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12/09 19:22:52
Name 와!
Subject [일반] 알았으니까, 링으로 올라오세요. - 리마스터


어릴적, 우리집의 대장은 나에게 어떤 나쁜것도 주지 않았다. 우리집엔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없었고, 빡빡한 가족내 규칙도 없었다. 다른 또래들과 다르게 내가 하고 싶은것이면, 바운더리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자동차 앞에 있던 성인 유머집을 5살이었던 뭣도 모르고 꺼내 읽어도, 대장은 아무리 봐도 넌 무슨뜻일지 모를거라며 웃기만 했다. 그래서 질릴때까지, 혹은 스스로 하면 안된다는것을 깨닫기 전까지 이것저것 해대며 살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좋은것은 항상 이면의 고통을 동반한다. 대장은 나이에 비해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준 대신, 본인의 책임에서도 한껏 자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나쁜것을 주지 않았지만 좋은것을 주는데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불규칙적으로 너무나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인해 우리집은 언제나 쪼들렸고, 대장이 해야 할 역할은 자연스레 어머니와 나의 것이 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돈 벌고 여자는 살림하는게 일반적이었던 당시라 해도 5~6살짜리 코찔찔이가 돈을 벌어 올 수는 없었기에, 4인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일은 엄마가 해야 할 몫이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할머니가 도와주시기도 하고, 이모 고모들이 도와주기도 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동생과 함께 어른없이 사는 법을 너무 이른 나이에 배워야만 했으며, 그 과정은 한마디로 말해 투쟁이었다.



인생에서 싸움과 경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한번 썼듯이 학창 시절 내내 딱 두번을 제외하곤 타인과 드러내놓고 반목해본 적이 없었을만큼 나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만큼은 평화주의자다. 그러나 싸움과 경쟁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고, 큰 부분임을 아예 부정할 수도 없다. 삶이란 대체로 투쟁의 연속이며, 전혀 싸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도, 죽지 않을정도의 싸움을 거쳐 나가다보면 자연스레 전사의 모습이 되어간다. 이러한 본능만 있고 기술은 없는 싸움판에서 익힌 기술은 평생 그 사람의 삶속 깊은곳에 새겨진다.

어린 나이에 사회와 싸우기 위해 가장 먼저 익혀야 했던 능력은 놓여진 상황에서 공기를 읽는 것이었다. 세상을 살며 지식 정보를 기반으로 옳은 선택을 하기엔 알아야 할것은 너무나도 많은데, 당시 어렸던 나는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부모의 부재속에 선택의 순간을 마주해야 했으며,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분위기를 읽어야만 했다.

모르는 아줌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 계시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반면 모르는 아저씨가 친근한 표정으로 엄마가 집에 계시냐고 물으면 맞다고 대답해야 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극도의 긴장속에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 행동에서 그 사람의 의도를 대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깨우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장 먼저 배운 '싸움의 기술' 이며, 이 기술은 서른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사회에서 싸워나가는데에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사람이 무언가를 얻어내는 과정이 싸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결국 그 얻으려는 것이 그 시점에 얼마나 얻기 어려운 일인가로 결정되는데, 대장이 했어야 하는, 혹은 대장의 자리를 채우러 간 엄마가 했어야 하는 일을 내가 하는것은 어린 아이에게는 대부분 싸움이었다.  학교에선 무시당하지 않고 적당히 처지를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좋아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꼭 가지고 싶은 한두가지로 만족하고 나머지 욕구를 포기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진짜 갖고 싶은것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바빠서 할머니 이모 엄마가 며칠간 집을 비워도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 법을 배우고, 별로 훌륭하지 않은 환경에 짧게 공부하고도 만족할만큼의 성적을 내는 방법을 배웠다.

그렇게 어린 아이는 조금씩 전사의 모습이 되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청소년이 되었고, 인생에서 싸움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양상은 꽤 많이 변했다. 이전의 내 싸움 상대는 상황이거나, 어린 아이였으며, 나는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속에서, 혼자 조용히 그것들과 싸워나갔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가정경제등에 전면으로 나서 관여하기 시작하고, 남들 다 하는 입시가 인생의 최우선 과제가 된 시점에서, 이제는 주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남들과 똑같이 링에 올라 싸울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한 싸움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도록 나를 지겹게 괴롭힐 그것들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반, 나는 정말 지겹게 주변 사람들에게 '너는 그렇게 해서는 절대 좋은 대학을 갈 수 없다' 라는 얘기를 들었다.

'형이 이 대학 오려고 공부해봤는데'
'내 주위 애들 보면 요새는 다~'
'그런식으로 하면 결국 고2 고3되면~'

그들은 나를 위한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론을 펴려고 하면, 돌아오는 답은 다음과 같았다.

'어허 어린게 어디서 말대꾸를~'
'형 S대생이야~ 내가 들어와봤다니까? 내가 니 나이대에 너같은 애들 많았어'
'너도 나이 들어보면 내 말이 맞다는걸 알 수 밖에 없어'

입시라는 싸움을 하는 내 입장에서 그들은 링 밖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입시와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하는거라곤 관객석에서 나의 싸움을 대충 겉으로 보며, 몇년전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한두마디를 툭 던지는것뿐이었고, 링 안에 있는 나는 그들의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그 주장에 대한 찬반논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입시가 아닌 논쟁에서마저 링에 올라오는것을 거부했으며, 당시 나는 그 상황에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미 입시를 끝내고, 대체로 성공적인 결과를 낸 입장에서 그들은 이 토픽에서만큼은 졸업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이 졸업한것은 입시뿐이며, '어떤 공부방식이 내게 옳은가' 하는 논쟁에서는 다시 나와 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나, 그들은 이런 저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끝내 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5년 후, 나는 내 방식대로 원하는 대학에 갔지만, 그들은 당연히 이전에 나와 싸운것이 아니기에 전혀 과거의 발언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았다. 오히려 졸업과 취업, 연애와 결혼등의 토픽에서 끈임없이 링 밖에서 훈수와 평가와 독설을 날려대려 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었으며, 그래서 지난 5년간 꼭 하고 싶던 말을 그들에게 해줄 수 있었고, 그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일전에 PGR에서 " 우리 대화로 하자는 사람한테 [닥쳐 대화는 시시해 내 주먹을 들어] 라며 주먹을 휘두르면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은 키보드 워리어가 아니라 키보드 강간 살인범입니다 "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생각은 현재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아무리 싸워도 선을 넘거나, 정말 미친놈을 만나는게 아니면 현실에는 영향이 없는 인터넷 세상이지만, 여전히 온라인상에도 싸움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 다 붙잡아가며 뭐 임마 내 편 아니야? 싸울래? 이런 행위를 하는것은 그냥 폭력을 휘두르는것이고, 나는 그러한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평화주의자 네티즌들을 존중한다. 설득력 없는 얘기같지만 나도 싸움보단 친목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굳이 싸울 생각이 없다면, 싸움판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해서는 당연히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괜찮다고, 나랑 상관 없다고, 자신은 싸움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며, 정작 무언가가 필요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링 밖의 안전~한곳에서 조롱하고, 상황과 맞지 않는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진 정말 좋게 생각해서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중에는 심지어 무언가를 던져 일방적인 가해를 하는 사람들조차 있는데, 그들에겐 일전에 구경꾼들에게 해줬던것과 같은 말을 해줘야 할 것 같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넥타이 풀고, 글러브 끼고, 링으로 올라오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12/09 19:51
수정 아이콘
지치신 심신에 심심한 위로를 드립니다. 그래도 지난번같은글은 너무 투기장 열리기 딱좋다고 생각하는지라 흐
ioi(아이오아이)
18/12/09 19:54
수정 아이콘
솔직히 인터넷에선, 특히 피지알에서도 링 위에 못 올라갈 거면 의견 안 꺼내야 한다는 주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리스크 회피 성향, 이기는 쪽을 응원한 해도 얻는 쾌감을 감안하면 이해는 할 수 있죠
라푼젤
18/12/09 20:10
수정 아이콘
건스앤로지스의 'get in the ring' 이 bgm으로 깔려야 될 글 이로 군요....
18/12/09 21:16
수정 아이콘
그니깐 그만 좀 싸워요.
18/12/09 21:31
수정 아이콘
아직 서른도 안되셨어요? 신불해님과 마찬가지로 놀랍네요.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8/12/09 22:49
수정 아이콘
근데 뭐.. 살아오면서 느낀건(특히 인터넷에선) 시시비비를 가리는거 보단, 목적 자체가 상대를 열받게 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꼬고 비아냥대고 툭툭 내던지고 그러는거죠. 그런 사람들에게 링으로 올라오라고 해봐야.. 나만 열받고 그럼 내가 패배ㅠ
다크 나이트
18/12/10 00:17
수정 아이콘
애초에 글러브끼고 올라온 순간 구경꾼이 물건 던지는건 상수죠. 솔직히 님이 그거 모르고 올라왔을까요?
대놓고 투기장에서 만들어서 싸워 놓고 밖에서 물건 던진다고 올라오라고 하면 누가 알겠다고 올라올까요?
알고 계시면 투기장 만들지 말고 좀 쉬고 있어요. 탈퇴하고 두번째 와서 솔직히 그때랑 똑같이 투기장 벌리다가 난리 치고 또 탈퇴하시게요?
솔직히 님 투기장 만드는건 좋은데 여기서 안했으면 좋겠어요. 님 글은 그 글이 옳고 그른걸 떠나서 심력을 너무 소모시킵니다. 어짜피 현실도 시궁창인데 자게 글만 보면 그냥 스트레스는 더 받으니 잘 안보게 되더군요.
세종머앟괴꺼솟
18/12/10 00:49
수정 아이콘
본인 멘탈로 견디지도 못할거면서 그러시는건 좀 이해하기 힘들긴 합니다. 그런 반응들 예상 자체를 못하시는 건가..
18/12/10 09:08
수정 아이콘
1. 저번에 탈퇴한건 호주가느라 그런거고
2. 저는 싸우자고 투기장을 만든게 아닙니다.

제가 싸우자고 글쓸거면 머하러 글을 저렇게 쓰나요 훨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는데

애초에 저 아래글도 걍 몇몇 댓글 피드백 안하고 쌩까고 차단했으면 제 입장에서도 편하고 싸움날 일도 없죠. 제 나름대로 글을 쓴 책임을 지려다보니 그렇게 되는것뿐.

다크 나이트님이 Orbef님 깔라고 쓴 글도 님 입장에선 싸우자고 쓴 글 아니죠? 저도 똑같아요.
다크 나이트
18/12/10 15:32
수정 아이콘
1번은 선후 관계가 그러시다니 그렇게 알겠습니다.
2번은 그렇게 어렵게 투기장 만드는 부류가 존재하죠. 저 개인적으론 이리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때 쓴 글은 지금 생각하면 어느정도 싸우자고 쓴글이 맞는것 같네요. 솔직히 제가 너무나이브하게 판단했던것도 맞고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444 [일반] 스카이 캐슬 10화 감상 - 반 친구들은 다 적일 뿐이야. [76] 펠릭스30세(무직)12863 18/12/23 12863 4
79412 [일반] [스포] 고마워요! "레디 플레이어 원" [24] Farce11416 18/12/20 11416 10
79215 [일반] 알았으니까, 링으로 올라오세요. - 리마스터 [10] 와!5825 18/12/09 5825 6
79002 [일반] 당신은 시대의 눈물을 본다. [15] 안초비6814 18/11/24 6814 13
78673 [일반] 의미가 되고싶다. [2] 카바티나3437 18/10/29 3437 4
78596 [일반] 결혼식 참석에 대한 단상 [14] 저팔계8379 18/10/21 8379 4
78591 [일반] 6,400명을 죽이고 진주를 1년간 지배하던 고려시대 '정방의의 난' [30] 신불해12983 18/10/21 12983 45
78380 [일반] [영화] 명당, 화가 난다. (스포잔뜩) [57] 항즐이10406 18/09/29 10406 12
78202 [일반] 사실인지 소설인지 모를 성범죄(?) 이야기. [25] SKKS9220 18/09/12 9220 10
78190 [일반] 엄마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98] 산호17253 18/09/11 17253 132
78163 [일반] 부산 음식점 이야기(4) [13] 하심군7271 18/09/09 7271 2
78069 [일반] 2년만에 이사했습니다. [14] style6667 18/08/30 6667 6
78029 [일반] 수박 예찬론 [21] Syncnavy6594 18/08/27 6594 9
77898 [일반]  [뉴스 모음] No.192. 차든지 덥든지 외 [17] The xian9741 18/08/15 9741 31
77815 [일반] 차이고 2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정말 이별했습니다. [57] 아마그피16083 18/08/05 16083 8
77771 [일반] 7월의 어느 토요일, 평행 세계의 소녀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28] 위버멘쉬6047 18/08/01 6047 37
77703 [일반] [추모] 글을 쓰면 눈물이 멈출까 싶어 몇 자 적어봅니다 [75] 소린이9704 18/07/24 9704 52
77694 [일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46] 여망7750 18/07/23 7750 8
77649 [일반] 나이스게임 TV 염천교에 임시패널로 출연하게되었습니다. [60] 여왕의심복13105 18/07/19 13105 64
77428 [일반] [데이터/초초스압] 드라마 사마의, 마지막 장면 [38] 신불해15923 18/06/28 15923 25
77384 [일반] 해밀턴 더 뮤지컬(Hamilton the musical)-캐스팅,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02-(데이터 주의) [4] Roger6287 18/06/23 6287 2
77379 [일반] 김종필 조문기 [10] 앙겔루스 노부스9753 18/06/23 9753 27
77311 [일반] [뉴스 모음] No.182. 지방선거 결과 진단 Vol.2 외 [19] The xian10348 18/06/17 10348 3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