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11/24 21:27:43
Name 안초비
Subject [일반] 당신은 시대의 눈물을 본다. (수정됨)
당신은 시대의 눈물을 본다.


대학교의 같은 과 오타쿠 선배들이 술만 마시면 Z건담 이야기를 꺼내고, Z건담 이야기를 꺼내면 가장 처음 나오는 말이 저 문구였다.

아쉽게도 나는 물 탄 듯한 색감에 한 세대쯤 지난 캐릭터 디자인의 애니메이션을 볼 생각은 없었고,

그래서 저 문구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훨씬 깔끔하고 번쩍거리는 비주얼의 건담 시드가 방영되고 있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 그런 문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제대한 후 복학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빵집에서의 아르바이트로 보내게 되었다.

이성당이나 성심당처럼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줄을 서 있는 가게는 아니었지만

다니던 대학교 인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집이었다.


여하튼 내가 그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어느 날부터 저녁마다 특이한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곰같은 덩치를 하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였다.

체격은 컸지만 마동석이라기보다는 터틀맨에 가까운 선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그는 저녁마다 가게를 찾아와 치즈빵을 찾곤 했다.

첨언하자면,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가 바로 치즈빵이었다.

몽글몽글하고 쫄깃쫄깃하면서도 적당한 짭짤함과 치즈향이 어우러져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빵이었고,

그 인기 덕분에 빵 나오는 시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가장 먼저 매진되는 빵이었다.

그러니 저녁에 뒤늦게 찾아온 그 사내는 매번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게 며칠이고 계속 허탕을 쳤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사내는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 저녁마다 가게를 찾아 혹여 치즈빵이 남아 있지 않냐고 내게 묻는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해야 할까, 그 모습을 일주일 넘게 지켜 본 사장님 내외분께서 하루는 따로 치즈빵을 두어개 빼 놓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매일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그래도 한 번 맛은 보여 드려야 하지 않겠냐면서.

그 날은 하루종일 저녁에 찾아올 사내가 신경쓰여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빵을 받아들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저녁시간이 되는 걸 기다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내는 다시 나타났다.

매번 찾아와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한 멋적은 표정과 함께. 오히려 미안하다면 미안해야 할 것은 이 쪽인데 말이다.


미리 챙겨 둔 치즈빵을 그에게 내밀자, 그는 일순간 눈을 동그랗게 하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보는 사람이 다 기분좋아질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리고는 봉투에 든 치즈빵을 그 자리에서 꺼내 한 입 크게 베어 물더니, 별안간 호흡이 거칠어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장님 내외분도 나도 당황해 티슈를 뽑아 내밀며 왜 그러시냐고 묻자, 사내는 없을 걸 알면서도 매일이고 찾아온 사연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사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인데, 이번에 여기로 일을 하러 와서 치즈빵이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먹어 보려 했지만

퇴근하고 나면 항상 저녁 시간이라 매진이고, 전혀 연고가 없는 동네라 달리 부탁할 사람도 없으며, 빵집의 휴일이 마침 자기가 쉬는 요일과 겹쳐 도저히 먹을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일평생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성실히 살았는데 먹고 싶은 빵 하나도 못 먹는 인생이라니 너무 서글퍼져서 매일 즉석복권을 긁는 심정으로 저녁마다 가게를 찾았다고 했다.

말을 마치고 남은 조각을 마저 먹어 치운 사내는 다시 활짝 웃으며 다른 빵도 몇 개 골라 계산하고 기분 좋은 뒷모습으로 가게를 나섰다.


사내가 나가고 난 후, 주인 내외분은 어렵더라도 저녁에 치즈빵을 한 번 더 구워서 팔기로 하셨다.

우리 빵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사람들이 저 사내 뿐이겠냐며..


다음 날, 사내는 매일 따끈따끈한 치즈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전날보다 더욱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고,

매일 저녁마다 우리 빵집을 찾아와 치즈빵과 단팥빵, 소보루빵, 슈크림빵 등을 사 가곤 했다.


그렇게 2주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추석 연휴가 가까워질 무렵부터 사내는 별안간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인 내외분과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했으니 이번엔 다른 지방으로 갔겠거니 했다.

그 선한 얼굴과 웃음을 못 보게 된 것은 아쉽지만, 그 사람 하나가 우리 가게 영업 패턴을 바꿔 놨으니 이것도 인연 아니겠냐는 농담을 했다.


그 사내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딱 1년 뒤, 추석 연휴때였다.

나는 그 빵집의 주인 내외분과 좋은 인연이 되어 복학 후에도 계속 그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연휴에 딱히 할 일도 없고 집에 내려가기도 귀찮았던 터라 추석 연휴에도 근무를 했다.

연휴는 연휴인지라 손님이 뜸해 사장님께 적당히 정리하고 들어가라는 사장님 전화를 받고 가게를 정리하는데,

어떤 아주머님께서 들어와 치즈빵을 찾으시는 것이다.

추석 연휴라 손님이 뜸해 지금은 만들어 둔 빵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내일은 살 수 있느냐며 간절히 물으셨다.

아주머니가 왜 그리 급하게 치즈빵을 찾는지 궁금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그 연유를 물었다.

살짝 뜸을 들이다 한숨을 깊게 쉬며 입을 연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그 전 해에 저녁마다 치즈빵을 사러 오던 그 사내였고, 내일은 그 사내의 기일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살아 생전 아들에게 제대로 해 준 것도 없는 것이 죽고 나서도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아들이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전화로 이 곳 빵이 맛있다며 항상 이야기를 했었고,

처음으로 차리는 제삿상에 죽기 직전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 하나는 꼭 올리자 싶어 발품을 팔아 이 동네까지 찾아 왔다는 것이었다.


허어, 하고 새어나오려는 탄식을 참고 내일은 꼭 만들어 놓을테니 조금 일찍 찾아 오시라는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가 나간 뒤,

문득 잊고 있었던 그 문구가 떠올랐다.



당신은 시대의 눈물을 본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지난 지금도 저 문구를 인터넷 어딘가에서 볼 때마다 그 때 그 사내가 다시 떠오르곤 한다.

그 아주머니는 올해 추석에도 그 빵집에서 치즈빵을 사 갔을까.














(이 글은 픽션입니다.



위 트윗을 읽고 모티프를 얻어 창작하였습니다.혹시 문제가 되면 자삭하겠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flowater
18/11/24 21:32
수정 아이콘
어우 픽션이라 다행이네요. 시대의 눈물은 나무위키에서 카미유 비단을 검색해 보는걸로 근데 글쓴분은 아마 보셨을듯
위버멘쉬
18/11/24 21:37
수정 아이콘
와 찌릿찌릿한 감동ㅠ 이러다 마지막에 (응?)
넘 재밓게 읽었습니다 창작욕구에 불을 지피는 글이네요 크크
안초비
18/11/24 21:40
수정 아이콘
본문에 쓰는 걸 깜빡했는데,

https://twitter.com/songnun1004/status/1064467745687781376

위 트윗에서 모티프를 얻은 글입니다. 혹시 문제가 되면 자삭하겠습니다.
호모 루덴스
18/11/24 21:41
수정 아이콘
시대의 눈물이라고 하니,
하근찬의 "수난 이대"가 떠오르네요.
18/11/24 21:43
수정 아이콘
글 너무 잘쓰시네요. 실화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합니다
18/11/24 21:44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쥬갈치
18/11/24 21:49
수정 아이콘
건담중에는 진짜 Z건담을 제일 좋아합니다
뭐랄까 좀 주인공이 전형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마지막이 비극이어서 좀더 좋았고....
그건그렇고 본문글은 진짜 마지막에 픽션이란말아니었으면 많이 슬펐을꺼같아요
22raptor
18/11/24 21:54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제타건담 좋아해요 흐흐
18/11/24 21:57
수정 아이콘
그치만..
Hastalavista
18/11/24 22:03
수정 아이콘
눈물이 나오다 쏙 들어가버리네
벽타는학생
18/11/24 22:41
수정 아이콘
눈물 찔끔했는데, 마지막에 어..? 크크 필력 좋으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대장햄토리
18/11/24 22:46
수정 아이콘
휴... 다행이다 실화가 아니었네...
여튼 필력 좋으시네요.. 저도 잘 읽었습니다..흐흐
로즈 티코
18/11/24 22:48
수정 아이콘
픽션이라 다행입니다 크크 기분좋게 낚였네요^^
잘 읽었습니다.
18/11/25 08:32
수정 아이콘
아아니
세츠나
18/11/25 12:52
수정 아이콘
픽션인건 그렇다 치고 트윗하고 너무나 다른 분위기 대체...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0199 [일반] 사바하 -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소서(노스포) [42] 이쥴레이11928 19/02/21 11928 11
80055 [일반] 결혼 찬성론자의 소소한 일상이야기 [35] Hammuzzi7468 19/02/12 7468 55
80019 [일반] 돈이 있어야 여유가 생기는 것은 인간 본성인가 보더라. [71] shadowtaki16050 19/02/08 16050 37
79976 [일반] 슈퍼볼 53(Super Bowl LIII) 프리뷰 (약스압) [63] Danial11922 19/02/02 11922 28
79956 [일반] 버닝썬 사태.. 빅뱅 승리가 자유로울수 없는 이유 [66] 준벙이13290 19/02/01 13290 15
79444 [일반] 스카이 캐슬 10화 감상 - 반 친구들은 다 적일 뿐이야. [76] 펠릭스30세(무직)12876 18/12/23 12876 4
79412 [일반] [스포] 고마워요! "레디 플레이어 원" [24] Farce11420 18/12/20 11420 10
79215 [일반] 알았으니까, 링으로 올라오세요. - 리마스터 [10] 와!5828 18/12/09 5828 6
79002 [일반] 당신은 시대의 눈물을 본다. [15] 안초비6819 18/11/24 6819 13
78673 [일반] 의미가 되고싶다. [2] 카바티나3444 18/10/29 3444 4
78596 [일반] 결혼식 참석에 대한 단상 [14] 저팔계8390 18/10/21 8390 4
78591 [일반] 6,400명을 죽이고 진주를 1년간 지배하던 고려시대 '정방의의 난' [30] 신불해12990 18/10/21 12990 45
78380 [일반] [영화] 명당, 화가 난다. (스포잔뜩) [57] 항즐이10412 18/09/29 10412 12
78202 [일반] 사실인지 소설인지 모를 성범죄(?) 이야기. [25] SKKS9232 18/09/12 9232 10
78190 [일반] 엄마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98] 산호17281 18/09/11 17281 132
78163 [일반] 부산 음식점 이야기(4) [13] 하심군7280 18/09/09 7280 2
78069 [일반] 2년만에 이사했습니다. [14] style6679 18/08/30 6679 6
78029 [일반] 수박 예찬론 [21] Syncnavy6599 18/08/27 6599 9
77898 [일반]  [뉴스 모음] No.192. 차든지 덥든지 외 [17] The xian9782 18/08/15 9782 31
77815 [일반] 차이고 2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정말 이별했습니다. [57] 아마그피16092 18/08/05 16092 8
77771 [일반] 7월의 어느 토요일, 평행 세계의 소녀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28] 위버멘쉬6057 18/08/01 6057 37
77703 [일반] [추모] 글을 쓰면 눈물이 멈출까 싶어 몇 자 적어봅니다 [75] 소린이9720 18/07/24 9720 52
77694 [일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46] 여망7761 18/07/23 7761 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