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가 있는 만큼 불교 경전은 방대합니다. 물론 이 방대한 내용이 모든 불교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남방불교 즉 스리랑카나 태국 미얀마 등 상좌부 계통의 전통을 이어받은 불교는 아함 혹은 니까야 경론만을 받아들이고 있고,
대승불교권 즉 중국이나 한국 티벳인 지역에서도 크게 중관학파, 유식학파로 2부파로 나누어 지고,
그 2부파에서, 수행하는 법과 세세한 이론의 차이에 따라 10부파 이상으로 갈라집니다.
불교가 이렇게 수십부파로 나누어져도 그 틀을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외적으로는 인도라는 땅 덩어리가 워낙 넓기도 하고, 불교가 퍼졌던 영역도 광대하고, 유럽처럼 로마라는 강력한 문화중심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로 왕래하기에는(전쟁이든, 소통이든) 지형 장애물이 험준했기 떄문입니다.
내적으로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설법한 내용이, 기독교나 이슬람등과 다르게, 토론이 가능한 주제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고, 종교적인 통찰지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사고 능력 또한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불교 수행과정을 네가지로 요약해보라하면 신해행증인데, 신(信) 해(解) 행(行) 증(證) 중 해가 이해에 해당합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가르침을 행하기에 어려움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해하지 않고 바로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기도 합니다.)
그럼 이렇게 몇십부파로 갈라지는데, 어떤 틀이 있어서 이런 몇십부파를 불교라 이름붙일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1. 사성제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
불교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불교 입문서를 한번이라도 펼쳐봤다면, 첫장에 볼 수 있는 게 이 개념입니다.
무엇이 사성제인가? 하면 정말 간단하게 고 집 멸 도 이 4가지라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윤회하는 현상은 고통이다.(고) 고통의 원인은 무명과 집착이다.(집) 모든 고통이 사라진 열반이 있다.(멸) 그 열반에 도달하는 길이 있다.(도)
이 틀을 가지고 한번 아함부와 대승부의 과정을 따라들어가 봅시다.
일단 초기불교에 사유과정을 따라가봅시다.
제 지난 글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불교는 법이라는 개념을 씁니다. 왜냐면 불교에서는 "나"라는 개념은 허구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면 인간은 다섯가지 무더기다. 즉 육체와 정신적인 작용 4가지가 연기된 복합적 유기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신적인 4가지 작용은, 감각, 생각, 의지, 분별입니다.
이 5가지 무더기는 딱히 인간만이 아니라 불교 세계관에서 육도중생 다 포함합니다. 즉 동물이나, 천신이나, 아수라나, 지옥중생이나, 아귀나 다 다섯가지 무더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비율이나 세세한 조건들은 다르겠습니다만.
여튼 이 5가지 무더기의 작용은 신이 뚝딱만들어서 준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명적으로 확정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바로 몇초전 과거의 영향으로 이어진 것 입니다.
(불교에서는 "시초"라는 단어를 안 쓰는 데 왜냐면 이 세계는 처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초"란 인간의 사고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 그정도로 봅니다. 그래서 처음에 뭐가 있었나?라는 질문보다, 이 원인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까?의 질문에 초첨이 맞추어집니다.)
과거의 영향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으며, 외부조건과 맞아떨어지면 그 결과가 발생한다. 이런 공식하에 고통을 설명해보자면
불교에서는 고통을 3고, 8고정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일 큰 고통은 바로 태어나는 것, 늙어가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바로 인생 이 자체입니다.
"내 인생이 고통스러운 적이 훨씬 많지만, 사랑도 해봤고, 행복한 감정도 그래도 많이 느껴봤다. 인생을 어떻게 완전히 고통이라 치부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게 힘든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럼 한 번 불교적으로 풀어봅시다.
불교는 인생의 초첨을 "불완전성"에 맞추고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지은 선업의 힘으로 "건강한 몸, 재부, 카리스마, 여인"등을 가졌다고 해도,
이 선업의 힘은 내가 선업이라는 자량을 계속 쌓지 않는 한 내 의지와 관계없이 힘을 잃는다. 그럼 내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 둘씩 그 선업의 과보를 잃게 되는데, 그럼 동시에 악업의 과보가 발현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한번의 인생을 엄청나게 윤택하고 즐겁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생은 보장 못합니다.
이런 선업의 과보만 누리는 자는 타락한다는 내용은 불교경전에서 흔히 천신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선업의 과보로 천계에 태어난 자들. 이들은 걱정할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고. 편안하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질투, 탐욕, 분노를 일으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생각만 하면 자기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그럼 이 천계 중생은 질투나 탐욕 분노를 일으키지 않기에 선업을 쌓는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만심"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만심"에 의해서 남에게 피해를 안줘도 말이지요. 이런 선업의 인연이 다하면 삼악도나 인간계에 떨어지게 되는게 보통 "타락"이라 합니다.
이렇듯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과거의 선악업의 인연에 의해서 지탱되는" 인생이라고 불교는 봅니다. 물론 미래의 인생은 현재의 내 선악의 의지와 행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겠습니다만, 여튼 지금 이 순간 내 의지로 내 마음을 맘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상황은 더 그렇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인생의 즐거움"에 초첨이 맞추어져 있다면, 누군가는 이 삶의 "불완전성"에 초첨을 맞추고 "완전함"에 다가가길 바라는 자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두번째 사람들이 "불법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칭합니다.
"끌려다니는 인생", "마치 수레바퀴가 돌듯이 위아래로 돌고 도는 생" 이 것을 불교는 윤회라 칭합니다.
윤회라는 고통은 그럼 어떤 힘에 의해서 지탱되는가?
"진리"를 꿰뚫지 못하는 상태인 무명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생의 의지인 갈애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뜻은 사성제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며,
즉 인생은 노답이고, 이 고통을 끝을 내는게 제일 좋은 해법인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아직도 윤회에는 "뭔가 영원하고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 행복은 영원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고, 생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죽는 건데 죽음은 허무와 같아, 그 허무인 경계에 떨어지는 것보다 현상을 붙잡는 것이 더 좋기 떄문입니다.
제가 글을 워낙 못써서 그렇습니다. 사실 12연기 부분 같은 경우는 저렇게 땡칠 그런 개념이 아닌데, 저도 후반부와서는 빨리 대승불교를 설명하기
위해 날림으로 쓴거 같습니다; 결국 못 썼지만요. 부연설명을 하자면 그냥 열반을 성취하지 못해서 몸과 정신이 있고, 외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좋고 싫은 감정이 생기고, 이게 한번 일어났다가 소멸되는 그런게 아니라 훈습이 되는데, 이런 훈습이 내 몸뚱아리가 죽어서도 열반에 들지 못하고 다음 생으로 향하게 한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쪽은 진짜 무지한 쪽이라 잘 몰랐는데
읽다보니 예전에 불교의 기본적 개념들 중 몇 가지에 대해 잘 풀어써주신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비슷해서 그분이신가? 하고 찾아봤는데 같은 분이시네요.
아직 읽다보면 알쏭달쏭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잘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덕분에 저처럼 무지한 중생도 아주 조금이나마 불교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럽니다. 감사합니다.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저도 진리 탐구를 위해 여러 종교를 탐구하고 있는데요. 성경과 의미적으로 유사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태초의 원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신의 영역;에덴(열반)에 머물지 못하게 되는(행)의 이유가, 선악을 구분하는 선악과(식)을 먹고부터 분별심이 생기고, 이성, 감정 등의 자존감(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등의) 같은 이성, 감정 등이 생긴 것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원죄에 의한 고통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그 구조가 유사한 것에 참 신기했습니다.
불교에서의 참나로 가는 길은, 나를 철저히 버리고 신에게 완벽히 귀의하는 것이 목표인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종교들을 보면 같은 진리를 서로 좌충우돌하며 중생을 설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는 여러 개 일 수 있다는 생각.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