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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1/08 23: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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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갑자기 감성적이 되어서 쓴 (사실 맥주 두 캔 먹어서 쓴) 첫사랑 이야기 (수정됨)

1.

억압과 폭력으로 가득한 고교생활은 사회구성원으로써 알아야 할 기본적 지식과 소양을 기르는 데 일조함을 부정할 순 없으나,

독립된 인간으로써의 정신적 성숙과 발전을 저해함은 나의 경험적 체득으로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저러한 병패를 깨달은 스무 살 신입생의 나는 이후의 모든 스탯을 정신적 성숙과 발전에 찍고

독립된 인간으로써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하여 술과 PC방, 당구장 등으로 대변되는 약간의 일탈과 그걸 함께 공유하는 동성 친구와의 끈끈한 우정으로

정신적 성숙과 발전을 드디어 달성!

… 할 리는 만무하였으나, 그맘때 애송이가 그렇듯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친구가 다인 양 그러고 살았더랬다.



흔한 연애 얘기가 그렇듯, 나의 그녀가 내 눈에 박힌 것은 그맘때 쯤이었다.




2.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 수업 끝나고 A반 B반 다 같이 대면식 하기로 했어. 되는 사람은 6시까지 XX로 모여. 회비는 5천 원이다.”


과 대표의 공지에 다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속마음이 그랬을 리 없음은 6시에 모여든 머릿수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6시가 되기도 전에 우리는 모두 쭈뼛대며 약속장소에 모여 있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두 시간 뒤 우리는 금세 부어라 마셔라, 권커니 잣커니, 지화자 좋구나, 영감 왜 불러 (아 이건 아니고) 이러고 놀았더랬다.


술자리는 마라톤과 같다.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괴물 같은 체력을 가졌거나, 페이스 조절을 잘하거나 둘 중 하나이며,

당연하게도 자신의 체력을 넘어 오버페이스를 한 사람은 중간에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용궁의 거북이도 탐을 낼 스무 살 나의 생간은 취할 줄을 몰랐고, 나는 선두그룹에서 마지막 코스인 노래방까지 다다랐다



3.

“아 씨X. 나 낮에 Y한테 들이댔다가 차였다.”


인간은, 아니 대부분의 나약한 동물들은 무리를 이루길 좋아한다.

우리는 본능에 따라 끼리끼리 작은 무리를 이루었고, 학기 초 세력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인지 그 무리의 결속력은 의외로 단단했다.

아니, 놀랍게도 불과 1개월 전 만난 우리에게 끈끈한 우정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까지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끈끈한 내 친구를 감히 찼다니! 분개하기에 당연한 일 아닌가!


“Y? Y가 누군데 그래? 뭐가 잘났다고.”


때마침 우리 앞을 지나가는 Y.

친구 P는 눈짓으로 Y를 가리켰다. 얼핏 본 Y는 수수한 모습의 평범한 친구였다.


“별로 예쁘지도 않구만, 지가 뭐라고 널 차냐? 야.야. 됐어. 더 예쁜 애 많아. 술이나 마셔”



4.

[1. 두루 널리 미치는, 또는 그런 것. 2.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또는 그런 것]

초록창 검색에 ‘보편적’이라고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국어사전의 설명이다.


남자들은 저마다 이상형이 다르고 각자의 눈높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적 관점’이란 게 대동소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매력적인 여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는 구애에 시달리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구애에 있어 비교적 자유롭다.

말하자면 ‘보편적’ 매력을 가진 여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두루 널리 미치’며, 많은 남자들의 이상형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것이 특징이다.


내 눈이 해태 눈이라서 알아보는 것이 늦었을 뿐, Y는 보편적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5.
Y와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은 Y가 3연승으로 과에서 승승장구하던 봄의 어느 날이었다.


내 귀가 습자지 만큼 얇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초 P를 시작으로 J와 L의 대쉬를 차례로 걷어찬 Y는

어느새 내게도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명세빈 배우님이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으니 수수한 그녀는 어찌 보면 시대상에 가장 부합하는 미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유기화학을 조금 빨리 깨우친 것은 행운이었다.

도무지 한 톨의 관심도 가지 않는 공부라는 거대한 스트레스 덩어리 안에서 가끔 티끌 같은 재미를 발견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내 경우는 그게 유기화학이었다.

전공필수라고 하지만, 어차피 1학년 초보 수준의 내용이었으니 이해 못 할 내용은 아니었는데, 그게 또 의외로 나와 잘 맞았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이 기초적인 유기화학을 유난히 힘들어했고 하나둘 친구들을 도와주다 보니

나는 어느새 빈 강의실 화이트보드 앞에서 십여 명의 친구들에게 특강을 하는 1타 강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십여 명 중에는 Y가 있었다.



6.
나는… 분명 나는 Y와 조금은 특별한 관계였다.


Y는 남들에게 말 못 할 고민을 나에게 꽤나 많이 털어놓았고,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팅으로 엮어주기도 했다.

가끔은 영화도 보았으며, 단둘이 밥도 꽤 먹었다.

한번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취한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고, 택시비가 없어 그녀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다.

우리는 둘만의 추억을 만들었고,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으며, 나는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분명 그녀도 나에게서 좋은 면을 바라보고 있다 생각했다.


물론 그 와중에 뭣도 모르는 J와 S가 Y에게 대쉬를 했다 차이기도 했다.



7.
나는 용기가 없었다. 특히나 여자를 대함에 용기가 없었다.

거절을 너무도 두려워하는 용기가 없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스무 살 이전에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스무 살에도 그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은 고백하겠노라 몇 번을 다짐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웃어주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섣부른 고백으로 인해 다시는 저 얼굴을 보지 못할까 봐?

‘너네들과는 달라’라고 스스로 우쭐했던 P, J, L, J, S와 같이 그녀의 전리품이 될까 봐?


생각해보니 두려운 것이 많았구나.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감추기 힘든 것이 기침과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변태도 아니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있어 만족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 더 발전된 관계를 갈구하는 것이 사람이고, 나 또한 그랬다.



8.
결과론적이지만 나의 타이밍은 더할 나위 없이 나빴다.


어쩌면 성공했을 수도 있고, 최소한 차이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 절대 타이밍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내가 선택한 날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는데, 하필 그날은 Y의 동아리 엠티일이었다.

별수 있나, 그녀가 엠티에서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 일요일 그녀의 아르바이트 이후를 노렸다.


하필 야간 알바라니.. 끝나는 시간은 11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녀 집 근처에 사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고 11시 즈음 그녀가 일하는 편의점을 찾았다.


한밤의 한적한 가로수길을 그녀와 둘이 걸었다. 그녀가 부담을 가지지 않게 최대한 밝은 얘기들을 꺼냈지만,

그녀의 얼굴은 나와 같이 밝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밤 11시에 찾아온 이성 친구에게 부담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9.
우리의 짧은 동행은, 한 번 와 본 적 있는 그녀의 집 앞에서 끝났다. 이제는 얘기를 할 때였다.


“……………..”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좋아한다, 사귀자’는 취지의 말을 했겠지만, 그녀의 대답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내가 했던 고백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의 대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 호흡을 쉰 Y는 난처한 표정으로 답을 주었다.


“미안해…. 사실은 어제 갔다 온 엠티에서 남자친구 생겼어.”



10.
나에게는 다행히도 같이 술을 마셨던 친구가 있었다.


지난번과 같이 지하철은 끊긴 시간이지만, 비참한 마음으로 그녀의 집 앞 놀이터에서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그 친구에게 가장 먼저 나의 패배를 알려야만 했고, 실연 직후의 불안정한 멘탈을 숨기고 최대한 의연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만취한 그녀를 데려다주었던, 내 생에 아름다웠던 그 날과는 다르게

서리를 피할 지붕과 바람을 막아줄 벽은 있었으나, 나의 마음은 광야에 홀로 있음과 다르지 않았다.


나쁜새X. 몸도 마음도 너무나 시렸는데, 이불 하나 챙겨주지 않고 달랑 베개만 주다니.

당시의 헛헛함은 분명 이불을 주지 않은 그 친구 놈 탓이지 내가 실연당했기 때문은 아니다.



11.
가끔 학교에서 마주치는 Y커플은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남자애는 좀 잘생긴 것 같… 아니, 그냥 뭐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머리가 너무 컸고, Y는 여전히 수수한 매력이 있었다.

같은 학부인 나 같은 사람과 사귀었으면 점심도 같이 먹고, 수업도 같이 듣고 참 행복했을 텐데,

다른 학부와 사귀는 Y는 참 불편해 보였다.

경험상 Y의 남자친구 같은 인상이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여자를 쉽게 울리는데, 어쩜 그리 보는 눈이 없는지 딱해 보였다.


아무튼 너무 안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인사하려 노력했고, 친구들에게 실연의 타격이 없음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티가 안 날 리가 없잖아?



12.

그 둘은 그 뒤로 2년이 좀 안 되게 사귀었고, 그사이 나는 군대를 갔다.


군 생활 동안 Y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당시 기분은 글로도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 생활 동안 때때로 Y와 연락을 주고받던 나는 상병 휴가를 나와 비로소 Y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술도 한잔했다.

그리고 광화문 앞 가로수 길을 걸었다. 마치 2년쯤 전 내가 대차게 까였던 그날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2년을 궁금해했던 질문을 그날 할 수 있었다.

너무 찌질한 질문이었고, 이 답마저 부정적이면 스무 살 내 첫사랑의 아름다운 추억마저 환상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차마 하지 못했던,

사실은 이제 와 의미 없는 그 질문


“니가 남자친구를 사귀기 전에 내가 먼저 고백했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13.

이날의 질문은 정확히 기억이 나나, Y의 대답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그날 광화문의 가로등 불빛이 너무 눈 부셨고,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움직이는 입술이, 나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이 너무 예뻐서였을 것이다.


언젠가처럼 한 호흡을 쉰 그녀는 당시를 추억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도 한때 나를 좋아했었고, 고백해주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노라고.


그녀의 대답에 이제 와 설레지도, 서로 홀로된 마당에 이제라도 한번… 같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내 마음은 한없이 후련했으며, 이제서야 그녀를 마음의 앙금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세상의 수많은 젊은 남녀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14.

생각나 찾아본 Y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아이들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겨우 한 장 찾은 본인 사진에는 아직은 많은 나이라 할 수 없지만, 담담하게 나이 들어가는 평범한 아낙이 있었다.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매력적이지도 않다.

아직도 젊고, 게다가 동안인 나의 아내와는 더더욱 비교되었다.


타이밍이 어긋나 시작도 해보지 못한 청춘이 있는 반면,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이어지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도 있는 법이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소중한 인연이었나보다.



15.

이 첫사랑 이야기는 처음부터 해피앤딩이었다.


지금 사랑하는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에 나의 첫사랑은 성공이든 실패든 해피앤딩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비록 나 혼자 아팠던 첫사랑이었지만, 당시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고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젊음의 기억.


Y도 가끔은 그때를 추억하며 나를 아름답게 기억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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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진않습니다
19/11/08 23:47
수정 아이콘
글잘쓰시네요 좋네요 잘읽었습니다.
19/11/09 01:5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제가 지금 보드카 대략 200cl를 마신 김에 저도 써볼까 했지만,
창작에는 재료가 필요하고 저에게는 바로 그 재료가...?!?!
19/11/09 10:40
수정 아이콘
첫사랑이 마나님이 되는 엔딩이 있습니다. 와이프의 20대초반에 같이한게 참 행운입니다.
둘이 중간에 3년간 헤어져서 따로 몇번정도 연애한건 서로 묻어두기로 하고요. 그때가 리즈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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