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6/29 20:28:58
Name 전자수도승
Subject [일반] 안양 가는 길
밤새 달린 것 치고는 정신이 생각보다는 제법 말짱했다. 안 달리던 놈이 달린다고 걱정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무색하게도 말이지. 다만 세상이 나를 빼고는 모두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태양이 도니까 푸르스름하게 새벽이 오고, 지구가 도니까 개찰구까지 걸어가는데 5번은 넘어졌다. 까인 얼굴과 깨진 무릎이라는 상황은 인지했지만 묘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삐빅, 하는 소리로 개찰구를 통과한 다음 계단이란 이름의 언덕은 무슨 정신으로 넘어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지하철이 오자 행선지는 보지도 않고 잡아탔다. 첫차 탑승자의 특권이라면 누가 뭐라 해도 좌석에 그대로 눕는 것이라. 누가 LTE 세대 아니랄까봐 말짱한 줄 알았던 정신은 머리가 닿는 즉시 암전됐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디 평범한 꽐라 대학생의 지하철 진상 짓이겠지만, 그래도 이 사실을 굳이 이렇게 일기에 적는 이유는 거기서 꾼 꿈이 하도 생생하고 또 요상해서이다. 꿈속에서 나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젠장, 꿈속에서조차 말이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게 나쁘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유럽스러운 어느 나라의 의대생이었기 때문이다. 의느님, 아아 의느님. 덕분에 꿈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지만. 다만 문제가 있었다. 시대가 요상했다. 아무래도 의사를 지망하는 사람이니 만큼 허구한 날 보는 것이 사람 죽는 꼴이었다. 그러니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같았는데, 죽는 이유가 좀 더 고전적이었다. 아니, 전 근대적이라는 표현이 옳았을까? 확실한건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고 수혈도 없이 피를 한 바가지를 뽑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따라다니는 불행은 내게 꿈에서조차 요상한 아르바이트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밤중에 근교의 공동묘지에 가서 생긴 지 얼마 안 된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팔아먹는 짓 말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거 한 10 번만 하면 이번 달에는 월세를 낼 수 있겠지.’ 라는 죄책감 제로의 무책임한 즐거움만 떠올리면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불쾌감은 그저 군대 - 어째서인지 군대에 관한 기억은 이 18세기스러운 세계관에서조차 변하질 않았다 - 에서 했던 삽질을 꿈에서조차 한다는 부분에서만 치밀어 올랐다.
툭, 하고 삽 끝이 관에 닿는 소리가 들리고, 남은 흙을 정리하고 나니 소도둑놈같이 생긴 시체장사들이 관짝을 열어 시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흠칫 놀랄 만도 하건만, 나나 그쪽이나 익숙해서인지 별 말 없이 액수만 불렀다. 액수가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그렇게 좋은 값은 아니기에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너 이새끼, 니 선배들까지 엮어서 인생 조져주랴?’ 그래봐야 그쪽은 갑이고, 이쪽은 을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새벽 내내 파헤친 것으로는 사나흘 먹을거리만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돌아오던 길에 소매치기 당했다. 난생 처음 화가 나서 잠에서 깼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화를 낼 차례였다.

"다음 역은 소사, 소사역입니다."

젠장

------------
물론 실화는 아닙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6/29 22:36
수정 아이콘
왜 항상 신도림에서는 인천행 열차만 오는 느낌인지..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8094 [일반] 다스뵈이다 30회 사기꾼들 그리고 작전세력 [41] 히야시12671 18/09/02 12671 14
78086 [일반] 어느 냉면집의 쓸쓸한 폐업 [64] 말다했죠17613 18/08/31 17613 54
77964 [일반] 윤리의 본질(종교에 관한 오래된 생각) [22] 평범을지향5359 18/08/22 5359 5
77819 [일반] 대형마트에서 계산전 취식행동은 진상일까요? [428] B와D사이의C22772 18/08/06 22772 2
77748 [일반] [뉴스 모음] No.190. 장성들의 이례적인 '충성' 경례 외 [16] The xian11678 18/07/29 11678 26
77671 [일반] [뉴스 모음] No.189. '위법'을 '정치적 논란'이라고 말하는 썩은 언론들 외 [14] The xian8937 18/07/21 8937 30
77572 [일반] “시체 가라앉히는 것도 장례”…기무사, 세월호 ‘수장’까지 제안 [49] Multivitamin10725 18/07/12 10725 12
77548 [일반] (납량특집) 군대 영창에서 겪은 일. 2부 완결 [23] 위버멘쉬10535 18/07/09 10535 23
77543 [일반] [뉴스 모음] No.186. 기무사입니까, 심부름센터입니까, 조직폭력배입니까? 외 [12] The xian10077 18/07/09 10077 35
77512 [일반]  [뉴스 모음] No.185. 손이 아니라 목을 씻어야 할 기무사령부 [21] The xian12071 18/07/06 12071 35
77458 [일반] [뉴스 모음] No.184. 중앙일보의 걸레 같은 결례 지적 [20] The xian10638 18/06/30 10638 27
77441 [일반] 안양 가는 길 [1] 전자수도승3857 18/06/29 3857 2
77079 [일반] 전참시 징계가 발표되었습니다. [192] 길갈20321 18/05/24 20321 0
76984 [일반] MBC 전참시 진상조사위 결과 발표 [118] 길갈13126 18/05/16 13126 6
76936 [일반]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새로운 취재결과가 나왔습니다. [44] Jedi Woon19487 18/05/12 19487 2
76848 [일반] 육아 커뮤니케이션. [29] 켈로그김9105 18/05/02 9105 30
76702 [일반] 아내가 내게 해준 말. [35] 켈로그김11245 18/04/19 11245 43
76676 [일반] 그들은 여전하다 [26] The xian8358 18/04/18 8358 51
76660 [일반] [뉴스 모음] 세월호 4주기 관련 소식 외 [12] The xian10921 18/04/16 10921 46
76625 [일반] 세월호 선조위, 세월호 침몰원인으로 외부충격요인 가능성 제기 및 정식조사 [121] 염력 천만16039 18/04/13 16039 4
76584 [일반] [뉴스 모음] '팩폭'당한 뉴스룸, '조선'한 조선일보 외 [51] The xian17865 18/04/11 17865 63
76506 [일반] [뉴스 모음] 이미 예상했던 그 분의 출마 외 [25] The xian17346 18/04/06 17346 52
76425 [일반] 모 패스트푸드점에서 30분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80] HALU14555 18/03/31 14555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