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11/09 02:23:01
Name 글곰
Link #1 https://brunch.co.kr/@gorgom/151
Subject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7) -끝-
-2009-2014 : Goodbye Mr.Trouble / 단 하나의 약속 / Welcome To The Real World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이 신해철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을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 신해철 개인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N.EX.T는 대체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해체를 또다시 반복했고,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며,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은 말 그대로 망했고, 학원 광고 출연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였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이명박 정부 하의 국정원에서 관리하던 이른바 ‘좌파 연애인 블랙리스트’에 올라 유무형의 압력을 받은 바 있으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십여 년간 진행해 오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마저 종영을 맞이했다.

그 모든 일들이 뒤섞이면서 신해철은 어느덧 대중음악계의 주류에서 완전하게 배제된 지 오래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한때 영웅이 되고 싶어하던 소년은 이제 그 자신이 노래하던 것처럼 힘없이 몰락한 수컷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종말은 아니었다. 2012년, 신해철은 노무현을 추모하는 노래를 세상에 내놓는다.



꽃은 지고 달은 기울어 가네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고
날은 가고 맘은 아물어 가네
산 사람 살아야 하는 거겠지
(...)
우린 끝까지 살겠소
죽어도 살겠소
살아서 그 모든 걸 보겠소

-신해철, [Goodbye Mr.Trouble]



제목의 ‘Mr.Trouble’은 물론 노무현을 지칭하는 애증 섞인 별명이었지만, 동시에 전락한 사고뭉치로 간주되던 당시 신해철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이 노랫말을 통해 그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내면서도 담담하게 말한다. 끝까지 살겠노라고. 죽어도 살겠노라고. 살아서 그 모든 것들을 보겠노라고.

그는 세계와 맞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4년. 다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무려 6년 만에 신해철의 새로운 앨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4곡뿐이라는 구성은 과거처럼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중음악시장이 완결된 앨범에서 개별곡 위주의 소비로 변한 지 오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변명할 여지는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앨범에 실린 노래였다. 본래 아내를 위한 노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모두를 향한 노래로 완성된 [단 하나의 약속]은, 신해철이 실로 오랜만에 세상에 내놓은 자랑스러운 걸작이었다.



하나만 약속해줘 어기지 말아줘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
내 소중한 사람아
그것만은 대신 해 줄 수도 없어
아프지 말아요
그거면 돼 난 너만 있으면 돼

-신해철, [단 하나의 약속]



아프지 말라는 부탁은 암으로 투병했던 아내를 위한 당부이자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소망이었다. 또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엉망진창이 된 신해철 자신을 위한 위로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그를 사랑해 온 팬들을 위한 감사의 고백이자 선물이었다. 이 노랫말을 통해 신해철은 마침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인(成人)이, 완성된(成) 사람이(人) 되었다. 그는 다시금 담담하게 말했다. 한때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신은 믿고 있다고.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그 모든 단어들을.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and Love
It's you

-신해철, [단 하나의 약속]



하지만 앨범을 내고 불과 넉 달 후, 신해철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마흔일곱. 너무나도 어이없이 일어난 의료사고의 황망한 결과였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그가 생전에 만들던 노래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제 수능을 친 후 대학생이 되어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조카를 격려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비화를 지닌 이 노래는, 소년과 어른의 기로에서 오래도록 고군분투하던 신해철이 마침내 어른이 되어 과거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눈물은 거짓이 없어
땅에 뿌려진 만큼
너를 자라나게 할 테니

-신해철, [Welcome To The Real World]



그가 겪어온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늘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선도하던 시절에서 어둡고 절망적인 땅 속 세계까지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신해철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어른들은 흔히 말하곤 한다. 사회는, 세상은, 너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달프다고. 신해철이 겪어온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계는 소년을 냉혹하게 짓누르고 그가 가진 희망과 꿈을 빼앗으려 했다. 소년은 몇 차례나 쓰러져 좌절하고 방황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끝내 다시 한 번 일어나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답답해하지 말라고.

고독은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고
세상은 너를 길들이려 하기에
언젠가는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고
때로는 자신을 깎고 자르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흐느껴 울어야 하지만

바보처럼 운명이라는 말을 믿으면서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도록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걸어간다면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등불을 들고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새로운 세계로, 진짜 세계로
어서 오라고.




아직 넌
이제 시작이야
너만의 세상이 시작되는 거야
그토록 원하던 어른이 되는 거야
모든 질문과 대답이 있는 거야
두려워하지 마 답답해하지 마
Welcome To The Real World

-신해철, [Welcome To The Real World]



이것이 신해철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였다.
신해철에게서, 소년들에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21/11/09 06:55
수정 아이콘
1편을 봤을 땐 참 반가웠는데 어느덧 7편을 읽으니 참 씁쓸하네요. 정말 리부트가 된 느낌이었는데... 안그래도 넓었던 이마는 탈모로 더 넓어졌고, 배 나온 아저씨가 된 모습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반가웠는데... 돌아가시기 1달전에 나온 진중권의 문화다방 신해철 편이랑 사후 신해철 추모 방송이었던 강헌씨 편을 다시 들어봐야겠습니다.
김동연
21/11/09 08:39
수정 아이콘
시리즈 전부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닉언급금지
21/11/09 09: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든 글을 제 최애곡인 '길 위에서'를 흥얼거리며 읽었습니다.

거짓말쟁이 신해철, 70살 때 '50년 후의 내 모습' 불러줘야하잖아...
열혈둥이
21/11/09 10:49
수정 아이콘
도전, 희망, 꿈을 얘기하던 싱어송라이터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이 계속 되면
아웃풋이 제대로 나올수가 없었겠지요.
증오와 혐오가 메인스트림인 지금 이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해철이형이 보고싶어요.
21/11/09 18:56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가끔 불후의명곡 신해철 1주기 편을 보는데 다시 봐야겠네요. 정말 그립습니다. 마왕!
세인트루이스
21/11/09 22:13
수정 아이콘
강헌씨가 나온 진중권 문화다방 신해철추모편을 다시 들어보면서 생각해보니 신해철 사망이후 헌정앨범이 나오진 않았네요. 그나마 하현우씨가 복면가왕에서 음악대장으로 신해철의 음악들을 많이 불러줘서 다시한번 그의 이름이 회자되었네요.
人在江湖身不由己
21/11/10 08:1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신해철이 다시 저음의 목소리로 저에게 말을 거네요. 하하
21/11/20 15:50
수정 아이콘
끝이 아닌 시작임을.

미스터선샤인 마법같은 대사중에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오.
달, 별, 꽃, 웃음, 농담.
오늘 내 죽음의 이유는 화사요.

글곰님 글을 읽고 신해철이 믿었던 포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셍각하면서 저 대사가 생각나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4021 [일반] 김밥 먹고 싶다는데 고구마 사온 남편 [69] 담담17398 21/11/11 17398 95
94018 [일반] 헝다그룹은 파산한걸까요? [22] 롤링씬더킥17935 21/11/10 17935 1
94016 [일반]  22세 간병살인 청년 강도영, 2심도 존속살해 징역 4년 [84] 삭제됨19542 21/11/10 19542 3
94013 [일반] 영화 자체보다 OST가 더 좋은 '007 No Time To Die' (스포일러 주의) [4] 아난9519 21/11/10 9519 1
94012 [일반] [스포] "남부군" (1990), 당황스럽고 처절한 영화 [52] Farce12331 21/11/10 12331 21
94011 [일반] 노키즈존이란 상품은 허용되어야 할까요? [106] 노익장13829 21/11/10 13829 15
94010 [일반] 부동산 중개수수료 협의 언제 할 것인가 [56] 밤공기14609 21/11/10 14609 4
94009 [일반] 넷플릭스 - 아케인 재미있네요(노스포) [32] This-Plus13171 21/11/10 13171 6
94008 [일반] [도로 여행기(혹은 탐험기?)] 59번 국도 부연동길 [4] giants10930 21/11/10 10930 14
94007 [일반] [책이야기] 제로 투 원(Zero To One) [12] 라울리스타8454 21/11/10 8454 11
94006 [일반] 상속재산의 '형제자매 유류분'이 없어집니다 [21] 인간흑인대머리남캐14420 21/11/10 14420 5
94005 [일반] 귀멸의 칼날 다보고 적어보는 후기 [38] 원장12041 21/11/09 12041 2
94003 [일반] 인텔 12세대를 보고 고민하는 분들에게 (시스템 교체?) [65] SAS Tony Parker 14157 21/11/09 14157 0
94002 [일반] [속보] 경기도 여주시 대규모 정전...아파트 단지·교차로 신호등 피해 발생 [41] Leeka19017 21/11/09 19017 4
94001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7) -끝- [8] 글곰9757 21/11/09 9757 33
94000 [일반] 한국드라마 제4의 전성기는 오는가? [21] 촉한파14886 21/11/09 14886 7
93997 [일반] [역사] 양모 후드티가 후드티의 근본? / 후드티의 역사 [14] Fig.118352 21/11/08 18352 9
93996 [일반] 애플티비를 굴리면서 써보는 애플유저 기준의 후기 [64] Leeka16363 21/11/08 16363 1
93993 [일반] 유튜버 아옳이의 주사 부작용 사건과 관련하여.. [28] 맥스훼인18755 21/11/08 18755 8
93989 [일반] 모더나 백신 맞고 왔습니다 ! + 추가 [72] 통피11610 21/11/08 11610 2
93988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6) [6] 글곰8946 21/11/08 8946 14
93986 [일반] 국토부, 요소수 안정될때까지 불법 차량 단속 연기할 것 [98] 오곡물티슈19602 21/11/07 19602 7
93985 [일반] 요즘 코카콜라 한국 광고, 마케팅을 보면서 느낀점... [25] 블랙리스트16442 21/11/07 16442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