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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왜 말을 잘 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From the Closed World to the Infinite Universe"라는 책과 "유한성 이후"입니다.
이 글은 big joel이라는 유튜버의 The Death of YouTube Skepticism라는 영상의 내용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왜 무신론자의 과격한 신자 비판으로 이루어졌던 예전의 회의론자 유튜버들이 어떻게 sjw들을 비판하는 자들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그 이유로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미적인 것의 공통점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영상에서 주목할 점은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나라들에서 나온 정치화 현상이 얼마나 비정치적으로 설명 가능한지에 있습니다.
무신론자와 같은 미적 구조라는 것은 아주 비정치적인 것임에도 우리나라의 상황과 충분한 유사성을 보입니다.
이 사례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정치적인 현상을 정치적으로 봤던 사례들을 굉장히 다른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정말로 "미적인 것"의 사례처럼 단순한 인식의 오류로 드러날 뿐, 어떠한 정치적 언설, "사상적 동기" 따위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aesthetic, 미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epistemology, 인식론이라는 용어가 더 적당해 보입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보다 논리적인 정합성과 사실만을 추구하게끔 보는 방식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확히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미적 구조는 사라질 수 있지만, 이러한 인식론적인, 인식 틀과 관련되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인식론에서 가장 대표되는 것은 논객의 존재가 굉장히 중시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논객의 중요한 역할은 사실의 전달과 함께 일어나는 상대방에 대한 조소입니다.
그 영상에서 미학적이라고 말하는 내용은 논객이 중시되었을 때 나오는 미학적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논객 인식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도킨스 인식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논객 인식론을 가장 고착화시킨 것은 책 "유시민의 글쓰기 강의"와 영화 "박하사탕"와 같은 종류의 나레티브였습니다.
이 논객 인식론을 뒤덮고 있는 구름의 전부는 한 방울의 단어, "팩트"로 응축됩니다.
팩트는 가장 성공적인 일베용어입니다.
팩트라는 용어 자체에 상대방에 대한 조소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팩트는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않겠다."와 같은 뜻입니다.
이제 논객 인식론의 남은 파편들이 정치 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상대편에 대한 조소와, 일반적 인식 과잉이 그 예입니다.
이 글은 이러한 내용이 전혀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의 목표는 그 논객 인식론의 오류를 직접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 글은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제논의 역설입니다. 제논의 역설의 해결 방법이 진실로 매우 복잡하고 이상한 것이었음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볼츠만적 사유입니다. 볼츠만적 사유가 무엇인지를 보이고, 볼츠만적 사유가 왜 중요한지를 알린 뒤 볼츠만적 사유가 제논의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임을 알립니다.
이것은 일정 기간 이전의 커뮤니티 사이트의 세계관을 알고 있을 때 가장 잘 읽힐 수 있는 글이고, 이상해 보이겠지만 그것만을 염두해 두고 쓰여진 것입니다.
내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 글만이 자립해야 합니다.
결국 여력이 없어 더 쓸 수 없었지만 중요한 내용은 충분히 드러냈습니다.
글을 잘 못 썼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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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은 미분의 개념과 운동의 개념을 고안한 근대 고전 물리학의 발달에 의해 반박되었다. 제논은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면서 물체가 이동한 거리만을 고려하여 물체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물체의 이동은 움직이는 데 걸린 시간으로 움직인 거리를 나누어서 속도를 구하여 비교해야 한다. 즉 물체의 이동은 속도에 의해 표현된다.
수학적인 해결법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무한등비급수를 이용할 수 있고, 철학적인 해결법으로는 베르그송이 해결한 방법인 운동은 분할 할 수 없고 제논의 분석은 운동 그 자체가 아닌 운동이 지나간 궤적을 분석하는 것 뿐이라는 반박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것은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제논의 역설의 반박 방법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반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알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반박을 자세히 설명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설에 나와 있는 더 깊은 토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 역설을 진짜로 푸는 방법을 설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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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나의 방법을 제거해봅시다.
철학적 문제를 제외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오직 과학적인 문제와 수학적인 문제에 맡겨서 상황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물리학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물리학을 공부함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가망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런 철학적 문제에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수리물리학의 방정식으로 씌어지게 될 것이다."
논리와 확실성을 추구한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철학적인 방법은 될 수 있는 한 제거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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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에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먼저 제시하겠습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거북이를 아킬레스보다 100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10m를 가고,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스가 10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1m를 나아간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거북이는 움직이므로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 위키피디아
제논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분명 잘못 전제한 두 가지의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하나는, 저기에 있는 해결 방법이 말한 것처럼, 물체의 운동에서의 거리만을 고려했지 물체의 운동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라는 개념에서 시간이 필요함에도 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떠한 값을 무한하게 더하는 것의 답이 필연적으로 무한해지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무한히 더한다는 것으로 무한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이것을 무한등비급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역설이 전부 반박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논증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전부" 반박되었다고 하기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단지 전제일 뿐이므로, 역설에서 문제가 된 전제가 고쳐진 새 역설을 보여준다면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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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금 상황에서 제논의 역설이 진짜로 어떻게 적혀 있었는지 말하는 게 좋은 것 같네요.
이 역설이 온전히 남겨져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우리가 알던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논의 역설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운동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움직이는 것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에 앞서 먼저 그 중간에 도달해야만 하기 때문에 운동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관한 논변이다.”
첫번째 역설은 이분법의 역설입니다. 시작점 A에서 목적지 B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A로부터 B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선분 AB의 중점 C를 통과해야 하고, 또 선분 AC의 중점 D를 통과해야 하고, 이렇게 무한개의 중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의 방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선분 AB의 중점 C를 통과해야 하고, 또 선분 BC의 중점 D를 통과해야 하고, 이렇게 무한개의 중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역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른바 아킬레우스의 역설이다. 달리기 할 때에 가장 느린 자는 가장 빠른 자에 의하여 결코 따라잡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따라잡기) 전에 쫓는 자는 달아나는 자가 출발했던 곳에 도착해야 하고, 그래서 더 느린 자가 항상 약간이라도 앞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역설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입니다. 아킬레스는 조금이라도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위치에 닿았을 때, 거북이는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가 있을 것이고,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테미스티오스라는 주석가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이 부분에 “가장 느린 자” 대신 “거북이”로 바꿔서 주석을 달았는데, 이 이후부터 아킬레스와 거북이란 말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는, 움직이는 화살이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는 데서 나온다.”
세번째 역설은 화살의 역설입니다. 시간은 최소의 단위인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논은 말합니다. 이제 쏜 화살은 움직이거나 멈춰 있어야 하는데, 만일 화살이 움직인다면 순간은 적어도 어느 순간의 시작점이란 부분과 끝점이라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최소의 단위인 ‘순간’을 분할할 수 있다는 얘기로 모순이 되므로 화살은 정지해 있어야만 합니다. 날아가는 화살은 각 순간마다 정지해 있고, 정지로 이루어졌으므로 운동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은, 지금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거의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글 이후부터는 이 역설들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언급되고 서로 바뀌어가며 쓰게 될 것이니 이 점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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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논의 역설이 저 두 가지 문제점에 어떻게 대응하는 지를 생각해봅시다.
첫번째 지적은 물체의 운동에 필요한 시간이란 개념을 도입한 속도가 그렇게 잘 정의가 되지 않았다고 대응할 것입니다.
화살의 역설을 생각해보죠. 화살의 속도가 무엇인지 확인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제논이 정지되어 있다고 말하는 화살은 그 시간이 “지금들”에서의, 순간으로서의 지금입니다. 직선에서 점의 길이가 0이라고 하는 것처럼, 여기서 나온 시간은 0입니다. 정지되어 있다고 말했으니 거리는 0이죠. 이 화살의 속도는 0/0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값은 정해지지 않는 값이고, 따라서 아직까지 문제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지적은 무한히 더한 값이 무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이 무한히 더한 값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무한급수의 값이 유한하느냐 무한하느냐를 두고 수렴한다, 발산한다고 하는데, 발산하지 않는 무한급수가 있다는 사실이 지금 이 급수, 100미터를 달려간 뒤 10미터를 달려간 것을 반복한 이 급수가 발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급수가 수렴하거나 발산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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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다른 제논의 역설에 대한 논박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는 시간이나 공간이 플랑크 시간, 플랑크 길이로 나뉘어져 있다는 물리학적인 논박입니다. 플랑크 길이라는 게 있어서 이것이 나뉘어질 수 없으니 무한히 나뉘어지지 않으므로 제논의 역설은 풀려진다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위에 있던 대응에 대한 재반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렴판정법을 도입하면 이것이 수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하급수의 수렴판정법을 쓰면 100m부터 뛰어간 아킬레스는 길이가 1/10만큼 줄어들으니까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0/0이 되는 화살의 경우에 대해서도 현대의 미분법을 사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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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박들은 사실 잘못되었습니다.
첫째로, 플랑크 길이와 플랑크 단위에 대해서는, 이것이 사실 이런 의미를 전혀 지니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플랑크 길이는 플랑크 상수로부터 정의되는데, 광자의 에너지와 진동수의 관계로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나뉘어져 있다는 있다는, 이산적이라는 논의는 오직 이것을 쓰는 성질에서 나올 뿐입니다. 광자가 내는 에너지가 양자화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연속적이었던 현상들이 계단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것이 에너지 그 자체의 양자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플랑크 길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랑크 길이는 빛의 속도로 가는 광자가 플랑크 시간만큼 간 거리로 정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역학이나 중력의 공식들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입니다. 그래서 플랑크 길이가 의미 있는 최소한의 거리라고 불리게 되죠. 하지만 이것이 플랑크 길이가 우주의 최소 길이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보죠. 어떤 외계인이 지구를 관찰합니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아파트에서 내려갈 때 계단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계단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계단과 그 위에 있는 계단 사이에 있는 의미 없는 공간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계단이 나와 있는 “의미 있는” 공간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플랑크 길이가 우주의 최소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파트에서 계단을 사용한다”에서 “아파트의 공간 자체가 이산적이고 단절적이다”를 이끌어낸 외계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는 이산적일까요 연속적일까요? 이것에 대한 물리학자의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플랑크 길이만으로는 이 논의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험상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물리학자들은 이에 대한 이론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물리학자인 헤르만 바일의 논증을 살펴볼까 합니다. 헤르만 바일은 공간이 이산적이게 된다면 큰 결함이 생기기 때문에 공간이 연속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큰 결함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있는 공간이 사각형으로 구성된 이산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이런 상태에서 직각삼각형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이산적인 공간에 가로로 8칸, 세로로 8칸인 직각삼각형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직각삼각형의 대각선은 사각형의 이산적인 공간에 있으므로 가로, 세로와 같은 8칸을 가지게 됩니다. 사각형이 더 촘촘해져서 10칸, 15칸, 30칸으로 삼각형을 만든다고 한들 똑같이 대각선은 가로나 세로와 같은 길이를 가질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빗변의 길이가 n√2 -n만큼의 차이가 가까워지지 않은 채 계속 나므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공간은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죠. 따라서 공간은 연속적이라는 논증입니다.
플랑크 길이나 이산적인 공간을 가정하므로 풀린다는 결과는 틀렸거나 더 이상한 문제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다른 논박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렴판정법을 쓰면 이 등비급수가 수렴한다는 것은 극한의 정의가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판정법이 기하급수 판정법이든, 근 판정법이든, 비 판정법이든 극한의 정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가 먼저 물어보아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극한값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극한값이 무엇인가를 따지기 위해서 현대 수학은 엡실론 델타 논법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100m 뒤에 10m를 뛰어간 아킬레스를 생각해볼 때, 여기에서 쓰이는 엡실론 델타의 내용은 이것과 같습니다.
“임의의 e>0에 대하여 M>0이 존재하여 x>M이면 항상 dist(f(x)-L)0에 대해, x가 충분히 커진다면 L-f(x)0인 임의의 시간 e에서 거북이는 3e의 거리를 이동하며 아킬레스는 4e의 거리를 이동하며 파리는 10e를 이동하므로, 이들이 만난 시간이 지난 뒤의 임의의 짧은 시간에 파리는 거북이와 아킬레우스 사이를 왔다갔다할 것이다. 이때 파리는 어떻게 이동하는가?”
전 문제에 답이 있어서 이 문제에도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파리는 그 뒤에도 어느 곳이든, 어느 쪽이든 있게끔 답이 나온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하나의 점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거북이와 아킬레스와 파리가 전부 만나는 때가 있다면, 파리가 거북이와 아킬레스를 앞서가거나 뒤서가 영영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임의의 시간 e로 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논증은 제대로 된 반박일까요? 이 문제는 불특정한 문제고, 또한 전의 문제도 불특정한 문제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러한 supertask와 제논의 역설은 문제가 되는 부분이 다르므로 제논의 역설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논의 역설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짐에도 supertask의 사례들은 단계마다 달라지는 이산적인 것이므로 제논의 역설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Adolf Grünbaum이 제시한 “스타카토 제논의 역설” 이후로는 없어졌습니다. 아킬레스와 같이 뛰어서 도착점에 같이 도착하는 육상선수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시간의 반을 쉬는 데, 다른 시간의 반을 아킬레스의 2배의 속도로 뛰는 데 써서 구간의 1/2을 아킬레스와 같이 도달합니다. 또다시 반을 쉬고, 반을 뛰어서 구간의 3/4을 아킬레스와 같이 도달합니다. 이것을 반복하여 아킬레스와 같이 도착하는 육상선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킬레스와 이 육상선수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supertask에서 나오는 문제와 그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Ross–Littlewood paradox가 있습니다. 이도 또한 같은 종류의 supertask 중 하나인데, 답변이라고 제시되는 것이 극명하게 다릅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오 1분 전, 빈 꽃병과 무한히 많은 공이 있다. 첫째로 정오 1/2분 전에 10개의 공이 꽃병에 추가되고 1개의 공이 제거된다. 둘째로 정오 1/4분 전에 10개의 공이 꽃병에 추가되고 1개의 공이 제거된다. 남은 간격에 무한한 반복을 한다. 일이 끝났을 때 꽃병에 공이 몇 개 들어 있는가?”
처음 나오는 의견은 이 꽃병에 공이 무한히 많다는 것입니다. 10개의 공에서 1개의 공을 제거하므로 9개의 공이 추가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Littlewood는 예상과 반대로 이 꽃병에는 공이 없다는 의견을 세웠습니다. 그는 공에 숫자를 적어낼 경우 더 명료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에 숫자를 적어서 다시 이 문제를 보았을 때, 1,2,3,4...라 적힌 공이 처음에 1부터 10까지 추가된 뒤, 1을 제거하는 것, 다시 11부터 20까지 추가된 뒤, 2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어떤 n을 제시해도 n번째 상황에서 n이라 적힌 공이 제거가 되므로 이 꽃병에는 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다른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어떤 방법으로 공을 제거하는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수의 공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8개를 남기고 싶다면, 1부터 10까지 추가되었을 때 1부터 8까지 남겨둔 뒤 9를 제거하고, 11부터 20까지는 10을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일이 끝났을 때 8개만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조작으로 모든 자연수에 대해서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이 이 의견입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불특정적이며, 일이 끝날 때의 상황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일들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과도 다른 의견인데, 모든 supertask의 역설이 불특정적이기 때문이라면 이렇게 주장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온 마지막 의견으로 Jean Paul Van Bendegem의 의견이 있습니다. 문제가 잘못 구성되었다는 의견입니다. 이것은 이 문제로부터 supertask의 구성 자체를 의문시하는데, 무한히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정오라는 시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정오에 공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정오에 도달한다는 것을 가정하므로 질문이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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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강조하기 위해 Busy Beaver에 대한 언급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계산을 하고, 기계도 계산을 하지만, 계산에 대한 명백한 정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산이 무엇인지를 형식화해서 어떤 결과를 보여줬고 계산의 정의에 부합할지도 모르는 어떤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이것을 튜링 머신이라고 부릅니다.
튜링 머신은 헤드와 테이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테이프는 네모 칸으로 이루어져 0이나 1 등의 기호를 쓸 공간이 있고, 이는 무한한 네모 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헤드는 기계이거나 사람이고, 규칙에 대해 따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계산하는 방식은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기호를 읽는 것, 기호를 쓰는 것, 기호 처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구별하는(더하느냐, 곱하느냐 등등의) 마음의 상태.
이것에 따라 튜링 머신은 계산하는 방식을 이와 비슷하게 나누고, 이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기호를 읽는 것, 기호를 쓰거나 바꾸는 것, 다른 네모 칸으로 이동하는 것, 다른 상태로 바꾸는 것. 헤드는 이 방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튜링머신은 작동하다가 멈추는 것이 있고 멈추지 않고 계속 작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멈추는 경우 halt가 되었다고 합니다. 멈추지 않는 것을 loop라고 합시다.
Busy Beaver는 이 튜링 머신에 대한 한 간략한 설명을 위해 나왔습니다.
상태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헤드라는 것이 카드를 사용하여, 카드에 나오는 규칙을 따른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무한한 테이프는 처음에 모두 0이라 적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카드는 각각 번호표를 가지고 있고, 카드의 갯수는 n개에 카드 0을 포함한 n+1개입니다.
헤드는 헤드 아래에 있는 숫자를 읽습니다. 카드는 0이 적혀 있을 때와 1이 적혀 있을 때를 나누어서 0이 나왔을 때와 1이 나왔을 때 다르게 행동하기 위한 규칙이 적혀 있습니다.
행동하는 규칙은 오직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헤드 아래를 0이라고 쓰라거나, 1이라고 쓰라는 두 가지 행동 중 카드에서 적혀 있는 것을 하는 행동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헤드를 왼쪽으로 한 칸 이동하라거나, 오른쪽으로 한 칸 이동하라는 두 가지 행동 중 카드에서 적혀 있는 것을 하는 행동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카드에 적혀 있는 숫자에 대응되는 번호표의 카드를 가져와서 그 상태로 바꿔 다시 카드에 나오는 규칙을 따르라는 행동입니다.
카드 0은 위에 있는 아무 규칙도 가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카드 0을 가져오라는 카드가 있어 카드 0을 가져오면, 그 뒤 카드 0은 halt하는 역할만을 담당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두 가지 결과만이 일어납니다. 과정 후 카드 0이 나와서 halt가 되거나, 카드 0이 나오지 못하고 loop가 되는 일입니다.
카드 0을 제외한 n개의 카드에 대해 규칙을 변경해서 결과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카드 0을 제외한 n개의 카드에 대해, n개의 카드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규칙들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 중에서, 가장 많은 과정 뒤 halt가 된 경우를 선택하고, 이 경우의 halt가 될 때까지의 과정의 수를 n에 대한 Busy Beaver 수, 간략히 말해 BB(n)이라 부릅시다.
BB(n)을 알게 된다면, n개의 카드와 카드 0으로 이뤄진 프로그램이 halt하는지 loop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halt한다면 BB(n) 이하의 수에서 halt가 될 것입니다. BB(n)에서도 halt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전부 다 loop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중요한 점은, 이 Busy Beaver 튜링 머신은 위에 있는 일반적인 튜링머신을 포함한 모든 다른 종류의 튜링머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Busy Beaver 수는 특이한 점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n에 대한 Busy Beaver 수를 도출해낼 수 있는 알고리즘은 없습니다. 이것은 n을 대입하여 BB(n)을 도출해낼 수 있는 튜링머신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선 반대로, 튜링머신이 모든 n에 대해 BB(n)을 알 수 있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Busy Beaver 튜링머신은 일반적인 튜링머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므로 튜링머신으로 풀고 싶은 문제를 어떤 m개의 카드들과 카드 0으로 이뤄진 Busy Beaver 튜링머신의 프로그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m에 해당되는 BB(m)을 알고 있으므로 이 프로그램이 halt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모든 BB(n)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다”는 말은 명료하지 않습니다.)
이럴 수 있는 이유는 BB(n)이 빠르게 커지기 때문입니다.
BB(6)은 하노이의 탑으로 유명한 2의 64승 빼기 1보다 크고, BB(17)은 그레이엄 수보다 큽니다.
또한, Busy Beaver 수는 수학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제시합니다.
수학에는 이러한 관점이 있었습니다. 책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서 나온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모든 종류의 도형이 연결망 공식을 만족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가장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은 실제로 모든 종류의 도형을 다 그려보고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가능한 도형이 이 공식을 만족해야만 연결망 공식을 하나의 법칙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과학 분야에서는 이런 식의 증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수학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 공식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종류의 도형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다. 오일러가 시도했던 방법도 바로 이것이었다.”
“오일러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는 이와 비슷한 논리를 사용하여 증명하려고 했었다.”
무한히 많은 모든 정수에 대한 정수론의 난제에 있어, 개별적인 정수에 대한 경우를 일일이 확인하여 증명하려는 방식은 수학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무한한 사례를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Busy Beaver 수를 이용하면 정수론 등에 있는 난제를 유한하게 푸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리만 가설과 같은 풀리지 못한 가설을 그와 동치인 countable(셀 수 있는, 가산의)한 경우들 중에서 반례를 찾는 다른 가설로 바꿉니다. 리만 가설의 경우 이에 해당하는 자연수에 대한 한 부등식 문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가설에 대한, 순차적으로 값을 넣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이제 어떤 튜링머신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m에 대한 Busy Beaver 튜링머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BB(m)을 알고 있다면, BB(m)이 지났을 때 halt가 되었을 경우 반례를 찾은 것이고, 그 뒤로도 halt가 되지 않았으면 loop이므로 반례가 없다는 것을 찾게 됩니다. 이를 이용하여 바꾼 부등식 문제에 직접 BB(m)까지 넣을 경우 반례가 없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물론 실용적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으나, 유한한 수라는 점에 대해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문제는 수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공리인 ZFC와 관련된 것입니다. 공리 체계인 ZFC 내에서는, BB(1919)의 값이나, upper bound(상계. 보다 더 높은 값과 비슷한 의미)를 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값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수에 대해 그 수가 BB(1919)보다 크냐는 문제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ZFC가 풀 수 없는 문제인 “ZFC는 일관적이다”라는 문제를 Busy Beaver 튜링머신으로 바꿨을 때의 n이 1919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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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떤 한 러시아 수학자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합시다.
BB(1919)는 숫자가 아니라고 한다고 말입니다.
숫자가 computable하지 않는다면 숫자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고 봅시다.
그 때 그 사람 앞에서 반박할 수 있는 자료가 있을 수 있나요?
이 정도로 큰 수 앞에서, computability가 사라지는 숫자 앞에서라면 이견이 존재할 수 있고,
단지 정의상의 문제가 될 뿐 그 어떤 것도 명확한 해결법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BB(1919)는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한 답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A. BB(1919)는 숫자가 아니다.
B. BB(1919)는 숫자이지만, upper bound가 존재하지 않는다
C. BB(1919)는 숫자이고, upper bound가 존재하지만, ZFC 내에서 이를 풀 수 없다
D. BB(1919)는 숫자이고, upper bound가 존재하며, ZFC 내에서 이를 풀 수 없지만, ZFC에 일관적인 모델이 있어 upper bound를 풀게 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 수도 있고 upper bound를 풀지 못하게 하는 모델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혀 문제로 두지 않습니다. 수학의 이론에 대한 어떤 학파와도 큰 관련이 없는 다른 종류의 문제입니다.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혀 문제로 두지 않는 이유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신경쓸 뿐, 이러한 문제는 문제로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견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것을 위해 제기되었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D를 선택하는 사람일수록 수학에 대해서 “공리에 대한 연역으로 사실이다”라는 입장을 취하기 곤란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공리를 강조하여 논의를 끝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 앞에서는 강조하는 곳을 뒤바꾸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무한이 무엇인지에 대해 큰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무한이 아닌 무한 공리에 대한 것입니다. 무한 공리를 빼거나, 무한 공리를 거짓으로 두어서 일반적인 공리계보다 더 약화된 PA가 된다고 한들, 어떤 약하고 강한 공리계가 제시된다고 한들 Busy Beaver로서 세워진 탑 안에 위치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는 언제나 제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Ross–Littlewood paradox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의견입니다.
어떤 사람(선형대수와 군의 저자)은 자신의 의견이 답인 이유로 “크크”와 “흐흐”를 제시했습니다.
“크크”와 “흐흐”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유라고 말할 내용이 “크크”와 “흐흐”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푸앵카레는 칸토어가 무한을 사용하여 초한수와 무한 공리를 사용하는 집합론을 사용할 때,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푸앵카레가 이 집합론을 거부한 이유는, 몇몇 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무한의 사용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많은 모순들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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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공리와 정렬 정리로 불린 선택 공리와 같은 것은 다른 공리로는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이 공리가 없어도 그와 독립적인 다른 형태의 수학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다른 형태의 수학은 수학입니까?
수학의 정초에 대한 문제는, 다시 말해 수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은 문제가 남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문제들은 “수학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전부 “수학으로 풀 수 있는 문제”입니까?
Wesley Salmon은 이 역설이 순수하게 논리적이거나 수학적인 용어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구체적인 물리적 현실의 서술에 추상적인 수학적 체계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비판할 것입니다.
그는 러셀과 함께 수학 원리라는 책을 쓴 공저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수학에서 나오는 사변에 집중한 반면, 러셀은 수학에서 나오는 논리에 집중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수학을 포함한 우주론에 필요한 모든 것은 파스칼이 말하는 “기하학적 정신”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하학적 정신이란 기하학적 방법처럼 몇몇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엄밀한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 인식 능력을 말합니다. 파스칼은 이 정신의 문제를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기하학 정신의 원리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기하학자들은 섬세한 사물들을 기하학적으로 취급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은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그다음에 원리로부터 시작하려고 하다가 웃음거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이 쓴 수학 원리라는 책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학은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왔다. 즉 철학의 방법이라는 것은 명석판명하고도 확실한 전제를 독단적으로 명시해야 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전제들 위에 연역적 사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일반성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논의의 목표이지 그 출발점은 아니다. 철학은 수학의 본보기로 말미암아 오도되어 왔다. 수학에서조차도, 궁극적인 논리적 원리에 관한 진술에는 아직도 극복할 수 없는 난점이 따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귀류법의 남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철학적 추론이 이것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일련의 추론에서 모순이 생겼을 때 거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결론은, 그 추론 속에 들어 있는 전제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전제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그릇된 전제는 더 문제삼지 아니한 채로 성급하게 가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비판이 아닌 어떤 lament, 비탄일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임제록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한 스님이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묻자,
임제스님이 곧장 '할!' 하고 그 스님은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했다. '이 스님과는 그래도 말을 나눌 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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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제논의 4번째 역설입니다.
“네번째는 경주로에서 크기가 같은 물체들의 곁을 서로 반대편에서 열지어 지나가는 크기가 같은 물체들에 관한 역설이다. 그것들 중 한 행렬은 경주로의 끝에서부터, 다른 한 행렬은 다른 한쪽의 끝에서부터 같은 빠르기로 움직이는데, 그 경우에 시간상으로 절반이 그것의 두 배와 같게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오류는 같은 크기를 가진 물체가 같은 빠르기로, 움직이는 물체를 지나가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를 지나가는 데에도 당연히 같은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 점에 있다. 이것은 거짓이다. 예를 들어 크기가 같은 서 있는 물체들은 ΑΑ라 하고, Α들의 중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들은 ΒΒ라고 하자. 그리고 이것들은 수와 크기가 전자와 동일하다고 하자. 그리고 끝에서 시작하는 것은 ΓΓ라고 하자. 이것들은 수와 크기가 전자들과 같고 Β들과 같은 빠르기라고 하자. 그러면 서로의 곁을 지나가면서 첫번째 Β와 첫번째 Γ가 서로의 끝에 동시에 있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 Γ는 모든 Β를 지나간 상태고 Β는 Α들의 절반을 지나간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시간상 절반이다. 왜냐하면 각각이 각각의 곁을 지나는 시간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첫번째 Β가 모든 Γ를 지나간 상태가 된다. 왜냐하면 동시에 첫번째 Γ와 첫번째 Β는 정반대의 끝에 있을 것이고 양자 Β와 Γ가 같은 시간에 Α들을 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논변이고 이것은 앞서 언급된 오류에 의해서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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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 Salmon이 이 역설의 해결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물리적 현실의 서술에 대한 수학의 사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그것을 위해서 공간과 시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서술해야 합니다
여기서 어떤 철학적인 문제를 제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이란 우리의 내적 지관이 가리키는 바로 그 시간이다. 다른 양이 변화하려면 이 시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다른 양의 변화는 시간의 변화에 의존한다. 하지만 시간 자체는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흘러간다.
공간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이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는 공간이며, 그것이 공리계로부터 온 것인지 우리가 직관대로 떠올린 것인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헤르츠의 "역학의 원리"라는 책에서 따왔습니다.
헤르츠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정의 용어 역할을 합니다. 이 둘만큼은 정의되지 않습니다. 힘과 같은 개념이 이것에서부터 정의됩니다. 헤르츠의 체계에서 "공간이 어떻게 수학으로 서술될 수 있느냐"라는 말은 "점이란 개념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만큼이나 이상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철 지난 생각임을 누구라도 잘 알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전에도 시간과 공간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른스트 마흐가 대표적입니다.
마흐는 사유경제성이라는 단어를 고안했고,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을 비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가장 중요한 책인 역학의 발달을 읽었고, 좋아했습니다.
헤르츠의 역학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는 루트비히 볼츠만입니다. 그러나 그는 헤르츠의 체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여러모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처럼 영구히 기억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잊혀졌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볼츠만이 가장 덜 잊혀졌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흐의 인식론적 입장은 젊은 시절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금은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사색, 특히 과학적 사색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구조적이고 이론적인 본질을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했다. 그 결과 구조적-이론적인 특성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이론, 예를 들어 원자의 동역학 이론에 대해 비난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시간과 공간의 정의가 아주 임의적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이상한 사례는 베르그송인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을 봐도 알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의 4번째 역설이 아주 단순한 제논의 실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이산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굉장히 명확해집니다. 플랑크 길이, 플랑크 시간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역설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에 Α를 지나가는 데 Β가 Γ와 함께 또다른 Γ를 지나간 상황이 되므로 “시간상으로 절반이 그것의 두 배와 같게” 되는 것입니다.
지속이란 개념은 제논의 역설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이 역설에 대한 논의는 “물질과 기억”에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그대로 따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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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논리적 도식을 만들어 해결해보려는 접근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두 가지의 중요한 점들을 의도하기 위해 쓰입니다. 첫째로 명료성입니다. 명료하게 말하는 과정, 단어를 엄밀하게 말하는 과정을 통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논박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피스트적 논박”에서부터 진행된 것으로, 논변과 궤변을 구분할 수 있고, 논리적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려야만 할 것은 이 두 가지 목표는 논리적 도식을 구성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많은 철학적 방법에서 대다수가 의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는 철학사에서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 도식을 이 글에서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뒤에 나오는 사례가 이 논리에서만 해당되는 일이 아님을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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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도식을 생각해 봅시다.
1 - 이 가설로 세운 램프는 가능하다.
2 - 어느 주어진 순간에 램프는 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
3 - 물리적인 과정들은 연속적으로 바뀐다. x의 크기를 가진 task(일)가 시간 t 이전에 끝나도록 설정되어 있다면, x가 얼마나 작다 한들, task가 끝난 뒤에 물리적 상태가 바뀌도록 설정되어 있다.
4 - 시간 t가 1초이다. 1초 전의 x의 크기를 가진 task에서, 램프는 꺼져 있었다.
5 - 시간 t가 1초이다. 1초 전의 x의 크기를 가진 task에서, 램프는 켜져 있었다.
6 - 1초에, 이 램프는 켜져 있다. (3과 4로 인해)
7 - 1초에, 이 램프는 꺼져 있다. (3과 5로 인해)
8 - 모순이 생긴다 (6과 7로 인해)
이것은 전에 있었던 톰슨의 램프에 대한 엄밀한 논리적 도식입니다.
이 도식은 전과 달리 모순이 생긴 것으로 끝나 있는데, 전에 언급했던 베나세라프가 말한 역설이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른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때 베나세라프와 같은 해결을 내려는 사람들은, 아직 이 도식이 더 드러내 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엄밀한 도식이 아직 전부 엄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첫째로 도식에 나와 있는 문구 중 하나를 제시하여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둘째로 도식에 나와 있는 용어가 애매하게 쓰여졌고 그것의 명료화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도식에 나와있지 않은 전제가 하나 있어서 그 전제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등등 많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같은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 논리적 도식에서 베나세라프가 해결 방법을 결론으로 두기 위해서는 3에서 나오는 문구를 문제삼아야 합니다. task(일)가 어느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지에 대한 명료화를 제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식에 전제가 하나 있어서 그것이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숨겨진 전제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3.1 - task(일)의 크기는 0초보다 크다.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을 결론으로 두기 위해서는 이것을 지적해야만 합니다.
task가 정확히 0초의 크기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task라는 것은 0초의 크기를 가질 때에도 해당됨을 주장해야 합니다.
이것을 과도한 주장이 아니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3에서는 “x가 얼마나 작다 한들”이라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에 0초도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예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과도한 주장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0초간 진행되는 task의 실제 사례가 무엇인지를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정확히 전에 말했던 measure 0의 문제와 동일합니다.
확률이 0이라는 것, 선분이 길이가 없다는 것, 즉 “확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률이 0이라는 것”이 이 문제와 동일합니다.
그 문제가 수학 자체로 풀릴 수 없는 일임은 이 전에 설명했습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이 톰슨의 램프가 아닌 모든 supertask의 문제에서 전부 해당되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제논의 역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킬레스가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맞닥뜨린 베나세라프의 주장입니다.
베나세라프는,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대로라면 0초인 task가 있다고 주장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일상의 용어사용에서 쓰이는 방법을 지켜보아야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용어, 즉 task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곳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고, 최소의 시간이 없는 경우에 사용될 경우 0초의 task가 있을 수 있고, 최소의 시간이 있어서 0초보다 더 크기가 커야만 하는 곳에 사용될 경우 0초의 task가 있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베나세라프의 의견 변경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언어의 사용으로부터 의미가 변하니 용어의 사용을 지켜보자는 의견이라면 대체 supertask에서 0초의 task가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대답을 확실히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타카토 제논의 역설”로 전에 언급한 Adolf Grünbaum은 베나세라프의 이 해결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언어에 몰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언어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모욕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Adolf Grünbaum은 그렇게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언어의 형이상학적 혼란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논리적 오류를 지적함으로서 풀려지지 않을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0초에 할 수 있는 task가 있느냐라는 문제는 결국 0초, 0이라는 것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에 대한 것인데, 0초에 할 수 있는 일로 measure 0가 있고 그것이 아닌 0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는 있다”고 찬성하는 자는, 지금까지 0이라는 표현이 애매성을 가지고 있었고, 0에는 measure 0와 measure 0가 아닌 0이 있고, 0초이므로 task를 해낼 수 없다는 주장은 애매성의 오류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는 없다”고 반대하는 자는, 0초인 것에는 아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0초가 measure 0와 measure 0가 아닌 0이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0초이므로 task를 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언어를 구별해서 쓰지만 언어의 의미상의 차이가 없는 차이 없는 구별의 오류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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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리적 도식의 문제는 화이트헤드의 또다른 주장, 또다른 비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범주의 도식을 하나의 복합적인 주장으로 보고 거기에다 논리학자가 말하는 참과 거짓이라는 양자택일적 척도를 적용시킬 경우, 그 대답은 그 도식이 거짓이라는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논리적 도식을 만들어내어 참과 거짓을 분류해낸 뒤 자기 주장을 표출하게 된다면, 무조건 그 도식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러셀과 수학 원리를 공저한 한 논리학자의 주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지 모르지만, 이것이 주장이 아닌 어떤 경험담, 지혜라고 받아들인다면 더 뜻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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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외에도 제논의 역설을 풀기 위한 시도는 존재합니다.
첫째로 다른 형태의 기하학을 써서 이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시도들은 수학의 “점”의 사용에 대해 비판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에 반해서, 제논의 역설의 해결은 점이 있다고 보고, 선분이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역설을 해결합니다.
이렇게 쓰인 점은 추상적인 것임에도 구체적인 것처럼 다뤄지게 되는데, 이러면서 추상 관념들에 그것들이 가질 수 없는 기능들이 종종 넣어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라고 했는데,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입니다.
이러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는 추상화가 일어나는 순간 사실상 모든 이론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는 특히 “점”의 사용이 문제임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점의 사용을 축소한 것으로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하학에서의 유한주의입니다.
기하학에서 무한을 사용하지 않고 이산적인 공간을 사용하여 제논의 역설을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기하학에서 무한을 제거하고 점을 제거한 뒤 이산적인 블록을 사용하는 유한주의만을 허용하게 될 경우, 아킬레스와 함께 거북이도 유한한 수의 공간 위치를 거칠 뿐이며, 위치가 더 이상 나눠지지 않다는 것으로 제논의 역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에 말했던 헤르만 바일의 논증과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서 기하학에서의 유한주의를 선호하는 자들은 이것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거의 같은 성질을 가지게 하고 바일의 문제를 우회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산적인 공간의 타일-짜기 방식을 독특하게 설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다른 하나는 gunk(점토)입니다.
이 기하학은 어떤 기하학적 도형이 점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과 독립된 기하학을 만들어서 제논의 역설을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퍼스는 선을 아무리 잘게 잘라도 선으로 남고, 면을 아무리 잘게 잘라도 면으로 남게 하는 언제나 연장을 가지게 하는 기하학을 가집니다. 이러한 기하학을 체계화한 것을 점토 기하학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기하학을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먼저 정의한 뒤에 점토 공간에서 줄어드는 원을 통해 점을 다른 도형보다 더 뒤에 정의하는 등 점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기하학을 만들려고 했고,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여 제논의 역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둘째로 역설 자체의 논리적 위치를 순화시키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초일관성 논리(여기서는 Dialetheism과 Paraconsistent Logic을 구별하지 않았다)가 있습니다. 이들은 몇 가지의 모순이 있다고, 참된 모순이 있다고 보고 모순을 허용하는 논리적 체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존 논리와 아주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logical absolute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올바른 사고를 하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법칙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모순율은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를 의미하는데, 이 논리는 모순율을 위배합니다.
기존 논리가 모순율을 위배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다”와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지 않다”라는 모순되는, 비일관적인 문장 둘이 참이라고 합시다.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거나 유니콘은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참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지 않다”가 참이므로 “유니콘은 존재한다”는 참입니다.
이것을 폭발률이라고 부르는데, 초일관성 논리는 이를 채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다”와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지 않다”를 둘 다 참이라 보고 역설을 해결합니다.
28
이러한 시도들은 비판받았습니다.
점의 사용을 축소한 기하학은 점 개념을 사용하는 기존의 물리 이론들과 조화를 잘 이루지 못했다는 점으로 비판받았습니다.
역설을 순화시킨 논리는 부정의 절대적 특성이어야 할 "부정"이 결정적인 특징을 포함하지 않고 연산자가 되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29
여기서 내가 동의하지 않는 역설의 해결 방법이 존재합니다.
제논의 역설이 역설이 아닌 logical absolute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논의 논변은 일자가 일자인 동어반복이고, 논리적 반박은 잘못되었습니다.
여기서 운동은 없거나, 표현할 수 없습니다. “드러난다”입니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인 것입니다.
30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역설을 해결한 이러한 논의들은 보통 설명의 빈약함으로 비판받습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서 나온 한 논의가 후대에 나온 다른 설명에 비해 전혀 나쁜 부분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 바뀌는가? 그것은 정지해 있을 때도 움직일 때도 시간 안에 있을 때도 바뀌지 않으니 말일세.”
“네,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이 변할 때 그 안에 있음 직한 이 이상한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게 어떤 것입니까?”
“순간 말일세. ‘순간’은 거기서부터 두 상태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 같으니까. 어떤 것이 정지해 있는 동안에는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변하지 않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움직이는 상태에서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 대신 순간이라는 이 이상한 성질은 운동과 정지 사이에 잠복해 있고 어떤 시간 안에도 없네. 그래서 그것 안으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은 정지해 있는 상태로 변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움직이는 상태로 변한다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는 정지해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므로 둘 중 어느 쪽으로도 변할 수 있네. 그래야만 하나가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하나는 변할 때는 순간에 변하고, 변하면 시간 안에 있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순간에는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해 있지도 않을 걸세. 만약 하나가 존재한다면 말일세.”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역설이 풀어져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토끼굴은 더 깊어야 합니다.
전혀 설명하지 못했지만 나는 절대 역설을 풀지 못한 것이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문구들을 사실이라 받아들입니다.
“형식논리에서 모순은 패배의 신호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의 진화에서 그것은 승리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해결책이 나와야만 한다면, 용어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개념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바슐라르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뒤의 글을 씁니다.
실재를 직접 파악할 수 있다고, 직접, 즉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그런 편안한 위치에 이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논증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논증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입니다.
팡타그뤼엘 제 4서에서는 히브리어로 “혼돈”과 “공허”를 뜻하는 토위 섬과 보위 섬을 언급합니다. 배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 일행은 이 섬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납니다. 그들이 폭풍을 만나는 때는 이 섬들을 평온하게 지나간 바로 그 직후에서부터입니다.
31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은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언어의 한계는 표현되는 사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사유의 표현과 아무런 사유를 담지 못하는 표현에 한계를 두어서 철학이 한계를 벗어난 곳에 질문하고 답하려는 시도에 언어를 주목하여 그것이 철학적 혼란이었음을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후기에도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철학이 일반성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철학적 혼란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모든 개체에서 공통된 무엇을 찾아 일반명사에 이르려 하는 습성, 하나의 단어에 고정불변의 의미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 과학적인 자연법칙으로 설명하려는 방법이 그런 혼란의 예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상적 언어 사용의 문법에 대한 ‘일목요연한 묘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말들의 사용 방식을 재정리함으로써 일상적 언어 사용의 문법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목요연한 묘사를 위해서 중간고리들의 발견과 발명을 중요시했는데, 이것으로 언어의 연관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로써 그의 치유라는 관점이 나오는데, 철학자들이 탐구해온 개념들에 대한 본질적인 무엇을 찾으려는 시도 대신 어떻게 그것이 일상 언어의 사용을 떠난 철학적 혼란이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 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이론을 만들지 않으려 했고, 모순 해결 이전의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 보았습니다.
32
비트겐슈타인의 제논의 역설 해결 방법은 어느 정도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에는 이것과 같습니다.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고 6.51)
제논의 역설은 물음이 존립하지 않는 곳에서 물음을 던지는 사례가 되어 무의미한 명제가 됩니다.
그는 러셀과 같은 사람이 무한과 같은 기호를 가지고 말하려고 할 때, 러셀의 명제들 속에 있는 그 무한이라는 기호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하는 것,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의미가 있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를 서술할 때 뿐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뜻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많이 다른 뜻을 갖는다고 주석가들은 봅니다 (그렇게 보지 않는 주석가들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무한 공리는 무의미하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봤을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봅니다. 단지 설명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동어반복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즉 보여져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 보여져야 한다는 주장은 그가 무한 공리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러셀의 ‘무한성 공리’가 야기하는 모든 문제들은 이미 여기서 해결될 수 있다. 무한성 공리가 말하려 하는 것은 상이한 의미를 지닌 무한히 많은 이름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의하여 언어에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외연으로서의 무한”과 “법칙으로서의 무한”을 구분합니다. 외연으로서의 무한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를 서술하지도 않고 동어반복도 아닙니다. 따라서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무한히 많은 이름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 공리를 표현하는, 보여주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것은 외연이 아닌 법칙으로서의 무한을 나타냅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도 외연으로서의 무한을 거부하는 “외연주의”는 자리잡아 오직 법칙으로서의 무한만을 허용했습니다.
이분법의 역설과 아킬레스의 역설은 외연으로서의 무한이 필요합니다. 화살의 역설은 외연을 막을 경우 measure를 포함한 모든 접근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는 역설의 해결에 대해 이렇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예컨대 운동중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이 장소에 그것은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화는 모순에 의해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에는 비가 오고 서울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라는 말은 서울의 다른 구에서의 각각의 사실이 있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의 형식을 모순이라 봅니다. 모순의 형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 단지 모순적이지 않은 사용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명제의 형식만이 모순이고, 사용으로서의 의미는 뜻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변화가 이런 명제를 통해서 쓰일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이 이외의 제논의 역설과 관련된 언급은 없습니다.
사용으로서의 의미와 언어게임에 의미를 맡기는 것은 그러나 supertask에서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일)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계를 얻을 것입니다. 용어사용에서 쓰이는 방법을 지켜보아야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은 앞에서 보았듯이 제논의 역설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의 증명이 오직 "모범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들이 당연히 어떤 다른 새로운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정당성이 포함됩니다. 수학에 정당성을 요구하는 데 있어서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호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점을 대체하는 기하학자들에게 설명의 빈약함으로 비판한 것과 비슷한 양상을 가질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적어도 한 부분을 더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최소한 헤르츠와 볼츠만이 싫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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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체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 아주 괴상한 대답이 나옵니다.
"설명의 기도가 잘못되었다."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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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에게 증명은 “조망가능성”이라는 용어로 대체됩니다.
조망가능성은 i) 우리를 납득시키고, ii) 우리에게 경험적, 인과적 과정이나 사건과는 무관한 것을 보여주고, iii) 판독 가능하고 재현 가능해서 전달이 가능하고, iv) 경험적이고 수학적인 판단의 모델이나 표준을 제공하고, v) 다른 증명 이론 없이 그 자신이 기초가 될 수 있게 납득시키고, vi)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도록 우리의 개념을 바꾸게 하고, vii) 필연적이고 확실한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게끔 하고, viii) 특정한 해결책이 아닌 수학적 문제 해결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ix) 명제에 대한 신념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게 하며 x) 수학적 기술에 대한 오직 부분적인 통찰력을 주어서 재맥락화의 대상이 될 수 있게끔 해줘야 합니다.
이것은 수학자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조망가능성은 전혀 수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 어떤 주석가도 이것을 완벽히 수학적인 개념으로 만들 수 없었고, 모순율과 배중률이란 가장 단순한 문제에서조차 논쟁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조망이라는 단어에서 보이다시피, 이것은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가 아닌 감각 인상의 재현과 훨씬 비슷한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조망가능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수학자 바깥쪽에 있어서 수학자들이 혼란에 빠지는 지점을 잡아내려는 시도를 합니다. 수학의 문제를 외재적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현실적인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닌 오로지 철학적 분석에 대한 방법으로서 발전되었습니다.
조망가능성이라는 용어는 그의 치유적인 문제 해소 방식을 위해 철학적인 것에 이끌려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르츠의 “역학의 원리”에서 나오는 역학의 체계는 이것과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헤르츠는 처음 역학적 현상의 표상이 만족해야 하는 기준으로 논리적 일관성, 경험적 자료와의 대응, 그리고 단순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경험과 관계를 맺는 수학적 체계를 이룰 때 그것을 "모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모델”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적 용법이 아닌 일관성, 적절성, 판명성과 같은 공적 용법이었습니다.
헤르츠가 도입한 수학적 모델의 설명 방식은 그 모델의 문제점을 그 안으로부터 지적할 수 있어서 그 한계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헤르츠의 이론은 일반적인 철학적 분석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푸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발전됨으로서, 헤르츠가 공부했던 맥스웰이 그의 방정식의 적용에 신경을 썼을 뿐 전자기 현상의 물리적 본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점에 대해 정당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모델은 그 스스로 과학적인 개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수학에서 헤르츠의 모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아니라 집합론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철학에서만큼은 헤르츠가 아닌 그와 반대되는 사람, 마흐를 따랐다는 것을 보이고 싶습니다.
마흐가 썼을 Vorstellungen이란 용어와, 헤르츠가 쓴 Darstellungen이란 용어 중 그의 조망가능성과 치유가 속하는 곳은 마흐의 용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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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사유 노선이) 나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만 그것을 명료화하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볼츠만-헤르츠-쇼펜하우어-프레게-...는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 (문화와 가치, MS 154)
비트겐슈타인은 헤르츠와 함께 볼츠만이 그에 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볼츠만은 헤르츠에 대해 호의를 보였던 사람임에 확실합니다. 하지만 볼츠만은 헤르츠의 모델이란 개념에 대해 완전히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헤르츠가 쓴 유명한 책 '역학의 원리'에서 명확하게 쓰여졌다. 그 책은 우리가 구성하는 그림이 생각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맞서서 나는 이것에 대한 확실한 보호를, 아니면 적어도 요구를 더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실용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이러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우리의 감각에 남기는 인상만으로 그 존재를 추측한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많은 것들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과학의 가장 아름다운 승리가 될 것이다."
볼츠만의 관점은 이 발언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경험의 범위를 더 많이 벗어날수록 더 일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고,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도 역시 커진다. 그러므로 현상학에서 경험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너무 과도하게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하는 수준에 그쳐야만 한다.”
볼츠만이 말하는 abbilden은 마흐와도, 헤르츠와도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볼츠만의 이론을 좀 더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볼츠만이 마흐와도, 또한 헤르츠와도 다른 입장을 가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철학적인 견해가 과학 이론을 유지하는 데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H-정리와 엔트로피가 그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튜링과 수학철학의 대립으로 논쟁을 할 때, 유진 위그너가 제시한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터무니없는 효과"(자연을 설명하는 데 수학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효율적이라는 것)라는 문제를 비트겐슈타인은 전혀 놀라운 점이 없다는 전제를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수학의 적용이 항상 성공적인 적용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놀라움은 없고, 수학의 적용에 있어서 그 적용의 근거를 거부하는 한에서만 올바로 적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디랙의 사례가 있습니다. 디랙은 디랙 방정식을 고안해냈습니다. 디랙 방정식에서 해가 두 개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에너지가 양수인 것이어서 기존의 상대론과 일치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가 음수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정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디랙은 달랐습니다. 디랙은 자신의 방정식이 수학적으로 너무 아름다워서 결코 틀릴 수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방정식이 제시된 지 4년 후 디랙의 주장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반물질 중 하나인 양전자를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발견하였습니다. [여기부터 바슐라르가 나옵니다. 급작스럽게 나오는 것을 사죄합니다.]
바슐라르는 수학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데에 굉장한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론이 자리잡히지 않았던 초기에 그는 수학을 “말하자면 모든 것을 사고하는 언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언어라는 단어는 그것이 표현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는 이 이유로 이론이 완전히 잡힌 뒤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학에서 언어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회의적인 철학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정 관념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대로, 수학은 생각, 자신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어떤 생각이다."
이 수학이란 생각은 발견과 발명의 역할을 합니다. 수학을 통해 디랙이 발견했다고,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발명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수학은 발견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몰이해의 한 가지 주요 원천은, 우리가 우리의 낱말들의 쓰임을 일목요연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법에는 일목요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일목요연한 묘사가 이해를 성사시키며, 이해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연관들을 본다'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중간 고리들의 발견과 발명이 중요한 것이다.
일목요연한 묘사란 개념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묘사 형식을, 우리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을 지칭한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관'인가?)” (탐구 122)
여기서 “일목요연”은 아주 다른 뜻을 가집니다.
다른 번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통찰”, “명석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 번역본을 본다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clear view”라고 번역했습니다. 현재 최신판인 4판에서 수정을 담당한 피터 해커는 surveyability라고 번역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쓴 단어는 Übersichtlichkeit입니다. 모든 번역이 전부 맞고, 이 용어를 번역하는 데 노력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용어를 쓴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에 가깝습니다. 이 용어가 바로 조망가능성의 원어입니다.
이 용어는 차라리 “다양성”과 비슷합니다. 주어진 삶의 형식들의 본질적인 다양함과 다채로움 때문에 지금의 언어가 이뤄진 것이고,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과학적 이론화나 기존 수학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반화에서 벗어나 개별적이고 다의적인 새로운 봄의 방식을 일깨워, 마치 세계관처럼 보여줘야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조망가능성을 가진, 혹은 일목요연한 묘사가 있어서 중간 고리를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간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증명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 논증도 포함했을 것입니다. 증명은 표지판과 같은 것을 하나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명언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증명은 극도로 마흐적으로 쓰였습니다. 여기서 증명은 새로운 봄의 방식을 제외한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상 언어의 질서에 대한 명료한 이해였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질서는 일상 언어에 이미 있지만, 일상 언어의 배후에 숨겨져 있어 논리적 분석이 그 숨겨진 질서를 드러낼 수 있어서 명료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일상 언어의 질서와 명료함은 숨겨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이미 있으되 다만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목요연함, 명료성에 대한 태도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연한 내맡김”과 비슷합니다. 그는 존재들을 현대 시대가 도구를 쓰는 것처럼 몰아세우지 않고, 존재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기 위한 음미하는 사유, 숙고적인 사유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한 하이데거가 원하는 인간의 태도는 “초연한 내맡김”입니다. 이 태도에서 나오는 사유는 언제나 따랐던 길을 걷는 것을 벗어나 길을 훤히 알지 못하는, 하지만 다채롭고 새로운 봄의 방식을 보여주는 숲길을 걷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채로움에 대한 좋은 글로 보이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명료성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있습니다.
“도대체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언표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언표될 수 있다.” (논고 4.116)
“철학은 정녕 모든 것을 단지 내놓을 뿐이고 아무것도 설명하고 추론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으므로,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혹시 숨겨져 있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탐구 126)
이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볼 수 있는데, 그 주장은 이렇게 나옵니다.
“명료하지 않은 생각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료하게 언표되지 않은 언어를 언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불가능하지 않다고 한들, 이것들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과학은 언제나 실험을 합니다. 자신의 추상화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바슐라르는 수학을 생각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실험이라고 보았습니다. 실험의 목적은 과학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자연적 관찰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바슐라르는 이를 현상기술학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고 “본질 직관”이나 “초연한 내맡김”과 같이 현상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현상학에 대적하려는 것입니다. 현상기술학에서 경험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실험에서 경험은 실험이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된 경우에만 만들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경험의 조건이 수학적인 기술적 실험작업의 조건과 동일합니다. 이 현상기술학의 핵심은, 이 용어의 다른 번역 표현인 “현상조작술”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일상 차원에서는 만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준다는, 창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 동시에 개념을 만든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슐라르의 표현으로 이것을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한다고 하는데, 실험은 추상이 구체화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갈릴레이가 르네상스 시대나 괴테가 사용한 유사성, 형태학과 같은 것에서 벗어나 빠짐없는 수학화와 기계론을 둔 것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것과 대조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세계의 연관관계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기에서는 여기에 유아론을 두었습니다. 전기에서 그의 목표는 세계를 무시간적인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이었는데, 그 단어 sub specie aeternitatis 자체가 스피노자와 쇼펜하우어의 용어인 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 용어였습니다. 후기에서 그의 목표는 조망가능성으로 다시 나왔고, 단지 일목요연성이 없을 뿐이라고, 중간 고리들의 발견을 중요시할 경우 나온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것은 사물들을 보는 방식, “세계관”입니다.
삶과 세계의 연관관계를 숨기기 위해 쓰여진 단어가 명료성입니다.
명료성은 막연하게 요구되는 최종적인 목표였습니다.
실험의 예시는, 명료성이 그렇게 이뤄지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바슐라르의 이 말은 많은 논의를 함축합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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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논의를 멈춘 곳에서 볼츠만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볼츠만의 방정식을 통해서 그 전까지 있었던 “따뜻함의 감각”과 같은 주관적인 언급은 제거되고, 열은 어떠한 원자가 아니라 분자들의 운동에서 나온 것임을 수학화했습니다. 볼츠만 방정식은 속도분포와 관련된 함수 H함수가 비평형계에서는 언제나 감소한다는 H-정리를 유도했고, 이는 시간의 화살, 비가역성을 말하는 듯 했습니다.
체르멜로, 푸앵카레, 마흐와 같은 사람이 그의 이론을 비판했습니다. 이 비판은 그의 수학적인 정리에 대해 비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인정받은 편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비판받은 것은 그 정리 뒤에 있는 철학적인 함의에 있었습니다.
볼츠만적 사유는 빠짐없는 수학화와 그로 인한 불가피한 사변일 것입니다. (볼츠만의 비탄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의 사유는 마흐와 헤르츠의 간극 사이에서 다리를 놓으려는 역할을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책 “기체론 강의”에서 시간에 대한 극단적인 사변을 도입합니다.
“공간 내에 위쪽과 아래쪽이 구별 불가능한 것처럼 우주에서 시간의 두 방향은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지표상에서 우리가 "아래쪽"이라고 부르는 방향은 지구의 중심을 향하는 것처럼, 특정한 시간 동안에 살아 있는 존재는 확률이 더 작은 상태로 향하는 시간(과거로 향한 시간)과 그 반대의 방향의 시간(미래의 시간)을 구별할 것이다. 이 용어를 빌리자면 우주의 작은 고립된 지역은 항상 "초기에" 확률이 낮은 상태에 있게 된다.”
이 글을 다시 곱씹어 생각한다면 이 사변이 얼마나 극단적인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빅뱅 우주와 같이 “우주가 언제 시작했다”는 개념은 과학계에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과학자들은 우주의 탄생과 같은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거나, 정상 우주론처럼 정적인 우주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볼츠만은 이 시기에 자기의 이론을 유지하기 위해 시간이란 개념에 주객전도를 해두었습니다. 이제 시간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엔트로피입니다. 객관적으로 앞쪽인 것과 뒤쪽인 것이 없듯이, 공간 내에 위쪽과 아래쪽은 없지만 지구 중심을 향하는 것이 아래쪽이라고 느껴질 뿐이라는 것을 생각합시다. 볼츠만은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시간이 시간의 화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덜 있는 곳에서 엔트로피가 더 있는 곳으로 말하자면 “이동”할 때의 느낌을 의미할 뿐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시간이 증가할 때 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데에 그 어떤 물리적 설명도 할 수 없고, 엔트로피가 덜 있는 것에서 더 있는 것으로 “이동”한다면 한쪽으로든, 혹은 심지어는 양쪽이나 깊은 구멍에서라면 사방 전체로 시간이 흐르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 포퍼는 이를 보고 “자살적인 사변”이라고 했는데, 도덕적으로 많이 잘못된 말이지만 굉장히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사변에 대해 이렇게 비탄합니다.
“이러한 추측이 중요하다거나 혹은 -고대의 철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학의 가장 높은 목적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순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경멸하지도 않을 듯하다. 이런 추측들이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확대하여 활기찬 생각에 의하여 경험적 사실에 대한 이해에 진전을 줄 수 있을지 누가 알랴?”
비트겐슈타인은 이 볼츠만의 비탄을 무의미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볼츠만의 극단적인 사변도, 제논의 역설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설명의 기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것이 4.116입니다. 삶과 세계에 있어 명료성이 존재하고, 이 명료성을 넘어가는 어떤 것도, 심지어 그 명료성이 어떻게 나온 것인가조차도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현상기술학을 통해 명료성의 문제를 보았습니다. 명료성을 포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나오지 않습니다. 논리적 분석이나 조망가능성을 통해 의미론이 강제될 때, 디랙의 양전자 발견의 사례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수학은 신경적 체계와 우주적 체계가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는 것을 밝히는 유일한 언어이다.”라는 말에 바슐라르는 동의했습니다.
바슐라르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근대 과학에서 나오는 모습은 정신과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고, 실험기술의 존재는 기존 철학의 관점으로서 볼 때 정신이 세계를 수정함으로서 경험을 얻는다는 이상한 일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과학에서는 경험은 이론적으로 제시되어야, 또 제시되어야만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 구체화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바슐라르가 보기에, 수학의 역할은 이 두 세계가 대치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데 있습니다.
수학은 세계의 현상을 올바르게 조작하기 위해 쓰는 정신에서의, 삶에서의 작용입니다.
그렇게 미시적으로는, 수학은 발견이나 발명의 역할을 하는데, 디랙의 사례와 같이 현대물리학에서 발견의 역할이 수학에 있고, 수학은 실험을 생각하여 실험의 대상을 발명한다는 점을 통해 현상기술학에서 보여주는 삶과 세계의 단절을 깊이 보여준다고 봤습니다.
거시적으로는, 수학이라는 생각이 인식틀을 만들 수밖에 없게 해준다는 점, 따라서 기존의 개념틀을 재조정하는 역할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바슐라르가 멘델레예프의 말을 통해 근거로 삼은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원자들의 속성이 그 중량의 함수라면, 다소 화학에 뿌리를 두었던 많은 관념은 이러한 추론의 의미에서 발전되고 성립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화학 원소들이 그 성격상 완전히 자립적인 것으로, 그리고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제 원소들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그 속성은 질량에 의존한다는 관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많은 화학적 추론들이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주의를 끌지 못했을 곳에서 규칙성이 관찰될 것이다.”
그 전까지 화학에 있었던 규칙성 대신, 수학적인 화학 원소의 질량을 통해 규칙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화학에 수학을 통한 다른 개념틀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슐라르는 이미 수학적인 개념틀이 있는 경우에도 수학을 통해 다른 개념틀이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디랙의 사례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디랙의 방정식을 통해 음의 질량이 제시되었을 때, 바슐라르는 그 음의 질량이라는 개념은 질량의 개념이 보다 더 명백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19세기 물리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디랙 방정식을 통해서 음의 질량을 허용하는 다른 개념틀이 만들어짐을 보였습니다.
바슐라르는 평행선을 또한 예시로 들었습니다. 평행선이라는 단어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 이후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절대성을 잃어버린 뒤 특이한 언어 체계로 변해서 다른 조건에서는 다른 구조의 하나로 변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의미론에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혀 새로운 언어체계를 수학이라고 보았습니다.
영원의 관점을 보기 위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목표를 얻기 위해 새로운 봄의 방식을 증명으로 보이고자 했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이나 증명을 하나의 언어로서, 하나의 논증으로서, 의미론의 전달 대상으로서 보려고 했으며, 이 바슐라르의 수학이란 개념에서 보여지는 사변적 성격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바슐라르는 이 사변적 성격에 대해서 “시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볼츠만이 사용한 극단적인 사변과 그 비탄은 시학이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H-정리와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H-정리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명백했던 시간이란 개념을 변형하는 것이었습니다. 빠짐없는 수학화를 통해 불가피한 사변을 쓴 이유는 수학이라는 생각을 통해 기존의 명료한 관념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 과학자가 자주 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집합론이 시학일 것입니다. 평행선이란 의미의 사용이 바뀐 것처럼 수학 그 자체에도 그에 대한 개념틀의 재조정이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를 푸앵카레와 페아노를 비교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푸앵카레는 페아노의 공식에 관한 몇 페이지를 읽었는데도 그의 공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불평했습니다. 그 이유는 페아노가 일관성 없는 협정 안에서 문자들을 마치 어휘처럼 다루었으며, 또한 문자들을 현실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페아노의 시적인 초월성이라고 바슐라르는 말합니다. 이러한 자연수 앞에서도 수학적 사고를 진행하면서 집합론을 고안함으로써 제논의 역설의 풀이법을 제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수학에 시학이라는 말을 둔 것은 굉장히 이상한 말입니다.
그의 목표는 일반적인 인식과 감각, 주관적 언어표현을 벗어나서 수학이란 추상화를 찾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수학이 추상과 거의 같은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수학이 어떻게 또다른 추상화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나, 시라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인식과 감각, 주관적 언어표현에 기반해 있는데 수학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둘 수 있습니다.
그는 시학을 연구하면서 상상력이란 인간의 활동에 집중하고 그의 전 철학에서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상상력과 이미지는 수학과 정반대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왜 그 두 곳에서 시학이라는 용어를 썼을까요?
아마 이것에 대한 이유는 바슐라르의 비탄일 것입니다.
바슐라르에게 상상력은 행복임과 동시에 고통입니다. 상상력이 발동되기 위해 아는 모든 것을 폐기처분해야만 하고, 어떤 부동의 지식에 대한 생각도 버려야만 하는 고행이 필요합니다. 과학에서 수학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상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중지하는 역할을 하지만, 수학 그 자체에 있어서는 또다시 이러한 꿈꾸는 의식의 개념을 도입해야 했습니다. 객관적 인식에서 필요한 것은 그것을 점진적으로 완성해가는, 앞의 인식틀을 끝없이 쇄신시켜가는 어떤 것이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바슐라르는 그것이 바로 꿈꾸는 의식이었습니다.
바슐라르는 아마 이렇게 호소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나도 도저히 모른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과학자들이 수학을 언어로 생각하지 않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이것을 보여주는 글 하나를 제시하겠습니다.
“따라서 모든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제들, 모든 아름다운 형식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져야 하며, 모든 물체들은 단지 문자들로 대치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 절대적 협정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명백한 관계들은 음절들로 대치되고 이러한 음절들은 엄격한 방법으로 기막히게 연결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학들이 정화되고, 상징화되고 요약된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수학자들의 시인과 같은 노력, 즉 창조자-실현자로서의 노력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일반화된 전망 속에서 얻어진 수학적 사고가 우리에게는 마치 사고의 완결을 위한 열망처럼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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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비탄은 사변의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사변의 특징은, 논변이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변철학은 합리적 측면과 경험적 측면을 같이 가지고 있고, 합리적 측면은 “정합성”과 “논리적 완전성”이라는 측면을, 경험적 측면은 “적용 가능성”과 “충분성”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변으로 비판을 받을 경우 그것은 정합성이나 논리적 완전성에 문제가 생김을 의미하는데, 그 경우 다른 합리적 측면, 적용 가능성이나 충분성에서 사변철학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거나 사소한 것이라고 취급받습니다.
비판을 받은 이후 사변철학은 단지 비논리성만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불충분성과 부정합성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철학 체계는 절대 반박되지 않고 버려질 뿐입니다.
“철학의 유용성이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은 철학이 교묘히 둘러대는 재기 넘치는 재주 부리기에 탐닉하는 경우이다.”
영어 원문에서는 brilliant feats of explaining away라고 설명합니다.
explaining away란 단어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데, explain은 설명하다 라는 뜻을 가진 반면에, explain away라는 뜻은 변명하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세 가지 뜻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이론을 explain할 때 이론이 explain away가 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이론의 해체에 관한 것인데, 이를 설명하는 다른 문구에서 나옵니다. “사변의 대담성은 논리 앞에서, 그리고 사실 앞에서 철저하게 겸허해짐으로써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대담하지도 겸허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유별난 개성에서 나온 기질상의 전제를 반영하고 있을 뿐인 경우에는 철학의 병폐가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철학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데 이 문구만 나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이 explain away를 근본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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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알고 자기의 사변철학도 언젠가는 오류의 예시가 되어 다른 체계로 바뀌어질 것임을 알았고, 또한 그것을 권장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설명이 이유를 알려줍니다.
“철학적 설명의 목적은 흔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것이 하는 일은 보다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보다 추상적인 사물이 출현하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다. 구체적이며 특수한 사실이 어떻게 보편적인 것들로부터 구성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그 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적 물음은 구체적인 사실이 그 자신으로부터 추상되는, 그러면서도 그 자신의 본성상 관여하고 있는 그런 존재들을 어떻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철학은 추상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지 구체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 있어서 모든 것이 무한한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화이트헤드는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지만 그런 유한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러 무한한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고,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그런 무한한 것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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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임제가 움직임이 대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산승이 '밖에는 불법이 없다'고 말하면 수행자들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곧장 안에 법이 있나 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고는 곧이어 바로 벽을 보고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고요히 침잠하여 움직이지 않고 좌선하는 것을 조사 문중의 불법이라 집착한다. 이는 큰 착각이다.
만약 그대들이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불법이라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 번뇌를 주인으로 잘못 아는 꼴이다. 옛사람이 '깊고 깊은 캄캄한 동굴이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대들이 만약 저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옳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초목들도 다 잘 움직일 줄 아니, 이것도 응당 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니,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모두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불법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을 것이고, 만약 그대들이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불법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을 것이다. 마치 샘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불법과 관련이 있을까?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 그저 서울을 무작정 건너갔다.
남산을 지나가고 큰 대로와 육교를 지나 한남대교를 걷고 있었다.
강이 아주 컸다.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전단지가 한강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눈에 아주 크게 띄었다.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전단지가 물고기가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물결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밖에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물 위로 모습을 계속 드러내는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밖에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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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사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암 생각없이 코메디 같은 거 보시고 야구팀이나 축구팀 농구팀 배구팀 같은 거 중계도 많이 보시고 롤 오버워치 배그 같은 거 하시면서 아웅다웅하고 욕설도 시원하게 뱉고 정말 뇌를 거치지 않은 뇌 없는 배설행위도 많이 하시고... 유튜브 같은 것도 즐거운 거 많이 보시고 동물 유튜브 같은 귀여운 것도 보시고...
영어도 읽을 줄 아시는 거 같고 인용하시는 철학자들이나 책들은 분명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것들이고, 한국어 쓰시는 것만 봐도 분명 고학력자신거 같고 분명 제가 좀 지분거리고 다녔던 부분들에선 뭐 그렇게 틀린 말인 거 같지도 않은데
저는 영미계열 수리철학이나 논리철학과 과학철학, 바슐라르 스타일의 과학관이 어떻게 고전 그리스 세계의 역설이나 현대 과학을 넘나들면서 융합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19번끝에서 "공리 체계인 ZFC 내에서는, BB(1919)의 값이나, upper bound(상계. 보다 더 높은 값과 비슷한 의미)를 구할 수 없습니다. " 라고 했는데 이게 증명이 있나요? 아니면 무한을 유한을 통해서 증명 할 수 없으니까 그게 증명인건지... 거기서 의문이 생기니까 더 못 내려가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