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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1/05 12:35:35
Name 이순
Subject 예비고사의 추억(1)



1,
어김없이 수능의 계절은 돌아왔건만, 요즘은 예전의 법석에 비해 조용한 편이다.

우리집 애들이 수능을 치르던 15~20년 전만해도, 이용의 `10월의 마지막 밤을.... ` 노래가 들려온다 싶으면,
수능 특수를 노리는 상품들도 기다렸다는 듯..일제히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그러면 친척 지인들 중 수험생이 있는 두어집에는 한동안 전화질을 알아서 삼가해줘야 했다.

그야말로 수능은, 인륜지대사 중 가장 비중있는 통과의례였다.
 

당시 우리 친구들 동창모임 대화는 거의 ..등급이니 논술이니 내신이니 표준변환점수이니...하는 용어들로 채워졌었다.
정시가 절대적이었던 그 때에는 그 날 수능의 결과에 인생이 걸려있다시피 했기에,
수험생 부모 학교 언론..심지어 친척 지인들까지  지대한 관심들을 쏟았었다.



 
2,
그러면...  45년도 더 지난 나의 그 날, 그 예비고사일은, 어땠을까....

이미 아득한 세월 기억 저 편, 아스라이 사라진 기억이어야 하건만,
어쩌면 결혼식 날보다 더 중요하고 긴장되고 가슴 뛰던 날이었기에,
스러질래야 스러질 수 없는 기억 몇 줌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언제나 꺼내볼 수 있게 말이다.

72년 11월 말 언제쯤이었던가....  그 해 예비고사 예비 소집일.

매년 그래왔듯.. 그 날도 바람끝은 마녀의 콧심처럼 차갑고 매서웠다.
고사장이 있는 도내 가장 큰 도시, D시까지 가야했기에
우리는 새벽부터 설쳐서 이른 아침,  작은 가방 하나씩을 둘러메고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그리고 운동장에 정렬하여 덜덜 떨면서
20분 째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고 있어야 했다.
 
이보슈~~  교장선생님,
결론은 결국 M여고를 이겨야 한다.. 이거 아잉교?
그리 길게 말씀 안 하셔도 없는 쉴력이나마 ..참지름 짜대끼 쥐어짤 낌니더.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 말씀입니더.
교장슨상님은 그저 교장실 난로가에 앉아 졸고 계시든가,  겨울마녀의 젖꼭지나 빠시든가, 알아서 하십시요.
 
교장선생님의 자애로운(?) 눈길을 등 뒤로 받으며
교문을 나설 때만 해도 ..우리는,
앞으로 이틀간 펼쳐질 그 고난(?)에 대해 눈꼽 반만치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곧 시작된 학교에서 역까지.. 5㎞가 넘는 거리 행군.
새벽밥 서너 숟갈로 속을 채운 우리에게
바람은 자비심 없이 불어대었다.
그러나 ..변변한 코트는 물론이고 따순 장갑도 없이..
보온메리 빨간내복 한 벌에 `보온`을 맡긴 채..
걸음을 옮기는 우리를 떨게 한 것은,
정작 추위가 아니라 후회막심을 동반한 불안과 걱정이었다.
 
N강 다리를 지날 때
강 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사정없이 휘둘렸지만
잠시 저멀리 명현루의 의연한 모습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은 건,  나 뿐이었을까...
 
 
 
역 앞마당에 도착하니.. 이미 남자고등학교 녀석들이 진을 치고 앉아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잠시 술렁이는 듯했으나 ..곧 잠잠해졌다.
일별하니.. 녀석들은 까까머리 탓인지 <쉰들러 리스트>의 유태인들같이 음울해 보였다.
짜슥들 하고는...  어지간히 쫄아 있구먼. 

평소 선망의 대상인 우리학교 여학생들이 이리 한꺼번에 닥쳤는데도 동요가 없다니..
이리 집단 상봉하기는, 작년 도민 체전 때 공설운동장에서 이후 처음 아이가.
때가 때인지라 ..우리의 청순하심으로 너희의 사악함을 단체로 순화시킬 수 없어서
안타깝니 우짜니 그런 싱거운 생각마저도 들지 않았다.
 
 
 
3,
기차는 느리게 움직였다.
아무도 K고 녀석들이 어느 칸에 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로소 가방을 풀어 요약 노트나 문제집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들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질문에 답해 주시느라 바빴다.
평소엔 질문 좀 하라고 애원을 해도 안 하더니... 막판에 비로소 수업다운 수업을 해 보는군...싶으셨을 것이다. 크크
 
차창 밖 풍경은 무심히 흘러갔고
기차는 우리를 D역에 쏟아놓고 무심히 떠나갔다.
 
 
또 다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낯선 도시에서의 행군이었다.
햇살은 퍼졌다해도 바람은 여전히 차가운데
우리는 D역에서 고사장인 M여고까지.. 일부 학생들은 S여고까지, 걸어야만 했다.
겨우 녹은 몸을 다시 얼리며  또 다시 십리 행군길로 들어섰다.
선생님들은 예비소집시간에 늦을까봐 호각을 부르며 길을 재촉하였다.
 
명색이 내일 과거시험을 치를 수험생들 아닌가.
이러다가 시험도 치기 전에 진이 다 빠져 버리겠다. 싶었다.
수험생이 많지 않은 시절이니
도내 수험생 모두를 한 도시에 모아놓고 시험을 치르게 하면,
주관하는 문교부 이하 교육청이야 예산상 행정상 절차상 ..무척 편리 효율 합리적이겠지만서도,
타지역 학생들이 감수해야 하는 불공평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불공정으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


D시에서 가까운 시나 군에서 오는 수험생들은 뭐 그렇다치고,
저 도내 북부지역 수험생들은  2박을 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당시는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보통 도시 간의 이동도 서너 시간이 기본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군 소재지 읍에서 완행버스 타고 예비고사 치러 오는 수험생들은 어떠했을지 ...
조선시대 과거시험 치러 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이다.
 
 
길을 모르고 걷는 것은 더 힘들었다.
예비소집시간이 촉박한지 선생님들은 고함까지 치며 빨리 걸어라 재촉하셨다.
특히 앞 쪽, 다리 짧은 우리 꼬맹이들은 ..아흑.. 거의 뛰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M여고 운동장엔, 모랫바람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우리학교 교정에 비해, 그냥 분위기 없이 평범했다.
명문여고란 타이틀은 고스톱 쳐서 땄나벼~~
교장선생님도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썰다가 오신 듯한 포스를 풍기며,
주절주절 별 도움 안 되는 말씀들을 늘어놓았다.
어쨌거나 수험표대로 고사장을 확인하고, 화장실 위치도 알아논 뒤 우리는 다시 운동장에 모였다.

 

4,
너무 지쳐서 말을 잃은 우리가 끌려간 곳은, 그 간판도 잊혀지지 않는,  <유선여관>이었다.
M여고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관이라 후져도 선택했나 보다.

이상의 <날개>, 그 공간적 배경인 유곽이 바로---- 여기다 !!! 싶은 곳이었다.
방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손쉽게 보고 선택할 수 있게끔 하려는 듯.. 일렬로 쭉~ 붙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자연스럽게 포주로 변신하여 번호대로 방을 배정해 주셨다. 크크
 
못 생기고 발육 늦은 우리 꼬맹이들은,
다시 말해 남자들에게 간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우리 루저들은( 45번~끝번 ),
역시나.. 저 뒤쪽 화장실 겸 세면대 옆 구석방으로 몰아넣어졌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방은 지글지글 따뜻했다.
저녁 먹기 전까지 휴식시간이라길래
우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를 받을 필요도 없겠다.)
다들 가방을 내뱅개치고 동시에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오늘 아침..
가족들의 격려와 걱정을 뒤로 하고
대문을 나설 때의 그 컨디션과 에너지는 간 곳 없었다.
다리는 천근같이 무겁고 머리는 묵지근했다.
이 어둡고 좁은 방에 누워있는 자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 꼬맹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노골노골하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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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5 12:41
수정 아이콘
아이고 행님
소독용 에탄올
19/11/05 13:08
수정 아이콘
이순이 그 이순이었군요......
고등어자반
19/11/05 13:15
수정 아이콘
아이고, 어르신.
사업드래군
19/11/05 14:06
수정 아이콘
저도 아잰데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이야기였군요... 흐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19/11/05 14:48
수정 아이콘
와 이런글은 무슨 반전이나 사건이 없어도 그냥 재밌네요..
은솔율
19/11/05 15:19
수정 아이콘
제가 태어난 해에 예비고사를..누님이신가 어머님이신가..
及時雨
19/11/05 15:32
수정 아이콘
이런 좋은 글로만 뵙고 싶네요 늘.
날아라 코딱지
19/11/05 16:13
수정 아이콘
1972년이면 제경우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큰 임팩트는
그해 여름 남한강이 불어넘치고 서울이 잠기는 대홍수가 발생했죠
이때 한강 지류중 판자집이 하천변으로 다닥다닥 그야말로 성냥갑마냥
붙여져 지어진 청계천 그지류 정릉천까지 조밀했는데
이집들이 싹다 말그대로 싸그리다 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렸다는 겁니다
한때 홍수나기 반년전 답십리쪽으로 이사갔다 다시 정릉천 용두동으로
오자마자 일어난 이홍수로 한때 제가살던 그판자집이 말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진 모습에 얼이 빠져서 초토화된 정릉천변 둑방길을 왔다갔다 했었던
주익균
19/11/05 18:52
수정 아이콘
우리 엄마 초딩 때네요. 크크.
19/11/05 19:43
수정 아이콘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요즘들어 이 정부에 대한 걱정과 분노가 많아지다 보니, 하고 싶은 말도 참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행님 어르신 어머님 우리 엄마 초딩....이라고들 하시는 댓글을 보니, 문득 깨닫게 되는군요.
이 나이에 이런 공간에 글을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를...크크.
이 글 다음편만 쓰도록 해야겠지요.
及時雨
19/11/05 19:46
수정 아이콘
오히려 더 써주셔야죠.
여기서 이런 이야기 들을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크크
이순님이 평안하게 써주시는 글은 늘 반갑습니다.
좌종당
19/11/05 20:29
수정 아이콘
오오 다음편을 보고 싶군요
19/11/06 00:18
수정 아이콘
글 자주 써주세요.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19/11/06 00:46
수정 아이콘
정치 성향이야 성향이고, 글은 글이지 않은지요.
글맛이 너무 좋아서 항상 새 글을 기대하는 애독자입니다. 흐흐흐.

부디, 하실 말씀은 하시되, 글은 남겨주시길 삼가 바라옵나이다.

- 근 20여년의 전직 민주당 지지자로부터
도들도들
19/11/06 10:4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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