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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1/10 21:21:29
Name aurelius
Subject [역사] 1877년 조선 외교관의 일본시찰

<일동기유>는 강화도 조약(1876) 이듬 해 새로 바뀐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단의 대표 김기수가 집필한 보고서입니다.  


해당 보고서에서 재미있는 일화들이 몇 개 있는데요, 그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근대 외교절차 vs 전통 외교절차의 충돌


모리야마 시게루(일본 외교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국법에는 각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8성(省)의 경(卿 장관(長官))을 차례로 찾아보게 되어 있으니, 만약 경(卿)을 만나지 못하면 다만 명함이라도 드리고 돌아오는 것이 예의입니다. 모레 예를 행한 후에 즉시 이 예를 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김기수)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일찍이 행하지 않은 예입니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각국에서 통행하는 규정인데 무엇이 옳지 않겠습니까? 또 그전의 통신사도 각로(閣老, 과거 막부의 대신들)를 만났으니 옛날에는 이러한 예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통신사의 전례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마는, 다만 국서를 관백(關白)에게 드리고 관에서 며칠간을 머물고 있다가 국서만 받아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혹시 각로를 만난다는 것은 붕우(朋友)를 찾아보는데 불과할 뿐이오니 지금에 와서 어찌 예가 되겠습니까? 또 우리나라는 신라ㆍ고려 이후로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사귀는 것이 모두 전례가 있으니 다만 이 사무만 볼 뿐이며 감히 사적인 교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년에 와서도 해마다 사신이 북경(北京)에 가면 다만 예부 한 곳에만 일을 보고, 예를 마치면 돌아왔으며, 일찍이 각 부(部)와 성(省)을 차례로 찾아보지 않았으니 전례가 뚜렷하였습니다. 이번 걸음은 우리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들고 바로 귀국의 외무성에 나아가서 봄에 귀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던 예를 회사(回謝)하고 옛날 신의(信誼)를 수호(修好)할 뿐이며, 다른 성(省)을 차례로 찾아보라는 명령은 받지 못하였으니 다른 예(禮)를 내 독단으로 행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히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권대승(모리야마 시게루)이,

“각국의 사신들이 한결같이 차례로 각 성의 장관을 찾아보는 것은 벌써 규례가 되었으므로, 이번 수신사의 행차도 각 성의 경(卿)들은 으레 찾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외무성으로서도 또한 말로써는 이것을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각 성의 경들이 만약 모두 수신사를 보려고 한다면 만나보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근신하고 졸수(拙守)하는 것으로써 규율을 만들었으므로, 감히 자기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이 없사오니 지금 이 예(禮 각 성의 경(卿)을 방문하는 일)를 내 단독으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귀국이 우리나라와 다시 옛날 신의를 수호(修好)하여 영구히 잘 지내게 되면 두 나라가 한 나라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졸규(拙規)를 근수(謹守)하는 것은 귀국에서는 아는 바이오니 억지로 해서 안될 일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또 이번 걸음은 오로지 귀 외무성의 주선과 편의 제공에 의지하고 있사오니 각 성에서 혹시 말이 있더라도 귀 외무성에서 잘 설명하여 시비의 단서를 없도록 함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원컨대 두 분께서는 깊이 서량(恕諒)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권대승(모리야마 시게루)은 대답하기를,

“앞으로 더 생각하여 편의한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중략)

고택경범(일본인 외교관)은 또 말하기를,
“내일 문부성(文部省)에서 초청한 일이 없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근일에 귀국 조정에서 여러 곳에 와 달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좇아 나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듣기에는 문부성은 귀국의 태학(太學)이라고 하니 태학에서 초청하는 것을 또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벌써 이를 승낙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잘하셨습니다. 모레는 원로원(元老院)에서 초청이 없었습니까?”
하므로,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또 말하기를,
“승락하였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아직은 승낙하지 않았는데, 원로원은 어떤 사무를 보는 관청입니까? 내가 요사이 몸이 건강치 못하여 명령대로 곧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고택경범은,
“원로원은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로원 의장(議長)은 곧 우리 황상(皇上)의 지친인 2품 친왕(親王)입니다. 친왕께서 공(公)을 보고자 하여 초청하는데, 공이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나는 갑자기 화가 나서 얼굴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친왕은 어떤 친왕입니까? 수신사가 비록 하찮은 사람이지만 다른 나라의 봉명사신(奉命使臣)인데, 다만 자기들이 보고자 하면 쉽사리 부르니 체통과 예절로 헤아려 보더라도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내가 비록 피곤도 하지마는, 이 일에 대해서는 단연코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고택경범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말이 잘못된 것입니다. 친왕의 존체(尊體)로서 합하(閤下)를 보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고, 즉 초청한다는 말입니다. 원로원은 곧 우리 조정의 대소사(大小事)를 회의하는 곳인데, 의장은 곧 친왕입니다. 지금 두 나라가 다시 예전 정의(情誼)를 수호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제도와 시설을 귀국에 알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집으로 초청하지 않고 원로원으로 초청하는 것이온데, 선생께서는 어찌 지나치게 생각하십니까?”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여, 첫머리 한 마디 실언(失言)한 것은 과히 따질 것이 못되었다. 이에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의 말이, 친왕께서 나를 보고자 하여 부른다 하기에, 나 또한 대단히 거슬려서 앞에 지나친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또한 귀국 조정의 후의이오니 내가 어찌 가지 않겠습니까? 공도 이 말로써 미리 알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택경범은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2. 양복 입기 vs 전통 의상 입기

대승(모리야마 시게루)이,

“공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들은 것 중에 응당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한평생 집에서 밥 먹고 있다가 갑자기 만 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오게 되니 물결이 세찬 것이 겁도 나고 배가 뒤집힐까 두려워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듣고 본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비웃을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때때로 갑판에 오르매 몸은 흔들려도 먼 데서 부는 바람과 세찬 물결만은 또한 나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여 주니 이것은 정말 기뻤습니다. 육지에 내려와서는 궁실의 아름다움과 시사(市肆)의 번창함을 보고는 귀국의 부성(富盛)함을 알겠사오니 이것 또한 치하할 만한 일이온데,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대승은 웃으면서,

“의복 제도와 배와 수레의 제작은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지 않을 듯하온데, 이것도 과연 기쁘고 치하할 만한 일입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일찍이 통신사의 기록한 것을 보고 귀국의 제도에 관해서는 대강 알고 있었는데, 저고리와 치마는 넓고도 커서 꾸밈이 없고, 판자(板子)막이와 띠[茅] 울타리는 소탈하면서도 아담하고 빈틈이 없으므로, 한 번 보고도 귀국의 의복과 궁실의 예전 제도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실로 지금 보고서 마음속으로 사랑하였기에 다른 것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대승은 말하기를,

“이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근일에 제작한 의복과 궁실은 모두가 양제(洋制)입니다. 일본인의 심리는 본래 경박하여 다른 사람이 새로 만든 기물(器物)만 보면 반드시 이것을 사랑하고 갖고 싶어하는 까닭에, 그 좋아하는 그대로 맡겨 두어 익히게 하였을 뿐입니다. 또 전쟁에 나가고 배를 타는 데는 이 옷이 아니고는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복 제도를 따른 것이오니 이것 또한 그렇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기구(器具)를 편리하게 만든 이유는 삼가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마는, 공의 말씀에 ‘의복과 궁실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허락하였다.’했는데, 내가 삼가 조롱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다면 공 등의 의복도 모두 양제(洋制)이니 공 등도 좋아하는 바가 있어서 이것을 한 것입니까?”

하고는 이내 크게 웃었다. 대승도 웃으면서,

“이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니 이러한 전례는 조(趙)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있지 않습니까. 귀국의 의복 제도도 어찌 시대에 따라 변함이 없었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의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조 강헌왕(康獻王 강헌(康獻)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시호)은 명(明) 나라 고황제(高皇帝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을 말함)와 나란히 건국하여 의복 제도를 한결같이 명 나라 제도를 따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5백 년 동안에 상하 귀천이 모두 같은 규제(規制)를 사용했으며, 혹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대승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사면에 적국(敵國)이 있으니 또한 이것은 귀국과 비교가 아니됩니다. 우리가 고심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내외의 산하를 보수(保守)하고자 할 뿐이지, 우리나라인들 어찌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해서겠습니까?”

하고는 이내 혀를 차면서 오랫동안 탄식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그 일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앞에 한 말은 농담입니다. 귀국이 고심하며 이 일을 하는 것은 우리도 벌써 촌탁(忖度)한 지 오래입니다.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앞에 한 말은 그저 한 번 희롱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이따금 나와서 관람하여 기계의 편리한 것은 모방하고 제도의 타당한 것은 익히십시오. 이것은 공이 도모할 일입니다. 지금은 두 나라가 마땅히 서로 애호해야만 될 것이오니 공이 이것을 보시고 진실로 모방하고 익히고자 하신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우리의 의견을 알려드리겠습니다.”


3. 조선학문에 대해


문부성의 문학료(文學寮)에서 대승(大丞) 구귀융일(구키 류이치,九鬼隆一)는 극진히 나를 접대하였다. 술자리에서 나에게 묻기를,

“귀국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朱子)만 숭상합니까? 아니면 다른 학문도 숭상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학문은 5백 년 동안 다만 주자만 숭상하였을 뿐입니다. 주자를 어기는 사람은 바로 난적(亂賊)이란 죄목으로 처단하였으며, 과거(科擧) 보는 문자까지도 불가(佛家)ㆍ도가(道家)의 말을 쓰는 사람은 귀양보내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법이 매우 엄중했던 까닭으로 상하와 귀천이 다만 주자(朱子)만 숭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군주의 도리(道理)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대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대로, 아들은 아들의 도리대로, 형은 형의 도리대로, 아우는 아우의 도리대로, 남편은 남편의 도리대로, 아내는 아내의 도리대로 하여, 한결같이 공자ㆍ맹자의 도리만 따랐으니, 다른 갈림길이 엇갈릴 수도 없으며, 다른 술수(術數)가 현혹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하니, 


구귀융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4. 김기수가 본 일본의 빈곤한(?) 학문


서양인과 교통한 후로는, 신당은 우거진 풀밭이 되고 중들은 구렁에 엎어지게 되었으니,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책에 매우 바빠서 이런 것에는 생각이 미칠 여가도 없었으며, 또한 이것은 모두 허문(虛文)이므로 실사(實事)에는 이익됨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의 옛날 풍속의 숭상은 신도(神道)를 먼저 하고 불교를 나중에 하였으며, 또 불교를 먼저 하고 유교(儒敎)를 나중에 하였는데, 신도와 불교가 이 모양인데 유교는 다시 무엇을 논의하겠는가?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 교습(敎習)시킬 적에 나이가 8세에서 15세까지는 그 국문(國文)과 함께 한자(漢字)를 읽게 하고, 한자를 이미 통하면 다시 경전(經傳)은 읽지 않고, 농서(農書)ㆍ병서(兵書)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종수(種樹)의 글만 즐겨서 상시로 읽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녀ㆍ상인(商人)ㆍ어린아이들까지도 계척(界尺 문구(文具) 곧 글로 쓴 명령)을 한 번 내리면 성위(星緯 천문(天文))를 헤아리게 되고, 호령 소리가 조금 일어나면 지여(地輿 땅)를 가리키게 되었으나, 만약 공자(孔子)ㆍ맹자(孟子)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이내 눈이 동그래지고 입을 머뭇거리면서 그것이 무슨 말인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5. 근대적 견학(見學)에 대한 태도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여관에서 매우 적적하실 터인데, 나와서 함께 놀며 울적한 마음을 조금 풀지 않으시렵니까?”

하므로, 나(김기수)는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성품이 본디부터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실로 울적한 것이 고통이 되는지는 알지 못하므로, 놀고 구경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답답하게도 공은 끝내 나의 고심함을 알지 못하십니까 누가 공에게 구경만 시키려는 것입니까. 지금에 와서 두 나라는 한집안이 되고 말았는데, 우리나라는 사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외적이 이르게 되면 대적해낼 수가 없어서 오늘날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결같이 남에게 제어만 받을 수 없는 까닭으로, 부국강병의 술책을 다 써서 군대를 많이 두고 기계를 편리하게 만들기를 앞세워 지금에 와서는 병졸도 정예하고 양식도 풍족하며 기계도 아주 새롭게 되었으니 거의 믿고 외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귀국 산천의 험준한 것은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겠으나, 오히려 근해(近海)에 외적이 들이닥칠 걱정이 많으니 전혀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경하라고 누누이 말하는 것은 군제(軍制)를 두루 살펴보아서 좋은 것은 개혁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이요, 기계를 자세히 보아서 편리한 것을 모방하는 것이 두 가지 일이요, 풍속을 두루 살펴보아서 채용할 것은 채용하는 것이 세 가지 일입니다. 귀국에 돌아가시거든 확실하게 의논을 정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여서 두 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여 외환을 방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대단히 감사합니다. 귀국의 성의는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이번 걸음에 또한 재주 있는 사람 몇 명을 데리고 와서 제도는 입으로, 기기(器機)는 손으로 모방하고, 풍속은 귀와 눈으로 기억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두 나라가 오랫동안 의심하여 멀리하던 끝에 다행히 봄의 일(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을 말함)이 있게 되었으니 일찍 와서 사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개월 후에는 반드시 귀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것이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이보다 먼저 수신(修信)하고자 하여 갑자기 행장을 차렸던 것이니 실로 이러한 일에는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성규(成規)는 신의를 앞세우고 사공(事功)은 뒤로 하기 때문에 먼저 수신하기에만 서둘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또한 산중의 빈사(貧士)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고 재식(才識)이 전혀 없으니, 비록 손으로 기물(器物)을 잡고 종일토록 만지더라도 실로 어떤 것이 편리하며 어떤 것이 무딘지도 알 수 없으며, 일행의 수행원들도 모두 몸가짐이 근신하고 옹졸하여, 다만 득죄하지 않는 것만으로 준칙을 삼게 되니 그들도 또한 이 사람과 비슷할 뿐입니다. 비록 날마다 유람하고 구경하더라도 다만 몸만 수고로울 뿐 아무런 이익되는 점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은 현재 맡은 일만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간 후에 잘 의논하겠사오며, 또 귀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다시 확실히 의논할 날이 있을 것이니 하필 구차스럽게 눈앞의 충고만 따라서 갑자기 책임만 얼버무려, 우리에게도 소득이 없으면서 당신들의 후의만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공의 말씀 또한 옳습니다.”

하고는, 이내 자기 나라의 군사가 정예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외환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뜻을 많이 말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귀국은 이미 이같이 부강하게 되었으므로 외환이 닥치는 것은 마땅히 우리에게 힘을 빌 일이 없는데도, 오히려 이같이 정성스러우니 귀국의 성의는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어찌 이것을 알고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 사람이 재주가 없으므로 실로 갑자기 구경하는 동안에 소득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마는, 바라건대 조금도 의심하고 조격(阻隔)함이 없이, 모든 일을 지시하여 가르쳐 주신다면 이 사람은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돌아가서 우리 조정에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또 말하기를,

“매양 귀국과 담판할 적에는 말이 지리하고 일을 오래 끌어서 한 가지도 즉시 결정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나라에 이익되는 일은 상하가 한마음이 되어 딱 잘라서 결행하고 머뭇거려 미루는 일이 없습니다. 6개월 후에 세목(細目)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혹시라도 그전처럼 지연시킨다면 답답하게 될 것이니 중간에서 교섭하는 사람이 어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규모(規模)는 원래 이와 같으며, 귀국처럼 전권대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도 딱 결단하고 실행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소관(小官) 따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소관은 대관에게 알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아뢰게 되니 허다한 지연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조심하고 근신하여, 방종하고 자행하지 않는 일은 이것이 우리나라의 한 가지 예전 규칙이므로, 공(公)들의 훗날 일에도 그것을 일마다 청종(聽從)하겠다고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미리 양해하여야 될 것입니다. 대체로 세상에 어떤 일이라도 어찌 다 자기 뜻대로 되겠습니까? 귀국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다 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어떤 말이 있더라도 귀국에서도 다 시행하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은 대체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매우 피곤하므로, 드디어 일어나서 읍(揖)하고 돌아왔다.
원료관(遠遼館)에서 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궁본소일(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과 차를 같이 타고 박물원(博物院)으로 향하여 갔다. 궁본대승(宮本大丞 궁본소일)이 말을 전하기를,

“제 집이 관소(館所)와의 거리가 비록 멀지마는, 며칠 내에 귀사(貴使)를 맞이하여 오찬을 대접하고자 하는데, 귀사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귀관의 초청에 감히 빨리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봄의 강화도의 일로써 귀관(貴官)의 명성은 들었사온데, 이 사람이 올 때에 신대관(申大官)께서 또한 부탁하기를 모든 일을 귀공과 서로 의논하라 하였습니다. 이곳에 온 후로 바로 귀관을 친히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형편이 면면(面面)이 다 방문할 수 없으므로 문득 길을 터놓으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이며, 또 혹시 여러 사람이 모인 좌석에서 만날 적엔 혼자 정답게 하는 것도 또한 될 수 없는 일이므로 심심하게 날짜만 보내고 있으니 마음이 근질근질합니다. 이제 다행히 차를 같이 타게 되었으므로 마음속을 터놓고 싶은데 귀관의 의사는 또한 이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이제부터 두 나라는 한집안이 되었는데 귀국 조정에서 나에게 마음대로 유람케 하여 주니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예전 규칙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는 밖에 나가서 구경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만약 명령을 어기기가 곤란하여 한결같이 방종한다면, 우리 조정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비록 병기(兵器)ㆍ농구(農具) 등의 기계로 말하더라도 이 사람은 이미 재주가 모자란 사람이며, 수행원들도 또한 적임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다만 구경만 할 뿐이지 무엇이 이익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번 걸음은 다만 수신(修信)하는 것으로 중점을 삼고 모든 유학(遊學) 관계는 훗날로 미루고자 하오니 이 뜻을 양해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궁본소일은 말하기를,

“만약 회답하는 국서에 ‘우리 황상께서 명령하셨으므로 귀하가 자주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조금 구경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귀하에게는 예전 규칙을 깨뜨려 버렸다는 꾸지람은 없을 것이니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것은 더욱 불가한 일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자기 체면을 손상시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같은 지시는 더욱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이 올 때에 우리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자왔는데, 우리 주상께서는 이 사람의 원행(遠行)하는 것을 염려하시며, 이곳에 와서 유련하는 기일도 15일을 넘기지 못하도록 정녕히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15일의 기일도 멀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잘 주선하여 빨리 돌려보내어 이 정한 기일을 넘기지 않도록 함이 이 사람의 소망입니다.”

하니, 궁본소일은 대답하기를,

“두 가지 일은 모두 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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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종합해봤을 때 이때까지만(1877년) 해도 일본은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물론 자국의 국익 때문이지만) 도와주려고 했던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국도 이제 막 세이난 전쟁(서남전쟁)을 거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서구열강이 점점 동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에 겁을 먹은 일본은 조선도 부국강병책으로 근대화시켜 자국을 위한 방파제로 삼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 관리들에게 계속 근대적 공장과 군대, 여러가지 기술과 제도 등을 견학하게 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관리들은 너무 오랫동안 '유교 근본주의' 솔직히 개인적으로 볼 때 '유교 와하비즘, 또는 유교 탈레반'에 완전히 종속되어 실존하는 세계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외교관들이 계속 수차례 여러 견학코스를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이를 거절하고 또는 보아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문물을 보여준다 한들, [전통의 언어]로 이를 해석하려고 했고, 이것이 실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사실 1700년대 후반 일본에 다녀왔던 조선통신사들도 일본의 아라이 하쿠세키한테 망신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조선통신사 사절단에게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국가에 대해 알고 있는가라고 물어봤을 때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하쿠세키는 당신네 국가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라며 조롱당했었죠. 


1877년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인원들이 유능하고 깨어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식민지까지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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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0 21:28
수정 아이콘
대체로는 갑신정변 실패 시점이 기점이었다고 기억이 나네요. 조선이 강해지게 북돋아주고 우방으로 삼을 것인가 우리가 접수하여 방파제로 운영할 것인가의 논쟁에서 후자쪽으로 무게추가 쏠린
19/11/10 21:37
수정 아이콘
그놈의 유교탈레반 흐흐.. 원래 알고 보는 역사는 분석이 참 쉽고 해결책도 쉽게 내놓을 수 있을 거 같은 착각이 들지만 현실은 미중무역 협상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죠.
절름발이이리
19/11/10 21:38
수정 아이콘
조선이 아무리 발악했어봤자 무리였죠.
WeareUnity
19/11/1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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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과 다름없이 몇몇은 나랏돈은 눈먼돈! 이러면서 기생 관광이나 다녔을 것 같습니다.
19/11/10 22:01
수정 아이콘
전 저때쯤이면 유교 이전에 관리들 기강이 망가질때로 망가진 게 우선이라고 봐서...

그나마 척화파 소리 듣는 산골 사림들이나 애국심이 있었고 개항에 호의적이었던 경화거족들은 죄다 썩어문드러져서 국익보다 사익을 우선으로 여기는 놈들 투성이었죠. 그리고 그나마 애국심과 깨인 눈을 함께 겸비했던 소수 급진개화파들은 너무 서두르다 갑신정변 뙇!

...답이 없음.
19/11/10 22:12
수정 아이콘
대화록을 보면 무한한 꼰대력이 느껴집니다.
물론 이 기록은 일본측의 조작이 있는 기록이겠죠. 제발 그랬으면......
Misaki Mei
19/11/10 23:05
수정 아이콘
첫줄에 김기수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이라고 적혀 있는데, 일본 측에서 쓴 기록이 아니라 조선 측에서 보고서로 올리려고 작성한 기록이라면 일본의 조작이 들어갈 부분이 없지 않나요?
박정희
19/11/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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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임. 암튼 주작임.) 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익균
19/11/1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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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하겠다고 설치다가 왕 눈에 벗어나면 사형당하기 십상;
미국으로 뜨는 게 답인가.
아슨벵거날
19/11/1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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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본토 명과 청은 양명학 고증학 공양학으로 넘어간거에 비하면 조선 유학은 성리학에서 끝나버렸죠
19/11/10 22:2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양명학은 사실 명에서도 유행하는 분파 정도 위치까지는 올라갔지만 성리학을 완전히 대체했다고까지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증학같은 경우는 사실 의외로(?) 세도정치기가 조선에 고증학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했는데 특성상 우리같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은 못받고 있죠...
Liberalist
19/11/10 22:44
수정 아이콘
(수정됨) 명청도 조선만큼의 지위가 아니었다뿐이지 결국에는 관학이 성리학이었고, 당시 지식인 계층이었던 향신들도 거진 성리학자들이었죠. 명청 시기에 양명학, 고증학 등이 성리학 헤게모니를 대체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왕부지, 고염무, 대진 이런 클라스 있는 비성리학 계열 유학자들이 꽤 많이 나왔고 이름을 떨쳤다는 점에서는 조선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 사람들도 결국에는 재야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왜 조선 유학만 이 모양이냐 비판할 것까지는 없다 봅니다.
아슨벵거날
19/11/10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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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하곡 허균이 수용한 양명학이 있기는 있었으나 배척당하였고 결국 큰 발전없이 한말유학은 종교화 되었고 공자교 운동이 발생하는 아주 후퇴를 많이 하였죠. 망국의 끝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시기 중국 지식인 양계초 모종삼 등에 비해서 최고 엘리트 지식인들이 당시 상황을 너무 몰랐다는게 안타깝습니다.
19/11/1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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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외부세력이 아니라면 아직 망할 시기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부적 문제로 뒤집어졌던 신라나 고려와는 상황이 달랐죠. 내부적인 개혁이라면 사실 흥선군이 상당히 하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양계초 모종삼을 이야기 하기엔 저 시기와 시대적으로 맞지도 않죠. 솔직히 모종삼은 그냥 20세기 인물 아닙니까..
3.141592
19/11/10 23:46
수정 아이콘
'외부세력이 아니라면'이라는 가정이 말이 됩니까; 중국이 분열되어있던 통일신라->고려 건국시기정도를 제외하면 한반도 국가정세의 대변혁이 일어날땐 외부세력(이라고 하지만 중국세력)의 영향이 항상 크게 작용했는데 중국이 개털린 아편전쟁을 보고도 대비하지 못한건 핑계가 되지 않죠.
19/11/11 00:12
수정 아이콘
아편전쟁 대비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조선이 왜 성리학 이후로 넘어가지 못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요?

기존 사상을 버리는 건 옆나라 상황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내부적으로 기존 체제로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판단될 때 일어나는 거죠. 고려말 신진사대부처럼요. 중국도 양명학이나 고증학이 나왔다고 하나 그래도 근간은 성리학이었고, 이후 공양학의 경우도 아편전쟁 이후에나 나옵니다. 조선의 경우 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위협이 내부적인 시스템붕괴로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후 외세에 의해 조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렇게 수백년간 고수했던 성리학을 그냥 한순간에 버려버리죠.

이는 다시 말하면 교조화 때문에 성리학을 버리지 못했다라는 게 얼마나 환상같은 말인지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교조화가 되었다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현대세대에 이르도록 세속화되지 못하고 교리를 문자그대로 따라야 하는데 조선은 성리학을 너무나도 쉽게 버려 버리죠. 그 이전 성리학을 버리지 못한 건 교조화되서가 아니라 버릴 이유가 없어서라 판단하는 게 맞다고 전 봅니다.
이리스피르
19/11/1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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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세력의 영향이 없는 때가 어딨다고요... 거기에 대처하는게 항상 문젠거죠 고려도 왜구 홍건적이라는 외부 문제가 있었고 신라는 뭐 당 없었나요? 통일이전엔 고구려, 백제라는 외부 문제가 존재했고요
19/11/1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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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댓글로 대신 할게요.
Liberalist
19/11/1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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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이후 시점을 기준으로 보자면 말씀하시는 바에는 대체로 공감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건 명청대 대부분은 중국이나 우리나 유학의 발전상 면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는거죠. 애초에 중국에서 양명학이 메이져였던 시기는 엄청나게 짧고(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 전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고증학은 문자의 옥 이후로 지식인들이 사상범 안 되려고 도피성으로 택했던 노선이지, 구체성이나 대안 제시 면에서 성리학보다 월등히 발전된 형태라 보기 힘듭니다.
아슨벵거날
19/11/11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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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좀 많이 써주세요.
19/11/1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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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네요..
Liberalist
19/11/10 22:50
수정 아이콘
너무 바깥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실책이고, 여기에 더해 당대 기준으로도 수신사가 일본 방문했을 시점이 이미 아편 전쟁 터진지 수십 년 뒤임에도 불구하고 위기의식 하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에서 지적인 나태함이 보여 화도 조금 나고 그렇습니다. 제가 저 한심한 꼬락서니 안 보이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만의 가치관, 세계관에 갇히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펠릭스30세(무직)
19/11/1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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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조차 10년 전만 해도 양이의 멱을 따자고 부들대던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쓰마 쵸슈라서.....

개인적으로는 고종에게 제일 욕을 하는 편입니다.

놀랍게도 조선이라는 나라의 싸이즈가 작은게 아니라서요. 당시 인구수면 프랑스, 독일, 영국중에 조선보다 인구가 두배가 되는 나라가 없었거든요.

할려면 못하는건 아니었지요.
19/11/1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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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기본적으로는 재정능력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근대화 좀 해보려다 돈문제때문에 좌초하는 페이스는 당시 비서구 국가들의 일반적인 페이스였으니까요. 조선처럼 재정적 한계 안에서만 하느라 제대로 판 벌려보지도 못한 경우냐 이집트처럼 판은 거하게 벌려봤는데 대신 그러느라 진 빚때문에 망하느냐 차이는 있지만...

일본같은 경우는 에도막부 시절부터 원체 국내적으로 쥐어짜본 또 쥐어짜여본 경험이 있으니만큼 오히려 이런 재정조달력 측면에선 나은면이 있었고, 청일전쟁이란 도박에서 이기면서 '따서 갚으면 되지'가 운좋게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펠릭스30세(무직)
19/11/11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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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때문에 고종 욕하는 거거든요.

사실 명성황후가 욕먹는게 그 재정낭비인데 저는 주범은 고종이라 봅니다. 조선왕조에서 임금의 묵인하에 중전이 사치를 한다? 말도 안되는 거거든요. 놀랍게도 자본이 없는게 아니었어요. 워낙 소국과민의 사상에 찌들어서 왕조시대때는 잘 안드러나기도 했었고 할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중요한건 안한거죠. 72년 부터 갑신정변까지 12년이 지난 시깁니다. 대원군 집권이 겨우 10년이었어요.
19/11/11 01:19
수정 아이콘
고종이 자기 주머니 중요시하고 사치스런 사람이었던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긴 하겠지요. 이용익 심복으로 끼고 내장원으로 자기 주머니 관리한거야 뭐 워낙 유명한 일이긴 합니다만...

다만 저는 이너 서클 한줌이 soso하게 쓰는데 들어가는 재원과 본격적 근대화 사업에 들어가는 재원은 규모상 차원이 다르다고 봅니다. 특히 군대양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요. 그리고 애초에 긁어모을 재원 규모 자체도 미미했던 베이스는 변하지 않을거구요. 당장 대원군이 숙원사업 할 돈이 없어서 당백전 발행하던 나라고, 중국의 관세처럼 새로 짭짤한 돈줄이 생기는 상황도 아니었지요.
antidote
19/11/11 01:28
수정 아이콘
저는 주머니 관리 문제는 그냥 당시 조선이 아직 왕조국가라서 그 이상의 발상을 한다는게 힘들었던 시절이라고 봐야 한다는 쪽입니다. 전근대 국가에서 정부 재정, 왕실 자금 둘 중 어느 하나가 대단히 더 중요하다고 보기는 힘들죠. 잘 돌아갈지 어떨지 모르는 입헌군주제라면 모를까 일단 절대왕권에 가깝던 군주제 국가에서 왕의 사재를 털어서 개혁을 시도한다는 거 자체가 왕가 입장에서는 도박에 가까운 것이죠.
antidote
19/11/11 01:24
수정 아이콘
화폐경제 조차도 제대로 안돌아가던 나라에서 얼마나 돈을 쥐어 짜내봐야 짜낼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선에서 열심히 농민들이 농사 지어서 나오는 쌀이나 길쌈해서 나오는 직물이 국제시장에서 대단한 가치가 있기라도 했나요?
상품작물이라 할만한 것도 인삼 정도가 끝이었죠. 내다 팔게 없는데 어디에 돈이 있습니까.
외국에서 장비 사오고 무기 사오고 신식 군대 설립하고 젊은애들 유학시켜서 제도와 기술을 배워오는게 죄다 돈이 필요하고 특히 외국에서 통용이 되는 돈이 필요한데 조선이 외화벌이를 뭘 팔아서 합니까.
19/11/11 01:39
수정 아이콘
쌀은 뭐 최소한 일본시장(?) 정도는 있었으니까...직물도 사실 조선 전기까지는 일본에서 무명을 거의 자체생산 못해서 주요 교역품 중에 하나였는데, 에도막부 거치면서 자체수급을 완료해버린게 아쉬운 품목이긴 하지요
전설덱장인
19/11/11 13:23
수정 아이콘
그건 최소한 하려는 시도라도 있었을 때나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 봅니다. 조선이 뭔가를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시기는 이미 때를 한참이나 넘겼을 때란 게 문제죠. 당장 본문 내용만 봐도 조선의 윗대가리들에게서 느껴지는 무한한 꼰대력과 유교 탈레반 사상은 근대화를 못한다가 아니라 할 필요가 없다에 가까웠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리수달
19/11/11 15:28
수정 아이콘
나라국가운영은 개인적인 사치를 줄인다고 해결 할수없습니다
조선은 조세 제도도 그 시점에 맞지 않았죠
조선의 주요 세금 수단은 전세이죠. 토지에 세금을 붙이는 거죠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이게 통하지만 근대로 넘어가는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제정부족 현상이됩니다.
그리고 조선후기부터 소작농이 늘어나서 농사짓는사람 칠할이 소작농인 상태가 되면서 그나마 전세로 걷는세금도 줄여벌였죠
이런 세금 부족을 메울려고 택한것이 군역세이죠
군역은 땅을 가지던 못가지던 장사를 하던 수공업자이던 모든 성인남자들이 내던 세금이였죠
다만 이것이 소득에 비례한 세금이 아니고 전세의 부족분을 매우기 위해서 나라에서 정한 군역의 한도를 넘어서 걷기도하고 어린아이한테도 군역을 매기고 심지어 죽은사람에게 까지도 군역세를 매기기도 합니다.
이런 황구첨정, 백골징포의 대상은 항상 힘없는 일반 백성이였죠
이런 군역새의 부담은 조세저항으로 이어지고 진주민란으로 시작해 전국적인 민란으로 이어지죠

더욱이 그나마 근근히 이어 가던 조세 시스템을 완전히 박살내건 흥선대원군 입니다.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체제가 무너지고 제정수입이 더악화 되었죠
당백전 발행초기는 당장제정 수입이 급증했지만 곧바로 당백전 가치가 뚝뚝 떨어지면서 제정수입이 예전보다 더 악화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평통보 백개를 내야 하는 세금에 당백전 하나만 내면 됐거는요
실제로 당백전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10개도 안됐으니까요

아무튼 고종때 제정난의 주요 원인은 민비의 사치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조세제도랑 흥선대원군의 뻘짓으로 개화기 근대화에 필요한 국가기반 사업을 할 돈이 없었죠
절름발이이리
19/11/11 01:50
수정 아이콘
할려고 해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산업화에 필요한 물적 토대가 처참한 상태였고, 주변국과의 국력은 따라잡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그 주변국들이 침탈을 해오고 있었지요. 고2때까지 초등 산수수준만 띈 학생이 반 1~2등 하는 친구처럼 한글로 써진 책 읽을수 있다고 말해봐야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름 일제가 산업화 수십년 시켜놓고 독립한 대한민국도 미국과 일본이 돈 퍼부어주기 전까지는 변변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화란게 인구수좀 있다고 초파리마냥 발생하는게 아닙니다.
antidote
19/11/11 01:48
수정 아이콘
우리가 현재 출산율을 올리고 싶어도 못올리는 것처럼 당시의 사대부가 하고싶어도 못한 측면도 많았겠죠.
전설덱장인
19/11/11 13:26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는 지금 출산율이 낮다는 게 엄청난 문제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고 높이려고 머리라도 싸매고 있는데 저때 조선은 어떤 기록을 봐도 그런 다급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차이점이죠. 나중에야 뭔가를 해보려고는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죠. 더 빠르게 뭘 해보려고 했어도 전혀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일본시찰하러 간 외교관의 저 기록만 봐도 조선은 저 때 발등에 이미 불이 떨어졌다는 자각 자체가 별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게 가장 문제죠.
19/11/11 14:48
수정 아이콘
글쎄요, 사실 지금의 한국 출산율 문제도 "[나중에야 뭔가를 해보려고는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죠.]" 의 전형으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높죠.
전설덱장인
19/11/11 14:56
수정 아이콘
출산율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는 건 노무현 정부 때부터도 많이 나오던 말입니다. 예시가 전혀 맞지 않는걸 억지로 우겨넣는 겁니다.
19/11/11 15:24
수정 아이콘
뭐, 양이가 위험하니 대비해아한다는 말도 아편전쟁-병인양요-신미양요 때부터 많이 나왔습니다.
"대비해야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것" 과 이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 위한 국가차원의 노력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aurelius
19/11/11 15:16
수정 아이콘
아닙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관료들이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정책적으로도 많은 고민들이 있습니다. 정부 차원의 대책위원회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언론과 방송이 이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 언론도 너무 자극적인것만 좋아해서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단신처리해버리죠.
19/11/11 15:3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조선과 대한민국의 사례는 엄연히 차이가 있지요. 하지만 "정책적 고민"으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닙니다.

조선도 두차례의 양요를 시작으로 나름 서양을 배우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1880년대면 "대부분의 관료들이 이를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많은 고민을 하던" 시기이죠. 하지만. 나라의 근대화라는건 말 그대로 [국가의 뼈가 뒤틀릴 각오]가 필요한거고, 그 와중에 내전 몇번 치를 각오정도는 해야하는 일이지, 관료들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수준에서 해결될 성질이 아니죠.

조선도 근대화를 위해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 1860~1870년대면 서양에서 선교사도 좀 밀항시켜 데려오고, 서양 무기도 좀 복제해보고, 밀수할 수 있는 서양의 신기한 물건들도 좀 밀수해보고, 서양 책도 암암리에 구해서 돌려보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들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역사적으로 별 의미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십몇년째 다루어지고 있는데, 아직 대한민국이 "뼈가 뒤틀릴 각오"를 하고 문제의 본질에 부딫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웨덴은 전체 인구의 17%가 난민을 포함한 해외 이민자라고 하더군요. 만약 한국이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민자 인구를 900만까지 늘린다면, 한국 사회가 이러한 변화를 감내할 수 있습니까?
프랑스는 전체 출생자 중 혼외 자녀의 비율이 거의 60%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전체 출생자의 60%가 혼외자녀라고 하면, 한국 사회가 이런 사회구조를 감내할 수 있습니까?
북서부 유럽국가들은 동성부부(파트너)도 자녀를 입양하여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 마련을 해놓았고, 이성 부부와 같은 혜택을 줍니다. 이걸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런 본질적인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하면, 기껏해야 서양식 무기좀 구해서 별기군이니 뭐니 만들어본 다음 "우리는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라고 자위하는 조선 꼴이나 똑같은거죠.

그리고 150년뒤에 우리 후손들은 "2020년대의 우리 선조들은, 출산율 문제에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고, [나중에야 뭔가를 해보려고는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죠.]" 라고 일침놓겠죠
겨울삼각형
19/11/11 18:20
수정 아이콘
사대부가 유교적인 사상을 버리고 해외의 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것은,

본인들의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모든 사회구성을 뒤집어 엎자라는것 입니다.

후대의 우리가 보면 안타까운 꼰대로 보일순 있지만,
당시 지도층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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