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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4/14 23:44:15
Name matthew
Subject [일반]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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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 방은 남의 나라.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쉽게 씌어진 시 中

(편의상 반말로 쓰겠습니다. 제대로 된 감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막 쓴 감정에 가까워서 죄송합니다)


학창 시절에 좋아하지 않던 윤동주였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문학깨나 읽었다는 축에 속하는
제도와 불합리에 눌려 지내지만 머리는 깨어있다고 믿는
고2병이 단단히 든 학생이었고
그런 나에게 윤동주의 시는 왠지 좀 연약하고, 슬프고, 소위 맥아리가 없게 들렸다

통탄하는 김수영, 덤덤한 백석, 아니면 대놓고 우울하고 아름다운 기형도도 아니고
별이나 세며 거울이나 들여다본다는
너무 쉽게 씌여진 듯한 윤동주의 시가 국민 시의 반열에 든다는 것은 그땐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부끄럼의 정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시인이 무얼 그렇게 부끄럽다고 하는 건지
성질머리가 체제 순응적이지 못했던 나는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마음에 안 들면 부수고 박차고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뭔가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모두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나 자신은 바꿀 수 있지 않나
아마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윤동주를 바라보았고
수능과 함께 윤동주 시의 기억도 잊혀졌다

그가 절명한 나이를 지나고도 몇 해를 더 살았고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상당히 객쩍게 느껴지는 즈음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허리 펴고 당당하게 생활하다
집에 들어와서 불을 켜고 조용히
들어와서 생각한다 이렇게 조그마하고 별거 없는 인생이
오직 한 사람, 나 한 사람에게라도 후회없이 떳떳하게 살기란 이렇게도 어렵구나

책을 읽고 그 안에서 포효하며 온 산 동네를 돌아 쏘다니던
그 때의 나는 사라지고 나도 인제는
인생은 살기 이리도 어려운데 푸념은 왜 이다지도 쉽게 맺히는가
부끄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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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충달
19/04/15 00:09
수정 아이콘
저도 고삐리 때는 윤동주의 시에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먹을 수록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이토록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윤동주는 아름답습니다. 따라가지 못 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유열빠
19/04/15 13:24
수정 아이콘
저랑 같으시네요.
수능때도 시문제는 다 틀렸고, 너무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좋네요..
아재 감성.
알료샤
19/04/15 00:13
수정 아이콘
물론 저도 백석의 '노루' '모닥불' 같은 시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저는 참회록에서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로 줄이자."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합니다. 제 생각에 윤동주의 저 구절은 참 혼잣말로라도 입으로 내뱉기가 두려운 구절 같습니다.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나, 하덕규의 가시나무 같은 것에서 느낍니다.
나와 같다면
19/04/15 00:14
수정 아이콘
저 스스로 제가 진짜 별거 아닌 인간이라고 느끼도록 만드는데 꽤나 기여(!)한 시입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이 갖고 있는 클래스와 품격에 비해 저의 부끄러움은 진짜 너무 수준 낮아서 입에도 담기 싫음.
드아아
19/04/15 00:55
수정 아이콘
음..감동이라. 솔직히 시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적이 없어 뭐라 말하지 못하겠군요.

그저 윤동주의 시는 읽으면서 어떤감정으로 이래 썼나 싶을때가 많아 안타까울뿐..
고양이맛다시다
19/04/15 05:45
수정 아이콘
저는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좋아합니다.
부끄러움이 절절하게 구체적으로 표현된거 같아서요.
19/04/15 12:59
수정 아이콘
언급하신 시인들 다 좋아하는 시인들이네요. 기형도 시의 처절함, 백석 시의 기교는 없지만, 윤동주 시에는 진실성이 있어서 가슴을 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아직까지는 기형도와 백석 시가 더 좋네요..
19/04/15 17:49
수정 아이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쉽게 씌어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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