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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9/27 13:21:18
Name 글곰
Subject [일반] (삼국지) 형주 공방전 (4) (수정됨)
  형주 공방전 (1) : https://pgr21.com/?b=8&n=78303
  형주 공방전 (2) : https://pgr21.com/?b=8&n=78311
  형주 공방전 (3) : https://pgr21.com/?b=8&n=78324




자. 이번 편에서는 잠시 이야기 전개를 멈추고 관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금의 칠군을 수몰시키고 양번을 포위할 때만 해도 관우의 기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단숨에 천하를 평정할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 이면에는 갖가지 문제점들, 말하자면 불안요소가 숨어 있었습니다. 대략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손권과 여몽의 속임수
  2) 미방과 사인의 배신
  3) 맹달과 유봉의 한심한 짓
  4) 유비의 성도 귀환
  5) 3만 명의 포로
  6) 조조의 전력 동원

  참 많기도 하네요. 어디 한 번 하나하나 살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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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권과 여몽의 속임수]

  여몽은 일찍이 형주를 겸병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주유가 유비를 이용하려 했었고, 노숙이 유비와 협력하려 했던 반면, 여몽은 유비를 병합하려 했었지요. 손권도 주유와 노숙이 연달아 죽은 후에는 점차 여몽의 의견에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물론 관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관우는 양번을 공격하면서도 후방에 병력을 다수 남겼는데 그건 여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몽은 관우가 양번을 공격하러 출격하자 지금이야말로 형주를 차지할 적기라고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손권에게 상소를 올리죠. “관우가 후방에 수비병을 많이 남긴 건 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래 지병이 있으니, 지금 병 치료를 핑계 삼아 건업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면 관우가 안심하고 수비 병력을 모두 북쪽으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 사이 장강을 따라 배와 말을 타고 습격한다면 남군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그 의견이 좋다고 생각해 일부러 떠들썩하게 소문을 내면서 여몽을 건업으로 불러들입니다. 때마침 조조가 자신과 손잡자고 사자를 보내기도 했겠다, 그는 이참에 유비와 아예 손을 끊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여몽은 자신을 대신해 형주에 파견할 자로 육손을 추천합니다.

  육손은 백면서생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나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183년생으로 당시 서른일곱 살이었으며 여몽과는 다섯 살 차이에 불과했지요. 스물한 살에 손권 휘하에 들어 벼슬을 시작했는데 주로 지방의 반란군과 도적떼를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여러 번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육씨 일가를 회유하고자 했던 손권은 죽은 형 손책의 딸을 육손과 혼인시켰는데, 그 손책이 과거 육씨 일족의 대표격이었던 육강을 공격해 죽였던 적이 있던 걸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육손은 여몽이 병을 칭해 건업으로 돌아오자 그와 만나 관우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육손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여몽은 그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손권은 그를 편장군 우부독으로 삼아 육구로 보냅니다. 육손은 육구로 가자마자 관우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태도가 실로 공손하다 못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대가 법도에 따라 군대를 지휘하여 적을 격파한 공로는 실로 위대합니다. 동맹국으로서 기쁘고도 이로운 일이기에 그 소식을 듣고 박수를 칠 정도였습니다.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받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저는 보잘것없는 선비로 어쩌다 서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오직 그대의 풍채를 앙모하면서 삼가 가르침을 청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관우가 우금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편지를 보내는데, 얼마나 낯 뜨거운 칭송으로 가득한지 차마 따라 적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물론 관우를 방심하게 하려는 속임수였죠.

  한편 관우는 병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우금은 격파했지만 조조가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기 전에 양양과 번을 점령하는 것이 지상과제였죠. 그런 상황에서 위협적인 적수로 여겼던 여몽이 돌아가고, 그 후임으로 온 자는 자신에게 굽실거리며 알랑방귀를 뀌어 댑니다. 관우는 이제 안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강릉과 공안에 배치한 병력을 북쪽으로 오게 합니다. 여몽의 계책대로였지요.



  [2. 미방과 사인의 배신]

  이 때 유비가 점유한 형주의 영역은 대략 남군, 무릉군, 영릉군 세 개 군이었는데(맹달이 태수로 임명된 의도군은 남군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곳은 단연 남군 강릉현과 무릉군 공안현이었지요. 관우는 강릉에는 남군태수 미방을, 공안에는 장군 사인을 배치했습니다.

  미방은 서주에서부터 형 미축과 함께 유비를 따른 자였습니다. 미씨 집안의 엄청난 재력(財力)을 바탕으로 유비를 후원했으며 동시에 유비의 처남이기도 했지요. 유비가 그를 믿고 남군태수로 삼아 형주의 실질적인 이인자로 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인은 부사인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그 전까지 활약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 때 장군직에 올라 있었고 또한 북쪽 유주(幽州) 출신이란 점에서 아마도 초창기부터 유비를 따랐던 무장으로 보입니다. 공안을 수비하도록 했을 정도면 능력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관우가 평소 이 두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불화가 있었던 것이죠. 관우는 결코 원만한 성격이 못 되었습니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는 정중하면서도 공손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업신여기고 깔보기 일쑤였죠. 문제는 그 커트라인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람 대다수가 그의 눈 아래에 있었지요.

  아예 힘없는 백성들이나 무명소졸들은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관우에게 있어 그들은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고, 그는 평생 사졸들에게 너그러운 상관이자 백성들을 아꼈던 목민관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대부들이었지요. 관우는 자신의 동료나 부하였던 사대부들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워낙 솔직하고 직설적인 데다 자부심 넘치는 성격이 사람들과의 불화(不和)를 부채질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미방이 사고까지 쳐 버립니다. 실수로 강릉에 불이 나서 군수물자들이 다수 불타버린 것이죠. 미방과 사인은 후방에서 관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보급에 차질이 생겨 버리고 맙니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조급했던 관우는 격분하여 두 사람을 질책하면서, 돌아가면 그 죄를 다스리겠다고 말하죠. 그러니 미방과 사인은 불안해하면서 동시에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손권은 이 틈을 노렸습니다. 그는 은근히 밀서를 보내 미방과 사인 두 사람을 꼬드깁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그걸 덥석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물론 상황이 관우에게 불리하긴 했지요. 조조와 손권이 손을 잡았다면 관우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관우와 트러블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공신(功臣)이자 인척이었던 미방과 오랜 부하였던 사인이 그렇게까지 손쉽게 저쪽으로 넘어가 버리다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관우의 용인(用人)술에 대해서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되면서도, 동시에 미방과 사인의 막장성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관우의 후방은 그런 식으로 너무나도 손쉽게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3. 맹달과 유봉의 한심한 짓]

  그러나 관우에게도 믿는 구석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상용에 맹달과 유봉이 이끄는 군사들이 있었지요. 맹달의 병사들이야 원래 형주 것이라 쳐도, 유봉의 병력은 한중에서 내려온 추가 벙력이었습니다. 게다가 항복한 신탐과 신의가 원래부터 거느리고 있던 군대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상용에 있었던 병력이 거의 만 명에 육박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 병력이 양양으로 내려온다면 관우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격이었죠. 상용과 양양은 강으로 이어져 있어 배를 동원한다면 신속하게 합류도 가능합니다. 관우는 그들에게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우라고 독촉합니다.

  그런데 맹달과 유봉은 관우를 돕지 않습니다. 명목상의 이유는 상용이 종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쉽사리 군사들을 이동시키기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기도 했지요. 원래 상용은 외진 곳이라 대대손손 살아온 호족인 신씨 형제들이 실질적으로 왕 노릇을 하던 곳이었거든요. 비록 지금은 항복해 왔지만 다시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당과 유봉이 관우를 돕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면서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아 가기까지 했지요.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의 큰일을 눈앞에 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싶습니다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아마도 왕의 양아들이자 어려서부터 공을 세운 야심찬 젊은 장수와, 정략에 능한 명사(名士)인 맹달 두 사람은 애당초 화합하기 힘들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좀 더 파고들어 보자면 애당초 두 사람간의 지위고하를 확실하게 해 놓지 않은 유비에게도 일정부분 잘못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결국 맹달과 유봉은 관우의 분투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기만 합니다.



  [4. 유비의 성도 귀환]

  그러면 유비는 왜 성도로 돌아간 것일까요? 지난 글에서도 많은 분들이 댓글로 의문을 표해 주신 바 있습니다. 유비가 한동안 한중에 머무르면서 조조를 견제했다면 조조 또한 쉽사리 동쪽으로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관우가 좀 더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저는 네 가지 추측을 제시해 볼까 합니다. 첫째는 방금 전에 언급한 상용의 병력입니다. 여차하면 유봉과 맹달의 병력으로 관우를 도울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겠지요. 어차피 익주 본토에 남은 병력은 전무하다시피 한 수준이었기에 상용의 병력이 동원 가능한 유일한 전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관우가 유봉과 맹달을 불렀다는 기록에서 미루어볼 때, 관우에게는 그들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유비도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부의 사정입니다. 이건 당시 시대상황과도 직결되어 있지요. 당시는 반란이 거의 일상사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백 년간 이어져 온 한나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중앙권력이 장악력을 잃자 여러 지역별로 크고 작은 세력들이 군벌화된 시기입니다. 지역마다 오래도록 뿌리박고 살아 온 대가문(大姓)들이 이른바 호족(豪族)화되어 사병을 거느리며 영향력을 행사했고 심지어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지방관들도 독립 세력을 형성하여 서로 치고받았습니다. 전쟁이 일상화되다 보니 자연스레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수탈과 징병이 이루어졌고, 군대에 끌려가 개죽음당하기 싫었던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쳐서 도적(賊)이 되는데 크게는 그 무리의 크기가 십만 명 단위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종종 무력에 의해 토벌되었으나 틈만 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다시 일어나곤 했습니다. 즉 천하에서 사시사철 반란군과 도적떼가 발호하던 시절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랬기에 유비는 오래도록 수도를 비워둘 수 없었습니다. 당장 익주부터가 본인이 유장으로부터 빼앗은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곳이어서 민심이 안정되어 있지 않았거니와, 수도인 성도 근처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여러 대가문들과 이민족들까지 뒤섞여 있어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1년씩 자리를 비웠으니 반란이 얼마나 들끓었겠습니까. 일단 조조를 물리친 이상, 유비는 한시바삐 돌아가 익주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당시의 통신 체계입니다. 당시 형주 공방전은 변화무쌍하게 진행되면서 몇 번이나 반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주의 상황이 유비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즘처럼 무선통신이 있었다면 유비도 관우의 상황에 맞춰서 즉각 대응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간단한 명령 한 통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사람이 말과 배를 번갈아 타면서 십 수 일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익주와 형주의 움직임 사이에 많은 간극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것이 유비가 관우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유비의 의도와 관우의 행동 간의 차이입니다. 유비가 조조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미로 양번 공격을 명령했으리란 추측은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퇴각시킴으로서 그 전략적 목적은 달성되었죠. 그런데 본래 견제 정도의 의미였건만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을 박살내는 등 관우의 성과가 기대 이상으로 엄청났단 말이지요. 그러자 관우는 내친 김에 크게 공을 세워보자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간 겪어 왔던 많은 굴욕을 한꺼번에 설욕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원래대로라면 유비가 성도로 돌아오는 타이밍에 관우도 돌아와야 했지만 관우가 그리 하지 않았던 것, 이후로도 끝내 양번 함락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추측일 뿐이지만요.



  [5. 3만 명의 포로]

  우금을 격파한 관우는 삼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이 포로들을 먹여 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이쯤에서 만족하고 강릉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포로들을 무릉이나 영릉 등 후방으로 보내어 호구(戶口)를 늘리거나 혹은 병력으로 활용하였다면 관우의 형주 세력은 훨씬 강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관우가 원한 것은 양번의 함락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로 3만 명은, 실로 엄청난 이득이자 미래의 큰 재산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골칫거리일 뿐이었죠. 저 정도 규모의 포로들을 감시하려면 적어도 수천 단위의 병력을 배치해야 할 겁니다. 그렇잖아도 병력이 부족한데 말이죠. 그들을 먹이고 입히려면 그만큼 물자가 필요합니다. 그렇잖아도 미방과 사인이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건 서주대학살을 자행한 조조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비의 정치적 입지를 뿌리째 뒤흔들어 버리는 행위였을 테니까요.

  결국 곤란에 빠진 관우는 상관(湘關)의 양곡을 가져갑니다. 상관은 말하자면 유비와 손권 사이의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곳으로 보입니다. 두 세력 간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상인의 왕래를 관할하는 등의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이곳에 있었던 양곡, 아마도 손권의 소유였거나 혹은 공동 소유였던 것으로 보이는 양곡을 관우가 멋대로 가져가 버립니다. 포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요. 손권은 분노하여 관우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혹자는 이 상관의 쌀을 가져간 사건을 두고 잘잘못을 가리고자 설왕설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부차적인 문제였어요. 물론 이 행위는 부정하지 못할 관우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설령 관우가 그 쌀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도 손권은 반드시 관우를 공격했을 겁니다. 즉 이 사건은 하나의 명분이었을 뿐이지요. 손권은 처음부터 관우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고 결국 실행에 옮겼습니다.  

  

  [6. 조조의 전력 동원]

  그리고 장안으로 돌아온 조조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형주로 투입하기 시작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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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빵아 사랑해
18/09/27 13:2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선추천 후감상 기다렸습니다
야이 손제리 쥐아가야 아오....
무당벌레
18/09/27 13:27
수정 아이콘
댓글2등~ 예르~
ageofempires
18/09/27 13:43
수정 아이콘
근데 왜 관우가 불쌍하다는 걸까요. 그냥 자기 능력을 대단하다고 오판해서 무리하게 공격가다가 여러 문제점들이 다 터지면서 자멸한 걸로 보이는데요. 그냥 북벌 안했으면 잡혀 죽는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저 삼국지 연의라는 소설에 너무 감정이입해서 지나치게 촉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니쏠
18/09/27 14:04
수정 아이콘
삼국지 연의라는 소설과 인물에 감정이입 안하실거면 천년도 넘게 이전에 다른나라에서 일어난 작은 전투에 대한 글을 왜 읽고 계시나요?
ageofempires
18/09/27 14:09
수정 아이콘
동아시아사에 평소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 말인데요? 한국 고대사도 관심이 많지만 사료 부족이 심각하고 그나마 나도는 서적들도 환뽕맞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읽을만한 서적도 별로 없구요. 일본 고대사나 중국 고대사(상, 주, 춘추전국,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도 제 관심사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 삼국시대 관련 글도 이런 제 관심사 중에 하나여서 보는거지 딱히 연의에 과몰입해서 그것만 관심있어서 보는게 아닌데요. 지나치게 소설 속에 녹아든 촉한정통론이 저는 불편해서 하는 말인데 뭐가 문제라도 있나요?
지니쏠
18/09/27 14:17
수정 아이콘
글쓴분이 정성스레 쓰신 글에 엉뚱한 사람들이 싸움을 하고 있는건 예의가 아니니 길게 쓰진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주제의 어떠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지 좀 더 잘 살피고, 거기에 맞는 방식으로 이야기 하세요. 예배중인 교회에 갑자기 쳐들어가서는 진화론을 설파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에요, 그냥 난동꾼일 뿐이죠.
ageofempires
18/09/27 14:18
수정 아이콘
Pgr21이 관우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인가요?
18/09/27 14:21
수정 아이콘
촉빠도 있고 오빠도 있겠죠
근데 한가지 확실한건 남의 시선을 존중하는, 최소한 표면적으론 그런 사이트는 맞는데요
18/09/27 14:55
수정 아이콘
관우는 안불쌍하다는 새로운 글을 쓰시죠
그러면 아마 pgr21은 관우를 안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될겁니다.
18/09/27 14:17
수정 아이콘
결국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니가 불편한데 뭐 어쩌라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시각은 내 시각이고 니 시각은 니 시각이니 존중해줘도 아니고 내 시각은 이런데 니 시각은 왜 이럼? 이런 식이니 좋은 태도를 기대할 수가 없죠
물론 어그로 끄실 목적이라면 훌륭한 글입니다
18/09/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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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자체가 촉의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으니 당연한거죠. 어디 중립적이어야 할 역사책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면 모를까.
18/09/2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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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에 불운이 겹쳐서 원래 자신이 넘을 수 있었던 난관을 넘지 못했던 영웅은 고래로부터 여러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이입하기 좋은 소재거든요
ageofempires
18/09/27 14:17
수정 아이콘
전 관우가 잡혀 죽은 것이 불운에 불운이 겹쳐서 그런게 아니라 자업자득이라고 봐서 관우에 이입되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가네요. 미방, 사인의 배반만 하더라도 관우의 잘못이 크고 동맹국 군주인 손권을 모욕해서 오와의 관계도 악화시킨 고 것도 관우의 잘못이고 돌아올 타이밍을 모르고 양양과 번성 근처 포위하고 있다가 서황에게 깨지고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 잡혀 죽은 것도 관우 본인의 잘못이라고 보거든요. 불쌍하게 볼 여지가 있나 싶습니다.
18/09/27 14:19
수정 아이콘
그럼 그냥 남은 그러려니 하세요
누가 님보고 감정이입 하라고 입에 쑤셔넣은 적은 없잖아요? 근데 대체 왜 님은 엉뚱한데서 남한테 따지는지 모르겠습니다
ageofempires
18/09/27 14:21
수정 아이콘
제 첫댓글이 이 글의 본문이나 남이 쓴 댓글에 대해 따지는 댓글이었나요?

그저 관우를 왜 불쌍히 여기냐? 라는 식의 제 감상이었을 뿐입니다. 이 댓글에 불편해 하는 분들이 많을 뿐이구요.
18/09/27 14:25
수정 아이콘
불편하라고 쓴 덧글이 아니었으면 정말 못쓴 글이고 파이어 나라고 쓴 글이라면 합격점입니다
글 쓰는 법을 배우라고 해야 할지 어그로 그만 끌라고 할지 잘 모르겠는데 뭐 필요한 대로 받아들이세요
ageofempires
18/09/27 14:27
수정 아이콘
둘 다 아니고 그저 제 감상을 말했을 뿐입니다. 제가 쓴 첫 댓글에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죠.
18/09/27 14:31
수정 아이콘
그래요 뭐 그럼 내츄럴 본...이라고 정리하죠
악의없이 분탕을 만드는 능력이야(실제로 그런건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인터넷에선 흔한 거니까요
좋은 하루 되세요
StayAway
18/09/27 14:44
수정 아이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만한 사람은 별 매력이 없죠. 오히려 모난 성격이 감정이입은 더 잘 되기 마련이죠.
관우는 누가봐도 자부심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지만, 패기가 넘치고 의로운 호걸의 상징 같은 인물이니까 팬이 많은게 당연합니다.
인물평이야 각자 마음속으로 하면 되는거고 어차피 정답은 없는 거지만
굳이 하나 오답을 찾자면 내가 맞고 니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루크레티아
18/09/27 14:53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사항은 지금을 사는 지극히 안정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관점이고요.

당시 관우나 유, 조, 손의 입장은 결국 본인들이 천하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승산이 있다고 보면 바로 상대를 쳐서 이겨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본인이 양번에 싸움을 걸지 않았다면 언젠가 오에서 쳐들어왔겠죠. 여몽이나 육손이 들인 공을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조인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오히려 양방치기 당해서 있는 땅을 빼앗기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을 겁니다. 글쓴분이 먼저 쓰신 글들을 읽으셨다면 관우가 싸움을 건 이유를 당연히 잘 아시리라 봅니다.
ageofempires
18/09/27 14:59
수정 아이콘
(수정됨) 관우가 싸움을 건 자체는 그럴만 하다고 보는데 유비가 같이 한중 방면에서 관중으로 치고나가며 양방을 동시에 공격하는게 아니면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유비가 촉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이걸 알았다면 당연히 관우도 후퇴했어야 합니다. 유비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혼자 북벌을 했으면 당연히 관우의 실책입니다. 유비가 조조의 군사를 분산시켜야 그나마 할만한데 유비가 오히려 돌아갔다면 조조의 정예 장수와 정예 군이 관우 잡으러 쏠릴 건 뻔할 뻔자니까요.
Chandler
18/09/27 15:08
수정 아이콘
저시절의 전쟁이 스타크래프트는 아니니깐요.

뭐 역사는 결국 결과론인건 맞고 관우가 실책을 했으니 진거겟죠. 잘했으면 이겼을꺼고.

그럼에도 역대 중국인들+동아시안들이 가장 많은 감정이입을 해온 인물이라는것은 부정할 수 없고 그럴만한 요소가 많은 인물이죠. 승자만 기억할거면 삼국지의 진 주인공은 사마씨겠죠 크
루크레티아
18/09/27 15:14
수정 아이콘
싸움을 건 자체는 그럴만하다 보는데 후퇴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말씀하신 싸움을 걸 만한 상황이라면 승산이 높은 상태이고 그럴 땐 즉각적으로 걸어서 이겨야 하는 것이 당시 상황입니다. 그리고 관우가 싸움을 건 시기는 조조가 한중에서 깨지던 시기이고 유비의 성도 귀환에 대해서 본문에서 적어두셨지만 유비의 성도 귀환과는 별개로 이미 우금의 군대를 대파한 시점에서 양번 함락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아니면 위의 원군을 맞아서 대치가 길어지고 물러났거나요.

오의 배신만 없었다면요.

오의 상태를 두고 경계했어야 한다고 보기에는 이미 익양대치를 통해서 서로간의 합의가 된 상황이고 명목 상의 동맹군인 오를 두고 상당한 힘을 쏟아 경계해야 한다? 오와 대판 싸운 이후라면 모를까 조약을 통해서 영토 갈라먹기까지 합의가 된 마당에 전면전을 벌여야 마땅한 위를 두고 어떻게 오 방향으로 힘을 쏟습니까.
ageofempires
18/09/27 15:26
수정 아이콘
손권이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들이.형주를 공격할테니 비밀로 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이 사실을 동소가 편지를 써서 번성안과 관우군에게 쏘았고 결국 손권이 형주를 공격하리라는 걸 관우도 알게 됩니다.

전 이때 당연히 후퇴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루크레티아
18/09/27 15:31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사항을 두고 자신들을 물러나게 할 허장정세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가 없죠. 그 편지만으로 후퇴를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코우사카 호노카
18/09/27 13:54
수정 아이콘
(3)에서 관우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끝난거 아니었습니까 ㅠㅠ
홍승식
18/09/27 13:54
수정 아이콘
유비가 한중을 먹고 조조와 손권이 손을 잡은 이상 관우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관우가 유비가 성도로 돌아왔을 때에 맞춰서 형주로 돌아왔어도 손권은 뒤치기를 했었을 거 같아요.
유비는 명분상 형주를 손오에게 빌린 상태였는데, 익주를 먹는 것을 넘어서 한중까지 차지했으니 형주를 넘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관우가 철수를 했다고 해도 결국 형주는 넘기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크템플러
18/09/27 13:55
수정 아이콘
여기서부턴 DLC 가상 시나리오인가요?
파이리
18/09/27 13:57
수정 아이콘
무 신 관 우
서현12
18/09/27 14:01
수정 아이콘
유비가 돌아가서 객사와 보루를 성도부터 한중까지 지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유비는 내정을 다져야 할 타이밍으로 본거 같습니다. 관우도 이에 맞추어서 강릉으로 돌아갔다면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당장 눈앞의 공이 이뤄진다고 생각하니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겠죠.

어쨌든 저는 관우가 3만 포로를 잡고도 그들을 먹여살린것을 정말 관우다운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18/09/27 14:03
수정 아이콘
아. 이 말이 진짜 와 닿네요. 맞습니다. '관우다운 행동'이었죠. 관우라는 인물의 머리 속에 다른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8/09/27 20:15
수정 아이콘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창천항로 마지막에 보면 관우를 의의 화신으로 표현하는데 관우는그런 사람이죠 그게 그의 현실적 굴레였고 그 굴레를 짊어짐으로써 신이 된 거겠죠
링크의전설
18/09/27 14:28
수정 아이콘
저도 그 부분이 답답하면서도 참 멋있네요
그래서 아직까지 인기가 많은거겠죠 단점도 확실하지만 그걸 뛰어넘을 만큼 아득한 인간미
비연회상
18/09/27 14:23
수정 아이콘
3만명의 포로... 몰살...을 순간적으로 떠올린 저는 관우보다도 더 고대인적(?) 사고를 한 것일까요;
ageofempires
18/09/27 14:31
수정 아이콘
항우가 잡은 포로들과 저항한 성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을 밥먹듯이 생매장하다가 민심 이반으로 죽었죠.

반면에 동시대의 조조는 포로들 다 죽이기도 한 만큼 당시에도 포로 죽이는 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식량 사정에 큰 차질이 생길 경우 고려는 해볼 카드는 맞았던 것 같습니다. 풀어주면 바로 적군에 합류해서 적으로 돌아올테니 이것도 문제구요.
해피바스
18/09/27 15:09
수정 아이콘
관우가 생각외로 전과를 너무 거둬서 오버페이스를 낸것도 문제가 되었었나 보네요
그냥 칠로군을 박살낸 후 포로협상으로 시간 좀 끌고 남쪽의 손제리가 뒤치기 못하도록 잘 지켜서 본진의 유비가 정비될 때까지 기다렸으면 좋았을텐데요
Mr.Doctor
18/09/27 15:15
수정 아이콘
관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있는데 그걸 오판한 것이 결정타였다고 봐야겠네요. 유비가 성도로 돌아갈 때 관우도 포로들 끌고 강릉으로 개선하였다면 안정적으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겠죠.
개발괴발
18/09/27 15: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이게 유비와 촉의 문제라면 문제일텐데

전군동원->도박수->대박or쪽박 전략을 언제나 쓰고 있습니다.

서주로 구원갈 때도 전군을 들어서 평원현을 비우고 Go서주
원술을 치러갈 때도 전군을 들어서 서주를 비우고 Go수춘
장판 후퇴때에도 전군을 들어서 신야/형주를 비우고 Go강하

그나마 형주에서 어느정도 기반을 쌓고 형남사군 정벌 때는 좀 힘배분 하나 싶더니...
처음으로 친정 전군 돌격이 아니었던 익주 점령전에서는 병이 부족해서 또 형주 군사를 모두 빼서 Go익주
한중 공방전때도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익주를 놔두고 전군을 뽑아서 Go한중
장엄한 마지막인 Go이릉은 그말싫...


그게 유비 집단의 성격적인 부분(협객 출신)도 있는거 같고,
한 고조를 따라하겠다는 그런 부분같은게 있나 싶기도 하고,
라이벌이 조조라서 가지는 약간의 컴플렉스? 같은거도 있는거 같고 그래요.

사실 이렇게 전군을 뽑아서 돌아댕기는 영웅이다보니 소설화시키면 참 재미있기는 하지요 =_=
- 진한/위진 이후의 중국 천통스토리(수/당/송/원/명/청/중공)를 아무리 소설로 만들어도 장사가 안되는 이유들 중 하나가
이런 "몰빵올인"-바꿔 말해서 모 아니면 도 같은 도박수의 매력이 없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 사실 중공은 완전히 객관화하고 보면 재미있을거 같기는 하지만... 너무 현대인데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엮여있어서 좀...
동굴곰
18/09/27 16:18
수정 아이콘
그렇게라도 안하면 상대할 체력이 안되서가 아닐까요.
이릉은 좀 너무한거같긴 하지만...
개발괴발
18/09/27 16:26
수정 아이콘
사실 "버거운 적과는 적당히 맞춰준다." 라는 선택지도 있었습니다 =_=

서량의 마등, 익주의 유장, 강동의 손권처럼,
조조와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지내는 방법도 있었지요.
- 마등은 아들놈 때문에 산통 다 깨지긴 했습니다만...

하지만 유비는 반동탁 연합군 이후로, 정확히는 서주 학살전 이후로 사실상 단 한번도 조조와 타협한 적이 없었습니다 =_=
- 여포에 쫓겨서 조조 밑으로 간거도 힘이 안되서 그런거지 계속 뒤통수 노리고 있었죠. 조조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절대악 조조에 맞서 싸우는 유비"라는 각으로 소설 소재가 빛을 발한다고는 생각합니다.
18/09/27 23:24
수정 아이콘
유비의 목표는 한고제 유방이 되는 것이었죠. 그랬기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흑마법사
18/09/27 15:56
수정 아이콘
(수정됨) 3만명의 포로 처우가 쉽지가 않았겠죠. 해방시키면 고스란히 다시 적군이 되버리고, 전부 죽여버리자니 민심도 민심이거니와 자칫하면 적군이 분기탱천하여 형세가 역전됐을 수도 있구요. 안 그래도 번성 함락에 차질이 생겨서 후방에 있는 병사들도 끌어모은 판국에 3만명의 포로를 데리고 있던게 어쩌면 관우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관우다운 선택이었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있구요.

윗댓글에도 있지만 관우가 기세를 잡은 뒤에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것이 컸다고 봅니다. 물론 관우가 본문에 나온 모든 뒤통수 맞은 상황을 예상했겠냐만은 관우의 상황이 마냥 좋다고 보긴 힘들었다고 보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유비가 성도로 귀환했을 때 관우도 철수하여 3만명의 포로 처우도 천천히 결정하고, 후방의 상황도 다듬을 시간을 가졌어야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삼국지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관도 대전이랑 형주 공방전인데 참.. 생각할수록 손제리 네이놈...
18/09/27 23:26
수정 아이콘
득롱망촉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긴 광무제조차 자신의 말과는 정반대로 끝까지 GO를 외쳤던 것으로 볼 때, 그 적당히...라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일 듯싶습니다.
18/09/27 16:11
수정 아이콘
하지만 관우는 모든 난관을 이겨냅니다.

미방과 사인을 회유하고,
유봉과 맹달을 화해시키고,
촉나라 본진에서 지원을 받고,

손제리 공격을 완파하여, 형주남부까지 100% 정복하고
북진하여 조조 본대를 격퇴하여 낙양까지 점령하여 촉나라 통일 기반을 구축합니다!

- 버츄얼 삼국지 -
파이리
18/09/27 17:05
수정 아이콘
무 신 관 우
18/09/27 16:14
수정 아이콘
돌아와서 형주를 방비했다면 장료조차 어찌하지 못한 쥐가놈이 형주를 뺏을 수 있었을까요. 안타깝네요.
18/09/27 23:27
수정 아이콘
관우가 잠자는 사이에 미방이 성문을 열어주는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관우가 지키는 강릉을 빼앗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kicaesar
18/09/27 16:20
수정 아이콘
손권에게 손제리라는 별칭을 붙여준 사건으로 봅니다......

어릴때 공명전 하다가 관우 사망할때 얼마나 슬프던지 ㅠㅠ
La La Land
18/09/27 16:55
수정 아이콘
그래서 조조전할떄 첫루트가 가상이었습니다 저는
다크템플러
18/09/27 16:44
수정 아이콘
제 기억에 전략삼국지의 경우 서주vs형주에서 서주는 평야라 언제든먹을수있으니 형주를 쳐야한다! 이런식으로 오에서 결론을 내렸었는데
물론 합비도 못뚫으면서 뭔 근자감인가싶지만... 합비/서주쪽에 진군하는것에 비해 형주를 차지하는건 어떤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나요?
18/09/27 23:29
수정 아이콘
여몽은 장강을 이용한 긴 방어선을 구축하기를 원했습니다.
여몽전에 기록된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여몽이 은밀히 계책을 진언하길
"정로장군(征虜將軍; 손교(孫皎))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潘璋)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 장흠(蔣欽)은 유격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여 그렇게 된다면, 조조에 대해 걱정할 게 무어며 관우에게 힘입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관우는 신하인데 사기와 힘을 존숭하여 거꾸로 뒤엎는 것(反覆)이 있으니, 마음깊이(腹心)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관우가 바로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께서 성명(聖明)하고 저희 등이 있기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강하고 성할 때 도모하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엎어질 것이니, 다시 힘을 펴고자 해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 했다. 손권이 마음 깊이 그 계책을 받아들였는데, 또 애오라지 다시 그와 서주를 취할 뜻을 의논하였더니, 여몽이 대답하길
"지금 조조는 멀리 북방에 있어, 새로이 여러 원씨(袁氏)를 격파해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위무하고 안집(安集)하느라 동쪽(동오)으로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서주 땅의 수비병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세가 육지와 통하고, 날랜 기병이 달리는 곳이라, 지존께서 지금 서주를 얻는다 할지라도 조조가 후일 반드시 와서 쟁패를 벌일 것이고, 비록 7~8만 명으로 수비한다 해도, 오히려 응당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를 취해 장강을 모두 점거하여 형세를 더욱 늘릴 만 못합니다"
라 했다. 손권은 이 말이 더욱 옳다고 여겼다.]
18/09/27 16:51
수정 아이콘
제가 관우를 높게 보지 못하는 이유....
축구로 치면 지단 느낌. 분명 대단하지만 현재 받는 위상과 실력의 괴리가 느껴진달까...
차라리 홍수가 일어나지 않아서 대승이 아니였더라면... 하늘이 촉을 살린건지 죽인건지 모르겠네요..
bemanner
18/09/27 16:56
수정 아이콘
어차피 형주 3군으로는 위오가 대놓고 협공하면 막을 수가 없으니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양번을 먹어서 양양-강릉에 의존해 방어를 하는게 그나마 남은 가능성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난이도가 너무 높은 타임어택이라 실제로는 실패했지만요.
미하라
18/09/27 18:14
수정 아이콘
저는 이게 여몽에게 가장 의문을 가지는 부분인데 당시 양번은 위가 통치하고 있던 지역인데 관우 타도를 위해 위와 연합을 하는 상황에서 양번을 뺐는게 어떻게 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런 플랜을 구상했는지가 궁금합니다. 플랜을 짠 여몽이 형주 공방 이후 갑작스럽게 죽어버려서 그 의도조차 알수 없게 되어버렸지만요.
어제의눈물
18/09/27 17:34
수정 아이콘
중국사 전체를 봐도 함락 난이도 끝판왕급인 양양의 함락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미방이 못미덥고, 여몽이 없다해도 오가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의형은 당분간 자신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양양이란 열매는 너무나 달콤해보였을 거 같아요.
경계하던 여몽도 없고 우금의 원군도 박살냈는데 타임어택만 성공하면 강릉과 무릉에 의지하던 반쪽짜리 형주를 크게 키우고 유비군에게 안정감을 더해줄 수 있다고 판단했겠죠. 관우의 생각보다 조조의 움직임은 빨랐고 설치류의 탐욕이 컸을 뿐...
18/09/27 23:31
수정 아이콘
관우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모 아니면 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도박으로 끝났지요. 성공했더라면 정말로 좋았겠지만요.
18/09/27 21:08
수정 아이콘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관우가 양양 공격에 성공하고 유비가 이후 친정으로 낙양을 함락시켰다면 우리는 관우를 무신으로 기억하진 않았겠죠. 드라마는 비극이 제맛입니다.
도달자
18/09/27 23:09
수정 아이콘
맞는 말씀입니다. 천하를 진동시킨 촉의 상장의 부지불식간의 몰락, 복수에 미쳐날뛰는 동생의 어처구니없는 횡사,꿈도 미래도 같이 불타는 이릉..
이세계로떠나는 남만여행, 그 남자의 출사표, 산이있기에오르는 산악인, 가을바람부는 오장원
정말 낭만 그 자체인 비극이에요.. 엉엉
18/09/27 23:33
수정 아이콘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사람들은 완전무결한 영웅의 승리담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가 고난을 극복하다 결국 실패하고 마는 이야기를 더욱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희극보다 비극이 더 오래도록 남기 마련이듯.
껀후이
18/09/28 06:26
수정 아이콘
글 추천합니다
지난 번 가졌던 유비는 왜 회군하였는가 에 대한 의문점은 덕분에 해소되었으나, 더 큰 마음의 짐이...아 관공이여...!
폰독수리
18/09/28 11:55
수정 아이콘
양번 함락에 현혹되서 못먹어도 고를 한건지 원래 관우의 성정과 능력이 그정도였던건지 모르겠네요
18/09/28 13:04
수정 아이콘
이 글을 보다보면 이성계가 요동 뒤집어 엎다가 죽었으면(이성계급 장군이 아무거도 못하고 죽었을거 같진 않습니다.) 한국사 역대 원탑 레전드 장군이 됐을거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돌아와서 성공했기에 평범한 왕이 되어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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