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11/01 10:39:40
Name 영혼
Subject [일반] 똥 안싸기 장인 (수정됨)
#1
어느새 11월이다. 문학을 전공하며 동물에 일가견이 있는 유명한 양반이 지금 내 나이때쯤 썼던 글에서 그랬다.
달력에 표시되지 않는 날들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아도 기록되는 일들에 대해서 망설이게 되었다고.
이유야 다르겠지만 망설임만은 같다. 나 뿐만 아니라, 그 홀가분하며 위태로운 마음은 누군들 불쑥 찾아오곤 할 터인데
지나고 나면 나조차도 기억해주지 않을 날들. 이를테면 2017년 11월 1일 같은 날들.
그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대함에 있어서, 괜히 마음이 뻐근하고 불편한 기분이 든다.
요즘 들어 사는 게 뻑뻑하다고 느낀다. 한참은 식어버린 퍽퍽살 같다.
응석 부릴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왠지 목이 메인 목소리가 나올 것 같다. 사는게 왜 이렇냐. 싶다


#2
4년하고도 반을 아쉽게 채우지 못한 연애가 끝이 났다.
보통의 연애가 으레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이였고, 그저 그런 빛이나 빚이나 어둠이나 아둔함이 있었다.
결코 대단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좋았다. 나는 그 아이가 좋았고, 그 아이도 나를 좋아했으니. 그게 참 좋았다. 그래서 좋았다.
당연하게도 내게는 아주 소중하고 특별했다.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감정들에 온 마음이 열렬하게도 떨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젠 다 부서지다못해 으깨져 큰 의미가 없는 관계의 아무 곳에 서서, 그 잔해들을 괜히 한번씩 건드려보곤 했다.
나는 왠지 어제처럼, 그제처럼, 이별 후에 있었던 많은 날들처럼, 흘러내리는 그것들을 한 손씩 한 웅큼씩 쥐어보곤 할 것 같다.


#3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새로 생긴 것이나 없어진 것이 참으로 많다. 우선 여자친구가 없어진 것은 당일로부터 깨달았으니 간과할 수 없다.
그 외의 것들, 예를 들면 더 이상 휴대폰이 하루에 몇십번씩 소소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나
SNS의 해시태그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나, 카카오톡 상단 고정으로 해놓을 사람이 없어진 것이라든지.
뭐 그런 사소한 일들 또한 하루 걸러 하루씩 새로운 것들을 깨닫고 있지만 진실로 말하자면 여전히 내가 뭘 잃었고 뭘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는 10년이 지나버린 드라마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순간을 돌이켜본다고 했다.
그 순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깨달음은 항상 늦다고도 말했다.
그 나래이션 누가 썼는진 모르겠지만 참 그 양반 잘 됐을거야. 잘 되있었으면 좋겠다.


#4
오랜만에 내가 쓴 일기들을 쭉 훑어 봤다. 내가 썼는데도 내용들이 하나같이 생경하다. 미친놈이네 일기에다 왜 이런걸 쓰냐. 싶다.
전하지도 못할 편지에다가 꾹꾹 눌러 담은 진심들이 왜 그리 가득한지. 모를 일이다.


#5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꽤나 많이 과거를 곱씹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게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변비가 생겼다는 것이다.
항상 1일 1똥 하던 내가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있는 둥 없는 둥 한 변의를 기다리고 있단 점이 우습고 또 재밌다.
사실 이 깊고 깊은 똥 못 쌈의 구렁텅이에 항변할 자격이 없는 것만 같다. 쳐 먹은게 없으니 싸는 것도 없는 거잖아. 어제도 굶었잖아..
일주일만에 3kg가 빠졌다. 돼지 뚠뚠이라서 내가 아끼는 옷들이 슬슬 버거워졌는데, 덕분에 한 시름 덜었다.
처음엔 살이 빠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몸무게가 줄어 있길래 이 참에 다이어트를 해야 겠다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자 일주일만에 뺐던 살의 곱절은 뺄 수 있었다. 역시 최고의 다이어트는 맘고생이야.
살은 똥 싸듯이 줄줄 빠지는데 정작 똥을 못 싸고 있으니 이것 참 난감하다고 해야할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할지..


#6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그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내가 네게, 네가 내게 연락하지 않고 서로 닿을 일이 없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신의가 닳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전히 나는 이 곳에서 그저 그렇게 반짝거리고 있다고.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이미 너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을 것이 되어버렸음을 나부터가 잘 알고 있다.
보통의 연애가 그렇듯이,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이미 찍혀버린 마침표를 괜히 한번씩 꾹 눌러보고, 지우개로 문질러보곤 할 것만 같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화염투척사
17/11/01 10:49
수정 아이콘
제목을 보고 역시 피지알이야 하고 들어왔다가, 내용을 보고 아 맞다 피지알이야 하고 느끼네요.
잘 봤습니다. 지나간 일기를 보듯 또 지금을 돌이켜 볼 때가 있겠죠.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싶기도 할 수 있구요. 그래도 그 순간의 진심이 변하는건 아니니까요.
아무쪼록 맘고생을 끝내시고 쾌변 하시길 빕니다.
pppppppppp
17/11/01 10:51
수정 아이콘
맘고생이 곧 끝나시길 빕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볼 일을 잘 해결하실 수 있으시길..
17/11/01 10:55
수정 아이콘
위 아래로 똥 균형의 수호자들같으니라고....
드러머
17/11/01 11:06
수정 아이콘
와아... 글 너무 잘 쓰십니다 ㅠㅠ
몬스터피자
17/11/01 11:58
수정 아이콘
윗글과 더불어 인풋과 아웃풋 같달까요..?
마음이 편해집니다..
17/11/01 13:41
수정 아이콘
아군이다! 피지알러다!
vanillabean
17/11/01 13:52
수정 아이콘
잘 드세요. 먹는 게 영혼의 허기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되긴 해요.
블루시안
17/11/02 13:04
수정 아이콘
덧글 쓰려고 로그인했습니다ㅠㅠ
너무 쓰려요.. 6번 문단이 가장 좋았어요.
서로 닿을 일이 없더라도 신의가 닳아 없어지는것은 아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6125 [일반] [뉴스 모음] 이명박 정부. 경찰마저 여론조작 가담 외 [46] The xian15016 18/03/13 15016 108
76107 [일반] 휴대폰 인증에 대해서 운영진과 유저 사이 소통이 없던 점이 아쉽습니다. [253] 은하17535 18/03/11 17535 24
76075 [일반] 테슬라 운전자, '오토파일럿'으로 운전법규위반 딱지 기각 [39] 타카이10586 18/03/09 10586 1
75989 [일반] 테크노마트에서 핸드폰 구매하기 [56] 현직백수22053 18/03/03 22053 28
75768 [일반] 닌텐도 스위치 악세사리&주변기기 구입후기 [78] 세정17392 18/02/09 17392 9
75695 [일반] [뉴스 모음] 개그콘서트 녹화장(?)이 된 원내대표 연설 외 [46] The xian14505 18/02/03 14505 38
75375 [일반] 제천 화재 참사의 조사 결과가 발표 되었습니다. [29] 무가당10730 18/01/11 10730 1
75164 [일반]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은 후진국에 가깝죠. [168] HJose18289 17/12/27 18289 46
75154 [일반] 근황보고 [24] 로즈마리7601 17/12/26 7601 16
75009 [일반] 정부 암호화폐 대책, 단톡방 타고 외부 유출 [72] 아유13197 17/12/16 13197 1
74956 [일반] 고팍스라는 곳에서 가상화폐 무료 코인 덤 이벤트를 실시하네요. [539] darknight48121 17/12/13 48121 31
74928 [일반] 스타벅스 본사에 클레임한 이야기 [54] 오히모히14462 17/12/11 14462 12
74894 [일반] 어느 역무원의 하루 - 비처럼 음악처럼 [5] 부끄러운줄알아야지4282 17/12/08 4282 6
74800 [일반] 최근 1호선 국철 지연이 자주 있네요. [40] 아침바람8288 17/12/01 8288 0
74790 [일반] 좋은 경험인가 쓸데없는 시간낭비인가 [49] 현직백수12887 17/11/30 12887 95
74580 [일반]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듯한 이런 느낌 정말 오랜만에 드네요. [30] 태연9989 17/11/13 9989 1
74408 [일반] 똥 안싸기 장인 [8] 영혼6496 17/11/01 6496 10
74285 [일반] 성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판사가 여전히 재판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감에서 드러났습니다. [52] 원시제11141 17/10/22 11141 5
74147 [일반] 인생 최악의 폰 G5를 보내고 노트8을 영입하다. [83] plainee14850 17/10/10 14850 6
74101 [일반] 추석 후기 [51] The Special One10185 17/10/06 10185 82
74068 [일반] 글쓰기 이벤트 결과 발표입니다 [5] OrBef6927 17/10/03 6927 4
74053 [일반] 정수기에서 이물질이 나왔을 때, 세 번째 글 [2] 2018.104785 17/10/02 4785 4
74016 [일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11] 조선왕조실록8250 17/09/30 8250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