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9/09 20:52:37
Name FLUXUX
Subject [일반] 패션고자이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패션리더? (수정됨)
 초등학교시절, 저는 옷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랑죠가 그려진 반짝반짝한 신발을 갖고 싶어 엄마를 졸랐던 게 유일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다 옷에의 욕망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중학교 때 폭발했고, 저는 친구들과 안양지하상가에서 초면에 살갑게 어깨에 팔을 두르는 2인 1조 형님들을 피해 다니며 쇼핑을 했습니다. 그 때에도 친구들과 저의 옷을 고르는 기준은 처참했어요. 슬램덩크 캐릭터 티셔츠를 서로 사고 싶지만 똑같은 옷 사기는 싫어 가위바위보를 하고, 한창 힙합이 유행할 때라 로카웨어나 DC, 팀버랜드, 에코같은 브랜드들의 카피들을 너도나도 샀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힙합은 물 건너갔지만 여전히 쇼핑은 안양지하상가였습니다. 엄마가 사오시는 옷들은 그 당시 표현으로 범생이같았다고 할까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유별난 친구를 한명 발견했습니다. 친하지 않으면 사복 입은 모습 보기 힘든 게 고등학교이지만 세 가지 케이스에서 자신의 패션을 뽐낼 수 있었습니다. 체육시간, 소풍(수학여행), 겨울. 체육시간에는 체육복을 빨거나 안 가져왔다고 변명하고 티셔츠를 뽐낼 수 있었고, 소풍은 고등학교의 패션위크였고요. 겨울에는 어떤 아우터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느냐가 관심이었죠. 그때는 힙합브랜드의 두꺼운 후리스같은 점퍼가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별난 친구는 소풍에 카라셔츠를 이중으로 레이어드해서 입고 오는 당시로서는 기행을 뽐내었고, 겨울에는 아메리칸 이글의 양털자켓을 입었습니다. 양털자켓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이란... 뭔가 어른같은 그 느낌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의 패션은 안양지하상가의 한도 내에서만 존재했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전, 친구들과 쇼핑을 가서 지하상가를 벗어나 리바이스 생지데님자켓과 엔지니어드 진, 카고바지, 그리고 그 당시의 최고의 유행템인 비니모자색깔세트를 샀습니다. 이 때 알았어야 하는 것은, 옷은 가장 예쁜 한 벌을 사는 것보다 무난한 5일치 옷을 사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두 살 연상의 동아리 선배와 사귀게 되는데 그 누나가 저를 간택한 이유는 그 옷을 입는 센스가 1학년 애송이같지 않았다 였습니다. 이 발언은 저의 패션을 10년간 정체되게 만든 주범입니다. 저는 건방지게도 스스로의 안목에 콧대가 높아졌고 가장 예쁜 옷 하나를 내가 가진 전부를 쏟아붓더라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예쁜 옷을 하나 사고 가지고 있는 옷들을 그 예쁜 옷에 맞춰 사다보니 그 옷을 안 입는 날은 패션고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제가 색약이 있어 색의 오묘함을 맞추지 못하다 보니 초록색 니트와 주황색 바지를 입었다가 당근같다며 당근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애를 할 때는 제 꼴을 못 버틴 여자친구들이 옷을 골라주어 조금 나아지는 때가 생겼습니다.
 

그러다 취직을 하게 되었고, 정장을 입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속성 정장 공부를 하고 나니 정장입는 공식이 정말 쉬웠습니다. 기본템 최소 두 개씩만 있으면. 차콜&네이비 수트, 블랙&브라운 구두&벨트만 있으면 셔츠와 타이의 베리에이션만으로도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었죠. 취직 초반 월급을 수트에 투자하고 어느 정도 수트가 완성되고 나서는 셔츠와 타이에 투자를 하니 그 재미가 엄청났습니다. 색상도 복잡한 색은 많이 사용되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게 취직하고 2년 뒤 저는 FLUXUX씨 정말 옷 잘입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 짜릿함이란.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던가요. 저는 얼마 전 캐주얼한 옷을 입는 회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장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고, 제 캐주얼한 옷들은 전 직장 시절 나이와 회식으로 찐 배를 가리기 위한 중학교 때 힙합룩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젠 양털자켓을 입던 친구를 보고 슥 지나갈만큼 패션에의 욕심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은 운동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캐주얼의 복잡한 공식들을 이해하러 가야겠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패션생활 되시길!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천호우성백영호
19/09/09 20:54
수정 아이콘
너무나...눈이 아픕니다...
19/09/09 20:56
수정 아이콘
크흡.... 작.전.성.공.이군요.
19/09/09 21:09
수정 아이콘
딱히 패셔니스타는 아니었지만 결혼하고 애가 나오니 패션에 까지 힘쓸 여력이 사라지네요ㅠ
19/09/09 21:14
수정 아이콘
패션이야 결국 자기만족일 뿐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행복하시죠?
Zoya Yaschenko
19/09/09 21:57
수정 아이콘
여자친구들이 밑줄 쫙
스테비아
19/09/09 22:06
수정 아이콘
안되겠소. 쏩시다!
19/09/09 23:06
수정 아이콘
사.... 삼년넘게 솔로에요.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카롱카롱
19/09/10 00:23
수정 아이콘
녀자친구들이 옷을 골라주기도 하는군요...
티모대위
19/09/10 14:57
수정 아이콘
제 여친도 참다 참다 못해서 옷 골라주더라고요.. 언제부턴가 제가 새로 사는 모든 옷은 여친님의 손을 거칩니다...
답이머얌
19/09/10 07:41
수정 아이콘
그럼 다시 안양지하상가로....
Albert Camus
19/09/10 08:10
수정 아이콘
안양으로 갑시다!
처음과마지막
19/09/10 12:02
수정 아이콘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매 같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804 [일반] 제17호 태풍 타파가 북상중입니다. [35] 아유12228 19/09/21 12228 1
82803 [일반] 안심전환대출 첫 주 11.8만건이 신청되었습니다. [67] 유랑14489 19/09/21 14489 0
82802 [일반] 가족 [4] swear5453 19/09/20 5453 2
82800 [일반] 뒷북이지만 추석때 본 추석 개봉 영화들 [23] 청순래퍼혜니9059 19/09/20 9059 0
82799 [일반] [10] 고향 [8] 아이유_밤편지6235 19/09/20 6235 15
82797 [일반] 이상한 예고편 떄문에 망한 최고의 히어로 영화 [30] 박진호15508 19/09/20 15508 16
82796 [일반] [스포주의] AD ASTRA 보고왔습니다. [18] 중년의 럴커8594 19/09/20 8594 1
82795 [정치] 갤럽 여론조사 '대통령 지지도 취임 후 최저치' [211] 고라파덕19851 19/09/20 19851 0
82794 [일반]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14] 글곰8113 19/09/20 8113 29
82793 [정치] 조국이 위법하지 않으면 사퇴하지 않아도 되는가 [189] 물멱16521 19/09/20 16521 0
82792 [일반] 통계로 본 일본 내 한국 관광객의 특성 [44] sakura16263 19/09/20 16263 5
82790 [일반] 영화 [예스터데이]를 봤습니다. (스포있습니다!) [13] chamchI10183 19/09/20 10183 1
82789 [일반]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 조언이 필요하네요. [28] 김유라9528 19/09/20 9528 1
82788 [일반] V50 듀얼 디스플레이를 폴더블폰(?) 처럼 사용해보자 [21] 총앤뀨9924 19/09/19 9924 2
82787 [일반] 서울 [7] 밥오멍퉁이8840 19/09/19 8840 36
82784 [일반]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을 찾은 DNA감정 [33] 박진호13646 19/09/19 13646 41
82783 [일반] 오늘 정말 무서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60] 용자마스터15434 19/09/19 15434 19
82782 [정치] 조국 딸 표창장에 대한 소소한 의견 [100] nuki1215540 19/09/19 15540 2
82781 [일반] 52시간제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68] 러브어clock9989 19/09/19 9989 1
82779 [일반] 결혼 후기 겸, 댓글 추첨 결과입니다 [33] 센터내꼬야8873 19/09/19 8873 2
82778 [일반] 학종 vs 수시 vs 정시 [90] 주워니긔8056 19/09/19 8056 13
82777 [일반] 학종에 대한 소심한 응원글 [77] 하아위8670 19/09/19 8670 15
82776 [정치] 아마존, 알렉사를 통해 선거 정보 전달 [4] 타카이8101 19/09/19 8101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