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비행기에서 비틀즈의 음악을 듣고 문득,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지난날...자신의 젊음과 사랑을 머금었던 과거를 추억하며
그는 생각하고 고뇌해본다. 무엇을 상실했는가..무엇을 얻었는가..
소설 ‘상실의 시대’는 이렇게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하나씩하나씩 조용히 잃어야만 했던 것들을 추억하며 시작된다.
나에게 이 책은 ‘젊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추억하면 할수록
아련한 기억 속에서 입가에 메아리치기만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그가 추억하고 있는 젊음 속에서 나 역시 청춘의 고뇌를 함께 헤매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을 얻을 수 있었다. 미약하지만, 나도 내가 지나온 젊은날속에서
그토록 열망했었던것들을 하나하나 이룩하고, 그걸 잡으려고 노력하고,
그러나 그렇게 손에 잡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 멀어져가기만 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오히려 날 강하게 할뿐이라고...
더욱더 강한 고통을 내게 내려달라고 매정한 하늘을 향해 스스로 외쳐보기도 하고,
이런 게 철이 든다는 거구나, 이렇게 커가는 거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울어본적도 있었다.
가끔은 이토록 성장통이 고되고 아픈 것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어린아이인 채로
이대로 지내고 싶다는 어리석은 어린이의 어리광을 부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상실의 시대는 이렇게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관문이며,
또한 이 시기를 이겨내야만 더욱 크고 넓은 곳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이 책은 조용히 내게 말해주었다.
시간이 흘러서 서른즈음에, 지금 이 시기를 추억하게 될 날을 어렴풋이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라는 무궁무진한 나만의 상상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현재를 추억한다는 것,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현재를 잡아보려 하지만 시간은 늘 과거로 도망쳐가고,
우리는 그 과거를 그저 바라 볼 수밖에 없다.
운명의 세자매가 풀어내는 시간의 실타래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그저 망각에 갇혀져서 그렇게 상실해가는추억을 저울질해가는 동물이다.
지금 내가 숨 쉬는 이 시간도, 차츰차츰 과거로 달려가며
언젠가는 이 순간을 추억하게 된다는 일이 정말 재밌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확실한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주는
추억이란 이름의 모순적인 존재가 내게 숨을 불어넣어주고 가슴을 뛰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상실의 시대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주인공의 그런 추억 속에서 숨 쉬고 있다.
모두 다 세련된 청춘을 구가하는 젊음을 내뿜고 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화려하고,
너무나 불안해서... 그래서 그들은 슬프다. 어째서 그렇게 젊은날의 초상은 모두에게
슬프고 힘든 기억일까? 그러나 그 추억은 어떻게 항상 아름답게 간직되어 질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잠시 여유를 가지고 그 답을 조금은 찾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우린 기억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언제나 상실할 수밖에 없기에,
너덜너덜해지고 잊혀져서 다시 꺼내보려 해도 꺼내기 힘든 기억이 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이름 부르며, 그 추억을 다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잡아내려 하는 몸부림 속에서
기억은 새로이 다듬어지게 된다. 점점 아련해져가는 그 추억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빛나고있는
기쁜 우리 젊은날의 모습을 상실의 시대는 무척이나 잔잔하게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그려내어 주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 같은 이에게도
깊게 울려퍼질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젊음과 청춘의 한가운데에 서서 고뇌로 방황하고, 그 방황으로 솟구쳐오르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해 폭발시켜 버릴 수밖에 없는 경험은 참으로 세대여하와 구격을 막론하고
트렌디(trendy)하면서도 트레디셔널(traditional)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은근히 이 소설의 배경 속에서 정치적인 이념대립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도 매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 같다. 과도기의 한가운데에 맞서 개화기의
시작을 외쳤던, 유신세대와 386세대의 대립과 혁명은 과거, 지성과 젊음의 상징이었고,
그런 운동권 문화가 이 소설 곳곳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걸 느끼면서 386세대이후,
그들 아래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나 그런 운동권 문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게 된
우리 세대의 슬픔과 과거 세대들의 아픔과 희열을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했던 시간과 공간들을 하나, 둘식 잃어가며
주인공은 결국 마지막에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곳은 어디인가? 라는 주인공의 자전적 물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내리치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토록 보이지 않는 길만을 바라보며, 고뇌하고 힘들어하고 방황하지만, 막상 지금 이순간,
현재의 위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면...
내게 젊은이란 최고의 자산이지만 때때로 그것이 너무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사랑에 애태우며, 진리에 목매이고 항상 빛과 소금을 갈구 할 수밖에 없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청춘... 하루하루 화려하고 밝게 빛나지만 그만큼 너무나도 짧아서 슬픈...
그래서 더욱 더 빛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아스라이 사스라져가는 이 젊음을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책... 이렇게 오늘도 내 청춘의 한 자락을 상실해 가지만,
나에겐 잃어버린 청춘보단, 앞으로 기쁘게 맞이할 나날들이 더욱 많이 남아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절대 헛되이 과거로 보내지 않고,
언젠가는 ‘내게도 이런 때가 있었지..’ 하며 조용히 웃으면서 나의 상실의 시대를 추억하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내 청춘, 건투를 빈다!
정확히 제가 고2때 읽었던 책이네요.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분명 저책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이었지만 coolasice님의 글을 보며 다시 한번 아련한함과 같은 것이 마구 솟아오릅니다. 얼마전 천사와 악마를 읽은후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고민을 접을 수 있겠습니다.
사진도, 추억도 전부 지나가는 과거를 잡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일 뿐이죠. 그 시절을 기억하고, 또 그 시절이 행복했음을 자신의 머릿속에 상기시키기 위해. 현재를 부정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금 현재를 다시 행복했던 시간으로 상기시키기 위한. 끝없는 반복.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답니다. 헙헙. 상실의 시대 역시 그런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봐요. 언제든지 당장 앞을 보지 않는다면, 주인공 역시 나오코에게 계속 얽매여있었다면, 하루키는 비극적으로 결말을 낼 수밖에 없겠죠.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편보다는 단편, 단편보다는 에세이가 단연 제맛(?)이지만,
(하루키의 에세이는 야금야금 가볍게 귤까먹듯 읽는 기분이 참 쏠쏠합니다.)
'상실의 시대'는 고교시절부터 개인적으로 많은 추억이 담긴 소설이라 좋아합니다.
'상실의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은 '댄스 댄스 댄스'도 있지만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도 있죠.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상실의 시대'와 거의 복사와 같은 모티브를 갖고 태어난 소설이지만
나오코 이후의 제 3자와 같은 존재가 나오게 됩니다.
즉, '상실의 시대'가 허무의 느낌이라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치유의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