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대유학자이신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은 학문이 높으시고 너무 욕심이 없으시고 마음이 좋으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의 나이가 여덟살때였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의 형님께서 칼에 손이 베이셔서 손가락을 붙잡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퇴계 이황선생께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의 어머니께서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아니, 얘야! 다친 건 형이지 네가 아니잖아. 형은 울지 않는데 어째서 네가 우는 거냐?" 그러자 퇴계 이황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피가 나는데 형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형이 아플 것을 생각하니 퇴계 이황선생께서 자신이 아픈것처럼 우셨던 것입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어릴적에 책읽기를 좋아하셨는데 이후 성장하시고 선비가 되셔서 오로지 학문에 힘쓰셨습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아홉 살 아래지만 학문과 덕이 높은 유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선생과 깊은 우정을 나누셨습니다. 퇴계 이황선생과 하서 김인후선생께서는 두분 모두 돌아가신 후에 동방18현(東方十八賢)으로 문묘에 배향되셨습니다. 학문에 전념하신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스물일곱살에 고향에서 향시 즉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시고 서른살에 한양에서 치러진 복시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셔서 진사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늙으신 어머니께서 몹시 아프셔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을 멀리 배웅 나온 하서 김인후선생께서는 시 한 수를 지어 작별을 아쉬워하셨습니다.
당신은 영남의 수재
이백, 두보의 시문과
왕희지, 조맹부의 필재를
겸했구료.
이백(李白)은 중국 당(唐)나라때의 시인으로 멋진 시를 남겨서 '신선의 경지에 이른 시인'이라고 시선(詩仙)이라고 불린 사람입니다. 두보(杜甫)도 중국 당(唐)나라때의 시인으로 감동적인 시를 남겨서 '성인의 경지에 이른 시인'이라고 시성(詩聖)이라고 불렸습니다. 왕희지(王羲之)는 중국 동진(東晉)시대의 서예가로 글씨가 '성인의 경지에 이른 서예가'라고 하여 서성(書聖)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조맹부는 중국 원(元)나라때의 유명한 서화가입니다.
퇴계 이황선생의 뛰어난 시실력과 퇴계 이황선생의 뛰어난 글씨솜씨를 잘 알수 있는 시입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서른네살 때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셨습니다. 장원이란 일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과는 '문과'라고도 하는데 대과에 장원한 사람에게는 임금이 손수 홍패와 어사화를 내리고 어사주를 따라준답니다. '어사화'란 임금이 내리는 꽃을 말하고 '어사주'란 임금이 내리는 술을 말합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올곧고 청렴하게 여러 벼슬에 있으시면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으셨습니다. 나중에 풍기군수를 부임하셨는데 퇴계 이황선생 덕분에 소수서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임금이 이름을 지어 그 이름을 새긴 편액을 내리는 것을 사액이라고 하고 그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합니다.
56세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셨고 58세에는 공조참판이 되셨습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죽기전에 학문을 완성하고 싶어하셔서 60세에 임금에게 허락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서 도산서당을 지었는데 퇴계 이황의 사후 도산서원이 건립되어 추증되었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은 강릉에서 찾아온 젊은 학자인 율곡 이이선생과 시를 주고 받으셨고 또 학문적교류를 하셨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선조임금을 위해 제왕학을 열가지 그림으로 그려 임금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입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맑은 향기를 내뿜는 사군자(四君子)중의 하나인 매화를 좋아하셨고 평생을 학문에 힘쓰셨고 선비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조선시대의 유림(儒林)을 대표하시는 대유학자이셨고 너무 깨끗하시고 욕심이 없으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퇴계 이황선생의 어릴적 시를 소개합니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집이 저절로 되고
앞으로 가고 뒤로도 가니
발이 많기도 하다.
평생을 한 움큼의 물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
강과 호수에 물이 얼마나 많건
말이 무엇하리.
즉 게는 한움큼의 물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으니 그것보다 더 많은 물은 탐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어릴적부터 터득하셨던 것입니다. 앞의 퇴계 이황선생에 관한 내용들은 '바른사'라는 출판사의 '별빛문고' 가운데 강영희님이 쓰신 위인전기 '이황'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저는 조선의 대유학자이신 퇴계 이황선생이 쓰신 앞의 시를 생각하면서 게를 재료로 사용한 게(蟹)잔치국수를 구상해봤습니다. 잔치국수는 예를 들어 결혼식날에 혼인을 마치고 식당에서 먹을수 있는 음식입니다. 그러니까 잔치국수는 주로 마을 잔칫날에 어울려 먹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이번에 한국(KOREA)형 음식모델(4)로 저는 게잔치국수를 구상했는데 게가 가진 특유의 풍미를 느낄수 있는 잔치국수입니다.
원래의 잔치국수는 삶은 밀국수에 고명을 얹고 멸치장국을 부어낸 음식을 뜻하는데 이렇게 따뜻한 장국에 소면을 말아 곁들인 것을 온면 또는 국수장국이라고도 합니다. 하얗고 긴 국수는 장수의 의미를 지닌 식재료로서 예로부터 결혼식이나 생일, 환갑등의 특별한 잔칫날에 손님을 대접해온 대표음식입니다.
잔치국수의 국물내기에서 국물은 멸치장국만이 아니라 소고기 국물, 채소 국물등을 이용해도 된다고 합니다. 온면 위에 올리는 고명은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 색을 맞추어 올리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각각의 재료 준비에 손이 많이 가는 관계로 최근에는 세 가지 정도로 줄여서 올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애호박 대신 주키니 호박을 쓰기도 합니다. 온면은 미리 국수를 삶아놓지 말고 먹기 직전에 바로 삶아야 국수가 불지 않는다고 합니다. 앞의 잔치국수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요리연구가 한복선씨의 '세계인을 위한 한국음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게는 경상북도 영덕(盈德)의 대게가 유명하고 때마다 대게축제가 열리는데 영덕은 관광지로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입니다. 예전에 저도 경상북도 영덕에 가서 영덕대게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맛이 있고 영덕대게만의 매력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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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기발함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성상우님의 다른 글보다 한국(KOREA)형 글들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게 베이스의 잔치국수를 한국(KOREA)형 음식모델로 구상하셨다면 아이디어 착안의 바탕이 되는 퇴계 이황에 대한 배경지식보다는 게 잔치국수를 어떤 재료, 어떤 조리방식을 사용하여 어떻게 만들었으면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