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11/19 22:05:13
Name EPerShare
Subject [일반] 전화번호 이야기
오늘은 아주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딱히 상사에게 혼이 난 것도 아니었고, 상사가 모두 휴가를 가서 편히 누워있다 온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낸 것도 아닌 단조로운 근무를 끝마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작게 나마 손을 베여 반창고를 하나 더 늘리긴 했지만, 사실 불편한 것은 길게 찢어져 일 주일 내내 거즈를 갈고 있는 발가락이 더 까다롭습니다. 여느 날과 살짝 달랐던 것은, 오늘은 아무 회식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입 티를 벗어가는 중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각자 회식이 잡힌 것인지, 웬일로 상사와의 술자리가 마련되지 않을 때면 항상 집회하던 동기들이 오늘따라 기별이 없습니다. 저는 마치 스핑크스의 퀴즈처럼 오늘 저녁은 구두에 혹사당한 왼발의 상처로 인해, 아침과는 다른 걸음걸이로 절뚝거리며 세탁소에 맡겨 놓은 정장을 찾아 방에 대충 던져 놓은 뒤, 간만에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카페 깊숙한 곳의 의자에 몸을 파묻었습니다.

사실 대충 책장을 넘기고는 있지만, 이 행위가 '나는 공부하고 있다'는 변명으로 자기위안을 삼기 위함이지, 진정히 지식의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고결한 행위가 아님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한 두장 끄적거리다보면 으레 폰을 들고 이 카톡방, 저 카톡방 집적거리며 어떻게든 어그로를 끌어서 드잡이질을 하여 무료함을 해소하곤 합니다.

그러던 도중, 몇 달 전 신입사원 연수에서 동기들의 번호를 떼로 등록할 때 이후로는 한 번도 표시되지 않았던 친구 등록 마크가 떠오른 것을 보았습니다. 또 무슨 광고인지, 아니면 번호가 바뀐 것인지, 저는 별 생각 없이 반창고 감긴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밀었습니다. 그리고 주황빛으로 채색 강조된 화면 가운데에는, 수 천 일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던 '아버지'라는 친구 등록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멍한, 비몽사몽의 상태로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친구의 프로필을 확인했습니다. 그 짧은 일순, 손가락이 화면과 접촉하여 프로필 화면이 로딩되는 그 순간 저는 현실감각을 되찾았습니다. 당연히 카카오톡이 아무리 훌륭한 소통 프로그램이건 간에, 이 세상에 이미 없는 사람을 친구 추가 해줄 수는 없는 법이죠. 당연히 이 프로필은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누군가의 것이고, 그저 제가 장례 후로 전화번호를 정리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삭제된 '그 전화번호'를 배정받은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국 나무와 아파트가 어우러진 배경을 보고, 프로필 사진을 눌러 여섯 장의 사진을 염탐하고야 말았습니다.

여섯 장의 사진 중 네 장은 자연을 찍은 사진이요, 한 장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쯤 되어보이는 젊은이요, 나머지 한 장은 그와 닮았지만 아주 어려보이는 학생의 사진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 역시 누군가의 '아버지'이지 않을까요.

저는 잠시 사진을 들여다보다 프로필을 끄고,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책의 페이지를 손으로 비비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보통 제가 글을 쓸 때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예를 들면 밥에 쳐넣은 콩이 더럽게 싫다던가-였지만, 오늘은 무엇을 맺음말로 채택해야할 지 감이 오질 않네요. '아버지', 당신 또한 훌륭한 아버지이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Thursday
18/11/19 22:21
수정 아이콘
저도 모르게 왈칵 했습니다.
WhenyouinRome...
18/11/19 22:35
수정 아이콘
아직도 중학교시절 죽어버린 아버지의 아자만 꺼내도 열이 뻗치고 화가나는 저는 좋은 아버지를 두셨던 님이 부럽네요..
스웨트
18/11/20 09:44
수정 아이콘
참.. 담담하지만 울리는 글이네요
EPerShare님께 좋은일이 가득하시길 ㅠ
18/11/20 09:49
수정 아이콘
이 좋은글에 댓글이 이렇게나 적네요.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114 [일반] [뉴스 모음] No.216. 트러블 메이커 이재명 외 [8] The xian10988 18/12/02 10988 14
79113 [일반]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좋은 음악 셋]삼종삼색의 힙합 스펙트럼. [6] Roger12030 18/12/02 12030 0
79112 [일반] 영화 후기 - '국가부도의 날' (스포 有) [70] 껀후이14419 18/12/01 14419 4
79111 [일반] 조지 부시(부) 전 대통령 타계 [23] 하심군11992 18/12/01 11992 1
79110 [일반] 아뇨, 운동 안해요. [88] EPerShare16909 18/12/01 16909 27
79109 [일반] [팝송] 레이니 새 앨범 "Malibu Nights" [3] 김치찌개6125 18/12/01 6125 0
79108 [일반] 누리호 시험발사체가 발사 성공하였습니다. [15] 잰지흔8955 18/11/30 8955 16
79107 [일반] dos시절 해봤던 게임들 [108] 사진첩14283 18/11/30 14283 4
79106 [일반] [뉴스 모음] No.215. 국정농단 부역자들의 행복회로. 박근혜 사면설 외 [24] The xian12546 18/11/30 12546 22
79105 [일반] 마약법이 개정되기까지 [7] kurt7325 18/11/30 7325 0
79104 [일반] [알쓸신잡] 레닌이 독일로부터 지원받은 자금 액수. [27] aurelius11852 18/11/30 11852 3
79103 [일반] 가족의 재발견 – 아버지는 오늘도 성장하신다. [9] 삭제됨8330 18/11/30 8330 49
79102 [일반]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중국 송나라의 수도 개봉의 모습들 [45] 신불해20347 18/11/30 20347 37
79101 [일반] 성평등 운동을 비하한(?) 시의원 [70] 사악군15002 18/11/30 15002 88
79100 [일반] 의료용 대마가 일부 합법화 됩니다 [17] 인간흑인대머리남캐7713 18/11/30 7713 2
79099 [일반] 드루킹 "노회찬에 돈 안 줬다..차(茶) 준 것을 오해" [54] 캐모마일15142 18/11/29 15142 0
79098 [일반] 유전자 조작 중국 과학자 "물의를 빚어 죄송, 다만 에이즈 해결에는 도움이 될 것" [31] 군디츠마라11696 18/11/29 11696 2
79097 [일반] 이재명은 역시 혜경궁이 치명타였음.... [17] SKKS13787 18/11/29 13787 9
79096 [일반] '파이세대' 들어보셨나요? [75] chilling13503 18/11/29 13503 17
79095 [일반] 광양시에 세워지는 중국의 알루미늄공장 이거 막아야겠네요 [78] 무플방지협회16327 18/11/29 16327 4
79094 [일반] [단상] 러시아 공산혁명은 필연적이었나? [14] aurelius7504 18/11/29 7504 6
79093 [일반] 이재명 ‘친형 강제 입원 시도’…“비서실장이 진술서 취합” [89] 베라히15499 18/11/28 15499 3
79092 [일반] 이제 동전과 지폐는 폐기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130] 음냐리14959 18/11/28 14959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