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게 울리는 알람을 끄면서 눈을 비볐다. 자기 전에 휴대폰을 너무 오래 만졌나, 눈 안이 뻑뻑하다. 온몸에 묻어 있는 잠을 떨쳐내며 이불을 걷었다. 인공눈물을 어디 뒀더라. 손만 넣은 채로 가방을 뒤적여봤는데 잡히는 게 없다. 책상 어디에 있겠지, 하며 털썩 의자에 앉아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멍청하게 시선을 던지다 책상 위에 달력이 3월에 멈춰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언제 5월이 됐지. 자그마한 숫자들을 쳐다보다 이내 집어 들고 한 장씩 넘겼다. 3월, 4월, 그리고 5월. 오늘은... 3일 하고도 목요일. 달력을 집어 든 자리에 인공눈물이 눈에 띄어 양 눈에 찔끔 넣고 나니 한결 편하다.
눈앞이 희끗희끗해지면서 다시 잠이 밀려온다. 올해도 벌써 5월이라니, 죽네 사네 호들갑을 떨며 살았는데 지나고 나면 그냥 휙 넘겨 버릴 날들이었구나.
지겹도록 반복하는 출퇴근, 그 속의 파편화된 관계. 때때로 만난 친구. 형, 동생, 누나들.
나도 잊을 나의 순간. 그렇게 웃거나 울면서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니 소로록 참 빠르기도 하다. 시계를 보고 조금 더 멍청하게 앉아있기로 했다.
커피 한 잔 마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엉덩이를 뗄 자신이 없다. 모닝커피를 포기하기로 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윙 하고 바람이 창밖을 두들긴다.
나는 눈을 감고 얕게 한숨을 두어 번 내뱉었다.
한숨의 이유는 다채롭지만, 따져보자면 아직도 가끔 니 생각이 난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다. 단조로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추억은 대체로 어떤 순간이나 표정에 멈춰 있다. 헤어진 처음에는 잘못한 기억만 떠올랐다. 괴로움에 자책도 하고, 엉엉 울며 후회도 하고 그랬다. 종종 술도 마셨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났는데, 점차 추억에 깊이가 생겼다. 8개월째인 지금은 시답잖은 농담까지 다 기억이 난다. 아주 선명하게.
이제 무덤덤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될 것을 몰랐던 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빤히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찌질한 놈인지, 얼마나 오랫동안 음울하게 있을 것인지를 참 깊게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이별을 도통 납득할 수 없었겠지.
꼭 내가 찌질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의 도리질에는 분명 그런 이유도 있었을 거야.
그때 내가 말한 ‘오래’를 너는 얼마쯤이라고 생각했을까. 두어 달. 아니 일 년쯤. 혹은 그보다 더 길었을까.
그 순간. 우리의 이별을 아주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던 그때. 나의 말투와 표정과 울음도, 어쩌면 전혀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이런 망상이나 해보고 있다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니 목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별하는 순간부터 억지를 쓰며 나를 떨쳐내려고 노력했으니, 너로서는 잘된 일이겠다. 좋겠다. 부럽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질 모르겠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베개 옆에 뒤집어진 휴대폰과 눈이 마주쳤다.
한두 걸음이면 될 텐데 가지러 갈 자신이 없다. 왜 이리 졸릴까.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몇 없다.
너 없이도 크리스마스란 게 왔었고, 너의 생일이 지나갔고. 봄꽃이 하늘 하게 피었다 금방 지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의 기념일이다. 무려 다섯 번째의. 오늘은 나에게 있어 무슨 의미일까. 누구로서의 우리가 무엇을 기념하는 걸까.
한때 함께였다는 것 말고, 무엇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글쎄, 막막한 의문이다. 나는 의문 속에서 새삼스럽게 이별을 되새김질한다.
달력에 표시되지 않는 날. 기억하지 않아도 채록되는 일. 이제는 5월 하고도 3일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내년이나 내후년에 맞이할 5월 3일도 똑같을까. 그렇게 몇 해의 세월이 지나며 5월 3일은 영영 나에게 따끔한 날이 된걸까.
삐져나오는 생각들 한 줄 씩 써내리다가 이내 지워 버린게 몇 번이던지, 오늘만큼은 날짜를 핑계 삼아 구구절절 읍소해보고 싶어진다.
저와 걔는 이렇게 저렇게 만났는데, 처음엔 어땠느냐면요. 그리구요. 어떤 곳에는 이런 추억이 있답니다.
근데, 그랬었는데요. 어쩌다 보니 무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헤어졌어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한데, 곧장 내가 너를 궁금해한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무슨 생각으로 아직 이럴까. 도대체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해.
작년의 우리는 어땠더라. 분명 같이 뭘 했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우리가 좋아하는 빠에야나 감바스나 뭐 그런 것들을 먹고서,
니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우리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양껏 해치웠을까.
그냥 그랬던가, 다른 뭔갈 했던가. 작년 오늘, 작년 오늘... 골똘히 생각해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 오늘도 어쨌든 퇴근이란 것을 할 것이고, 잠에 들었다가 깨면 5월 4일이 되어 있겠지.
그렇게 길고 긴 하루가 끝나면 또 같은 하루를 맞이할 것이고, 나는 일상을 못내 지겨워 할 것이다.
오늘 퇴근하고 나면 오랜만에 글을 한번 써봐야겠다 싶다. 그러려면 지긋지긋한 출근이란 걸 해야 하니, 이제는 밤사이 눌어붙은 잠을 씻어내야겠지.
앞으로 어떤 하루를 맞이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제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깜빡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겨우 엉덩이를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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