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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5 08:40
조비는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 (권력 쟁탈전 제외) 그다지 유능하다고 보기 힘든 군주였는데, 사마의 드라마에서는 엄청 멋진 친구로 나오더군요.
19/08/05 09:33
1) 촉오대전의 승패를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촉한 내부의 전쟁에 대한 반대 의견을 보면, 적어도 승리할 가망이 큰 전쟁으로 예상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700리 진영에 대한 조비의 평가를 보면, 이미 촉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결론은, 유비가 혼자 빡쳐서 패배할 전쟁에 국력을 대폭 소모한 셈이 되는데... 2)촉오대전의 승패 예상은 이릉대전 이전까진 엄대엄, 적어도 3:7 이상으로 벌어지진 않았다? 이러면 적어도 촉한 입장에서는 전쟁을 일으킨게 100% 불합리한 결정은 아니었던게 됩니다. 덧붙여, 조위가 이릉대전 발발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도 설명이 되고요. 손오가 이길 것이 확실시되면 유엽의 말처럼 오를 치는게 맞지만, 촉한이 이긴다고 가정하면 되려 3국지가 조위 vs 촉한의 2국지가 될 수 있겠죠. 손오에 비해 촉한은 조위를 무너뜨리겠다는 의지가 강한 국가이니 이것은 조위의 입방에서 부담스러운 전개가 될 것 같네요. 결국 조비는 손오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19/08/05 09:38
손오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해도, 칭신을 하고도 공격을 당했다하면 도로 촉한에 붙는 선택을 할 수 있고요.
이 때는, 형주를 회복해 기세등등한 촉한 + 영역은 줄어들지만 강동에서의 영향력은 확고한 손오를 맞아, 다시 2:1 전쟁 구도로 돌아가게 되겠죠.
19/08/05 09:34
개인적인 생각에 촉한 입장에서 이릉대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현실에서 일어난 대패가 아니라 위와 촉한이 양면으로 공격하여 손씨 세력이 소멸하는 거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조비의 이 선택은 이해하기 힘든 실책이었죠.
19/08/05 10:14
저 이릉대전이 한중공방전 ㅡ 형주공방전 ㅡ 이릉대전 순서로 일어난걸로 아는데, 형주 공방전 ㅡ 관우, 조조 죽음 ㅡ 이릉대전 이런식으로 일어난걸로 알고 있어서, 자세한건 글곰님이 적어주시겠지만 제가 알기론 이릉대전 전에 조조는 위나라의 여론을 진압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크게 다른곳에 신경을 쓸수가 없었던걸로 압니다. 그렇기때문에 조운이 선주 (유비)에게 오나라를 칠게 아니라 조조가 없어져서 흔들리는 위나라를 쳐야한다고 했던거구요.
19/08/05 10:23
그렇다고 보기엔 222년 8월에 이릉대전이 종결되고 조비가 조휴는 동구로, 서황 등은 강릉으로, 조인은 유수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여 조비의 남정이 시작된 것이 222년 9월입니다. 이렇게까지 시차가 안 난다는 건 거의 이릉대전이 종결되자마자 공격했다는 얘기가 되며 이릉대전 도중에 충분히 남정을 할 역량이 있었다는 의미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이릉대전을 포함한 이 때의 촉한와 손오의 전쟁은 1~2달 이어진 전투가 아니라 221년 7월부터 이어져 1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며 이 시기동안 조비가 남정을 할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19/08/05 11:09
이제까지 조조의 죽음의 영향때문에 남정을 못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아니라고 봐야하는 것같기도 하네요. 손제리의 정치력이 엄청나서 굴종할것처럼 보여서 때를 놓쳤는지도 모르겠네요.
19/08/05 11:30
조비가 한건 그냥 평범한 이적제적이죠.
복권세력이 밖에서 이미 세력화 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오를 이용해서 복권세력을 무마시킬 기회로 삼은거죠. 조비는 선양을 처음 성공시킨 인물인데 이전의 선양인 자지의 난이나 왕망의 난 모두 복권파에 의해 실패했었던 것도 사실이고 조비가 복권세력의 큰 도전없이 무사히 꿀꺽한것도 사실이라.
19/08/05 12:48
대체로 이런 정무적인 판단이 원인이었던 걸로 많이 보는 거 같습니다. 그 결과 삼국통일은 반세기 이상 지연되었고 민중들은 그만큼 더 고통받았으며 통일 제국은 허약해졌고... 그렇지요. 조비의 삽질로 어그러진 게 참 많다 싶습니다. 뭐 이로 인한 중원의 혼란 덕분에 고구려가 성장한 거지만요.
19/08/05 13:24
조비의 삽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조비는 선양받고 복권파에게 타격입힌걸로 충분히 할일 한거란 이야기한거에요.
처음으로 선양을 성공시킨 남자인데요, 그리고 그게 아니었다면 통일이 앞당겨졌을거란것도 모를일입니다.
19/08/05 13:41
손권이 스스로 낮춰서 칭신까지 했는데 칠 명분이 없죠. 심지어 자기 아버지 대에 했던 것처럼 [한]에 칭신한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직접 칭신한 것이니
아버지 대에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셈이었으니까요. 역사는 게임이 아니잖습니까.
19/08/05 16:54
앞서서 별도로 진군한 4만명에 대한 얘기를 했었습니다만 위서 문제기 위서 별도로(支黨) 4만명 주석은 문제기 222년 정월 경오일 바로 다음에 붙고 있습니다. 위서에는 계해일로 써있는데 날짜계산을 하니 2월달로 나온것이고 마침 유비가 자귀에서 효정으로 진군한 것도 222년 2월달이니 아귀가 들어 맞는다는 거죠. 만약 221년 가을의 일이었다면 (221년) 가을 8월 손권이 사자를 파견하여 표장(表章)을 상주하고 아울러 우금(于禁) 등을 보내어 돌아오게 했다쯤에 붙는게 시간순서대로 기록을 배열하는 삼국지의 필법에 따라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
또 선주전, 황권전에 보면 유비가 황권이 진북장군으로 북쪽에 있던 여러제군들을 감독하게 하고 자신은 강남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으로보아 이릉북쪽에 있는 병력들이 유비본대 4만외에 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황권 휘하 항복한 장수들이 318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적은수는 아니었을 거고요.
19/08/05 17:47
이릉대전은 주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않은 육손과 유비가 각각 웃고 울은건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 육손은 훗날 후계자관련문제로 손권과 대립과정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역사책을 읽어본 결과 나이가 들어 황제들 판단이 흐려지는건 다 똑같은데 유비도 손권도 그흐름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50에도 늦진 않았지요. 손권은 후계자를 빨리알아보고 넘겨주어야 했다고 봅니다. 유비는.. 성격상 황제감은 아닌거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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