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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6/22 12:02:50
Name 유쾌한보살
Subject [일반] 짤막한 편지, 척독.




어제 한 나절..  칠순을 맞는 형부께 처음으로 편지를 써보고자 끙끙댔지만,  메모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형부를 생각하면....안구에 눈물이 범람...  까지는 아니어도, 고마움이 가슴을 적신다.
그럼에도 마음이 담긴 편지 한 통 쓰기가.... 참말로 진도 안 나가서 애먹었다.
결국...  여섯 문장으로 끝냈다.

고마움은 고마움이고, 평소 자주 만나거나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쓸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평소 컨셉대로 ` 씨산이 뻘글` 을 휘갈겨 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을 쓰지 않는 정직함을 내세우며 짧게 썼다.

어쩌면 형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원하실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칠순 선물로 ...청순컨셉의 S라인 여인을 생물 포장하여 보내드리오니... 알아서 하시옵길......



점점 편지(메일) 쓰기가 힘들어진다.
그 대상이 누구라도 말이다.
점점 긴 글을 읽기 싫어라 하고, 또한 긴 문장을 쓰기 어려워진다.
즐겨 이용하는 건,  오로지 문자와 카톡 뿐.
문자와 카톡은 그저 대화의 ` 문자화 ` 일 뿐,
휘발성과 일회성, 그리고 그 가벼움과 용이함에 있어서는 ` 말 `과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편지 쓴 김에..  옛사람들이 주고 받은, 척독 몇 편을 읽었다.

척독(尺牘)은 지금으로 치면 엽서쯤에 해당하는 짤막한 편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간이 없어서, 쓸 말이 간단해서, 짧게 쓴 것이 아니라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 할 말을 행간에 숨기기,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를 감추는 등,

작품성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기 위해 짧게 쓴 편지이다.

오히려 긴 편지(書)를 쓰는 것 이상으로 애를 쓴다.

그래서 산문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진채(陳蔡)땅에서 곤액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망령되이 누추한 골목에서 무슨 일로 즐거워하느냐고 묻던 일에 견주어본다네.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줌이 어떠하실까?

                                                                           < 기초정 寄楚亭 >



연암이 박제가에게 보낸 짧은 편지다.

한마디로 돈 좀 꿔달라는 내용이다.


연암의 편지에는 유독 돈 꿔달라는 편지가 많다.

개선될 기미가 전혀 없는 절대 궁핍이 읽는 이를 민망하게 한다.

그런데 막상 돈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언뜻 보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진채땅에서 곤액이 심하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진채땅에서 7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고생한 일이 있다.

그러니 자기가 벌써 여러 날을 굶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벼슬하지 않아 무릎 굽힐 일 없음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렇지만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돈 좀 꿔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술까지 가득 담아 보내란다. 크크크..





그러면 박제가가 연암에게 보낸 답장을 읽어 보자.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 됨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방(孔方) 2백을 편지 전하는 하인 편에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양주(楊州)의 학鶴은 없는 법이지요.



그 역시 돈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공방은  구멍孔이 네모나다方는 뜻으로 동전, 곧 돈을 가리킨다.

양주학이란 말에는 고사가 있는데,

-허리에 10만관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하늘을 날아

양주로 가서 자사 (평양감사쯤 될까)가 되고 싶다- 는 내용으로,

이것 저것 좋은 것을 다 누리고자 할 때 쓰는 말이다.



세상에 양주학은 없다고 한 것은 밥과 술을 다는 못 보낸다는 뜻의 말이다.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빈 속에 술을 못 마시게 하려는 배려이지 싶다.

꿔달라는 사람이나 꿔주는 사람이나 피차 구김살이 없다.

평소 정이 깊은 사이가 아니면 주고받을 수 있는 편지가 아님을 느낀다.





궁상스런 뜻은 행간에 숨기며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돌려서 말하고,
길게 설명해야 할 것을 한두 마디로 찔러서 잘라 말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게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리고,
그리고 특유의 톡 쏘는 풍자와 해학으로 비꼬며......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척독을 읽는 즐거움이자 괴로움이다.

연암의 문집 속에는 이런 짤막한 편지가 50여 통 실려 있다.
이런 쪼가리 글들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오늘 아침, 벗에게 척독 한 장 날려 보내고 싶은 건, 마음 뿐이고 ....
나는 또 휴대폰 문자나 날려 주신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을 생략하도록 만들고,

붙들고 있을 수록 오히려 사람 사이를 멀게 하고,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그리고 오만 가지 조화를 부려 사람을 옭아매어버리는,

폰이라는 그 물겐을 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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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2 12:2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9/06/22 17:01
수정 아이콘
가끔 친구와 우리만의 언어로 얘기할때

기분좋은 그런 느낌같네요
브리니
19/06/22 18:32
수정 아이콘
학을 타고 양주로 감.

有客相從各言所志 或願爲楊州刺史 或願多眥材 或願騎鶴上昇 其一人曰 腰纏十萬貫 騎鶴上楊州 欲兼三者(유객상종각언소지 혹원위양주자사 혹원다자재 혹원기학상승 기일인왈 요전십만관 기학상양주 욕겸삼자 ; 몇 사람이 소원을 말하는데, 양주자사가 되기 바라거나 재물이 많기를 바라거나 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기를 원하거나 했는데, 다른 한 사람이 허리에 10만 관 돈을 두르고 학을 타서 양주로 갔으면 하니, 세 사람의 바람을 모두 가지고자 함이었다.)<사문유취事文類聚 후집後集>
양주는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어서 ‘春風十里楊州路(춘풍십리양주로 ; 봄바람 십리 양주길이여!)’란 싯귀까지 있음.
若對此君仍大嚼 世間那有楊州鶴(약대차군잉대작 세간나유양주학 ; 만약 대나무를 대할 수 있고 고기도 먹을 수 있다면, 세간에 어찌 양주학 얘기가 있겠는가?)<소식蘇軾 녹균헌綠筠軒>
一盃一盃事有緣 且莫論量鶴與錢(일배일배사유연 차막논량학여전 ; 술 한 잔 한 잔이 연분이거니, 학과 돈을 꾀하지 말라.)<권한공權漢功 정면재석상주필鄭勉齋席上走筆>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학 [楊州鶴]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
궁금해서 네이버 검색하니 이런 고사가 있네요. 옛날에 쓰이던 관용어라고 해야하나. 학을 탄다는 게 지식,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걸 의미하나보군요..명예욕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양주로 가는 것은 권력, 10만냥의 돈은 재물, 그리고 학을 타고 날아오르는 것은 명예, 학문적 성취 정도로..
기학상양주騎鶴上楊州 학을 타고 양주로 가다.
유쾌한보살
19/06/23 06:47
수정 아이콘
(수정됨) `양주의 학`이 일반적인 고사는 아니지요. 그래서 찾아보셨군요. 크크
글과 대화에서 옛사람들의 고사 인용은, 거의 일상적이었죠.
독서 없이는 대화가 가능치 않을 정도였습니다.
일단 무슨 말인지 알아묵지를 못 했으니까요.

만금을 허리에 찬 채 학을 타고, 양주로 가는 것은 불가능.
돈과 명예 혹은 권력을 함께 가질 수는 없는 법.
다시 말해 이것 저것 다 누릴 수 없는 것이 세상이치.

그것처럼... 자네(연암 박지원)가 돈 꿔달라는 주제에, 호리병을 보내어 술까지 보내라는 것은, 무리.
그래서 나(박제가)는 돈만 보내겠네. (실은 빈 속에 술부터 마실까봐 안 보냄)
smilererer
19/06/23 18:3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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