무거워졌다. 유치원을 다닐 때 꿈이었던 피아니스트는 어느덧 몇 번이나 바뀌었다. 프로그래머였다가, 소설가였다가, 만화가였다가. 그러던 중 중학생 때부터는 너무도 당연하게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앞 오래된 비디오가게에서 매일 500원에 예전 비디오들을 보면서, 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싶어졌다. 그 때엔 현장의 분위기나, 열악한 보수나, 가정형편 등등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질만한 나이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잘 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나는 조용하게 욕심이 가득한 아이였나 보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 영화제작부를 만들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의 제안으로 우연하게. 내 삶을 바꾼 큰 사건이 그렇게 친구에 의해 우연히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대부분 그런 적극적인 수동성에 따라 흘러갔다. 생각한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라 생각하지만, 살면서 가끔 뜻밖의 일들이 일어나면 나는 그걸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공부는 잠시 놔두고 그렇게 우연히 영화를 만들었다. 데이빗 핀처와 쿠엔틴 타란티노를 따라한 유치한 영화. 중학생 때 비디오로 파이트클럽을 보며 꼭 내 영화의 엔딩에는 건물을 폭파시켜야지 라고 생각했고,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를 폭파시키며 내 영화가 끝이났다. 나는 조용한 테러리스트였나 보다.

영화는 나름 반응은 좋았던 것 같지만,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같이 영화를 만들었던 친구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친다며 떠났다. 아마도 나는 정말 교무실을 폭파시켜 퇴학당하지 않는 한 학교를 그만두진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수능은 엉망이었다. 당연히 잘 칠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집 앞 독서실비를 1년치 결제했다. 1년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며 혼자 재수를 했다. 부산에 이례적인 한파가 불었던 겨울, 주유소에서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을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순대와 고기를 사서 친구 집 옥상으로 갔다. 친구는 벨벳언더그라운드의 1집 앨범을 들고왔다.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이 바나나앨범을 1집인줄 아는데 아닌거 아나? 바나나앨범은 앤디워홀이 돈 대주고 니코랑 같이 작업한 프로젝트앨범이거든. 사실 이게 진짜 1집
앨범이디"

"나는 이 앨범이 더 좋드라"

"나도"

고기를 구우며 친구가 말을 이었다.

"우리 대학 졸업하기 전에 유럽여행 같이 가기로 했잖아. 재석이랑 내랑 니랑. 우리 이러다 같이 갈 수 있겠나"

"야 가면되지"

"마, 니 나중에 부산 와가꼬 서울말 쓰고 그러지 마리. 알겠나?"

옥상에서 고기를 굽는지 내 손을 굽는지 모를 추위였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기억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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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draw
22/05/23 14:55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수만 올라가네요. 첫 댓글 달아봅니다.
22/05/23 15:49
수정 아이콘
앗 첫 댓글 감사합니다!
아구스티너헬
22/05/24 02:35
수정 아이콘
글잘쓰시는 분들이 항상 부럽습니다.
오강희
22/05/24 11:53
수정 아이콘
잔잔하게 울리는 글이네요. 글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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