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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9/05 06:25:42
Name 슬픈운명
Subject [일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새벽 두 시. 이불 안에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확인한 시간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어제 낮에 마셨던 밀크티가 원흉인지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 잠들어 있을 새벽에도 나는 깨어 있다. 평소 뇌 신경에 장애를 안고 있어서 술담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흔히 마시는 커피조차도 입에 대지 않던 나였다. 그런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밀크티가 마시고 싶어졌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다. 강제로 잠을 청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이불을 박차고 나와서 컴퓨터를 틀었다. 그리고는 삐걱 소리가 나는 내 데스크 의자에 앉아서 등에 편히 기대고 두서없는 넋두리를 기계식 키보드로 쓰고 있다.

 예전의 나였으면 이불에 더 파묻혀서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또한 옆방에서 주무시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데스크 의자의 소음이 나지 않도록 등에 기대지도 않고 키보드 소음도 나지 않도록 컴퓨터조차 틀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가지 행위다. 하지만 이 두가지 행위는 나에게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한 가지 공통된 심리에서 나오는 행위였다.

바로 완벽주의였다.

지금이라도 빨리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공부를 못할 정도로 피곤할 거야. 내가 지금 시간에 조금이라도 컴퓨터를 사용하면 어머니가 못 주무실 거야. 전자는 ‘조금이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론이었고 후자는 ‘조금이라도 가족을 위해서’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론이었다. 어느 쪽이든 ‘조금이라도’라는 전제는 곧 한 치의 결점도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완벽한’ 생활은 돌이켜보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 계획표를 세울 때 24시간 중 자고 먹는 등의 최소한의 생리 활동에 할당할 10시간을 제외하고 14시간을 공부로만 채우지를 않나, 학원버스가 혹시나 나를 놓치고 갈까 봐 버스 오는 시간의 40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지를 않나, 우리 집 아파트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면 혹시나 도둑이라도 들까 봐 원래 가기로 한 목적지에 가기도 전에 집 문이 잠겼는지 아파트 1층에서 내 집 층수까지 엘리베이터를 5번 이상 타면서 확인해보는 등…. 이런 생활을 20년 넘게 해왔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아니, 나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엄청나게 내향적이던 성격에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따돌림당하기 일쑤였던 처참한 인간관계는 나 자신을 미친 듯이 괴롭혔다. 이 따돌림 속에서 나 자신을 방어해내기 위해 나는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이 필요했고, 그 관심을 받기 위한 수단이 잘 나오는 성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공부한 결실이 초등학생 동안에는 잠깐 꽃 피는 듯 했고 실제로 초등학교 다니는 기간 내내 잘하면 전교 1등, 못해도 반 1등은 놓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동기로는 오래 못 간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중학생이 되기 무섭게 내 성적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고등학생 때는 인서울조차 꿈도 못 꾸는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내 절망과 고통은 불 보듯 뻔했다. 자살 생각이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먼지로 되어버렸으면 하는 소원을 끝없이 빌게 되었다.

이 고통을 겪으면서 나는 ‘두고 봐라....’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공부에 집착하게 되었고, 이것이 점점 굳어지면서 ‘완벽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극단적인 완벽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작 그와는 반대로 내 마음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게임에 쏠리게 되었고, 당연히 실제로 공부하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어 버렸다. 성적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성적이 악화되면 더욱 게임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성적은 더 줄고, 그런 식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은 너무 반복되다 보니 나조차도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온 ‘완벽한’ 생활은 어느 순간 허무하게 깨졌다.

대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난 뒤의 나는 과장 좀 보태서 시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해서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려고 했다가는 정말로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학교가 도살장처럼 느껴졌다. 아예 이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자퇴를 주장했지만, 내 가족들이 말리고 말려서 간신히 휴학으로 합의를 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토록 하려고 했던 공부를 내던지고 내가 스스로 자퇴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내가 왜 고통스러워했을까? 그 이유를 깨닫고자 그동안의 맹목적인 갈망을 잠시 내려놓고 내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에 얽힌 감정,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또한 그 생각이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생각인지 눈을 돌리게 되었다.

사실 이 과정을 처음 시도했던 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결론을 낼 수가 없었고, 또한 수험생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갈망을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었기에 눈치를 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험생의 신분에서 해방된 이후 ‘대학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된다!’라는 마인드를 갖고 대학 생활을 했지만 정작 고통은 그대로였다. 학창시절과는 다르게, 아웃사이더일지언정 따돌림당하지는 않았기에 예전보다는 고통이 훨씬 덜해지리라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고통은 옛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내가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고통이 극심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나는 뭔가 나 자신이 근본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휴학을 하고서 9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안 했을 생각이지만, 내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면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그 안 보이는 것이 해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오던 방식하고 180도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리석은 방법일지도 몰랐지만, 그동안 집착해오던 공부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일부러 나태하게 지냈다. 대신 완전히 아무것도 안 하지는 않고 제빵을 배워보는 등 그동안 안 해본 경험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 대한 관찰과 통찰을 끝없이 했다.

그렇게 9개월을 보냈다.

오싹하게도 지금껏 관찰해온 나 자신은 굉장히 위험했다. 나는 나 자신이 완벽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완벽주의를 ‘가족이나 주변인에게까지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생각을 못 했었다. 알게 모르게 내 마음속에 가족이나 주변인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 있었고, 그 기대치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나에게는 극도의 고통이 밀려오고, 그 고통은 극심한 분노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금껏 학창시절에 받아왔던 고통도 알고 보면 실제로는 생각보다 사소한 것일수도 있다는 추측도 가능했다.

 결국 나는 내 완벽주의를 자각하고 비로소 내려놓게 되었다.

 평소에 공부에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놀고 싶은 욕망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일부러 만점만을 바라던 학점도 최대 70퍼센트의 성취만을 하도록 스스로 타협했다. 예전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반드시 들어야 했던 잠자리도 일부러 들지 않고 놀았다. 평소에 마시지 않던 카페인도 마셨다. 내가 필요하다면 스스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일부러 타인에게 신세 지는 것도 요즘에는 연습하는 중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연습도 하고 있다. 한 25년 만에 완벽주의를 드디어 내려놓았다.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는 걸까. 예전의 고통에 신음하던 나는 마법처럼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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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살이
18/09/05 08:50
수정 아이콘
추천.
깨닫고 완벽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군요.

제 주변에 완벽을 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제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겁니다. 지금도 서로를 바라보면 마찬가지 일거구요.

주어진 시간 100, 노력 100, 완성도 100, 만족도 100 이라는 조건일때
시간 100, 노력 100, 완성도 99 라고 하더라도 주관적 만족도가 50인 사람이 있고
시간 60, 노력 60, 완성도 60 라고 하더라도 주관적 만족도 60인 사람도 있는겁니다.

어디서 들은 말 같은데.. '미완성의 완벽보다 모자란 완성이 낫다' 였던가.. 여튼 의미전달이 그렇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픈운명
18/09/05 09: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제가 완벽주의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것을 고치고자 마음 먹은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특히 제가 완벽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을 확신한 것은 한 달도 안됐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것이 완벽주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됬다는 사실을 일단은 눈치만 채면 근시일 내에 그 잘못된 상황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한달살이
18/09/05 11:44
수정 아이콘
알고도 바뀌지 못하고, 원인을 아는데도 고치지 못하는 것도 주변에 널렸습니다.
인지하고 바꾸는 중이라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이라고 보입니다. 힘내세요.

생각이 바뀌고, 시점이 바뀌면 주변에도 재미난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체리과즙상나연찡
18/09/05 10:11
수정 아이콘
스스로 극복하신거 같아 다행이지만 사실은 정신과적인 상담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슬픈운명
18/09/05 11:03
수정 아이콘
본문에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정신과에 다닌지 꽤 됐습니다. 올해 10년 정도 접어들었네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계속 먹고 있고 정신과 외에도 심리상담도 수없이 받았습니다. 제가 만난 정신과 전문의들 모두 (커리어 상으로나, 실력으로나)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고요. 사실 10년 동안 다니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정신과 전문의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환자를 24시간 계속 관찰을 하는 게 아닌 이상 환자의 상태를 환자 본인보다 더 잘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 전공이 보건의료 쪽이라 수업시간에 주워 들은 내용인데, 통계상으로 의사가 올바른 진단을 내리는 비율은 전체의 75퍼센트(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안나지만 대충 이 정도로 기억합니다)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그 75퍼센트 마저도 다른 의사들이 같은 유방암을 진단한다고 치면 어떤 의사는 조기발견이라 판단하고, 또 다른 의사는 3기 이상의 심각한 수준의 유방암이라고 판단하는 식이라 실제로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비율은 더욱 떨어지고요. 자세한 진단결과라던지, 내리는 처방이라던지 의사들끼리 완전히 동일한 진단을 내리는 경우 자체가 굉장히 드뭅니다. 괜히 어른들이 큰병 나면 병원을 한 군데만 다니지 않고 여러 군데를 다니는 게 아닙니다. 교차검증이 필요하니까요.
연필깍이
18/09/05 15:25
수정 아이콘
글에서 느껴지는건 완벽주의라기 보단 완벽에 대한 강박 같네요.
극복하셨다고하니(혹은 극복 중이시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Minkypapa
18/09/05 16:54
수정 아이콘
앞만보고 열심히 달려가다보면 젊은이는 '번아웃'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시점이 매우 중요한데, 결국에는 다시 달려나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건 바람직한데, 실제로는 목표가 없이 무조건 열심히 사는게 더 위험해요.
인생에서 자기가 가고싶은 방향만 적절히 잡아주면, 천천히 나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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