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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7/17 17:05:01
Name 불같은 강속구
File #1 책_두권.jpg (0 Byte), Download : 76
Subject [일반] 동양과 서양, 미닫이문을 통해 만나다 - 김훈과 바르베리



*작가 존칭은 생략했습니다.

I. 두 권의 책


1. 미닫이문

"미닫이문을 열고 드나들 때 사람들의 공간 감각 속에서는 이쪽과 저쪽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다. 미닫이문을 닫을 때, 문 밖의 공간은 제거되거나 격절되지 않는다. 문 밖의 공간은 당분간 저쪽으로 밀쳐질 뿐이다. 미닫이문은, 열려 있을 때나 닫혀 있을 때나 언제나 문이 갖는 소통의 기능을 수행한다. 미닫이문은 옆으로 포개지면서 열리고 닫힌다. 미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만든 통로가 아니다. 미닫이문은 애초부터 통로로 태어난 문이다. 이 문이 소통과 구획을 동시에 수행한다.
호텔이나 아파트의 여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뚫은 문이다. 이 여닫이 문짝은 문 밖의 공간을 완벽히 차단하고 제거한다. 차단 기능이 클수록 좋은 문짝으로 꼽힌다. 아파트의 도어는 사람이 드나드는 순간에만 문이고 닫혀 있을 때는 벽이다. 그러니 문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깝다. 드나들어야겠다는 욕망과 외부를 차단해야 한다는 욕망이 그 문짝 속에 기묘하게도 뒤엉켜 있다."

                                    - 김훈, <자전거 여행>, p150~151, 생각의 나무

"내가 본 첫 영화 <오차즈케의 맛>에서부터 나는 일본의 생활공간과 미닫이문, 즉 공간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그 문에 매료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을 열 때 상당히 저급한 방식으로 공간을 변형시키기 때문인데, 문을 열면서 우리는 방의 공간 전체와 충돌해 그 안에 너무도 부적절한 비율을 만들어버린 나머지 원치 않은 틈을 들여놓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닫이문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방의 안쪽에서 보면 여닫이문은 일종의 단절, 공간의 통일성을 깬다. 방의 바깥쪽에서 보면 여닫이문은 온전히 벽이어야 될 벽의 한 부분에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함몰된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 두 경우에, 여닫이문은 들락날락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 이외에는 다른 보상 없이 방이라는 공간을 어지럽힌다. 반면, 미닫이문은 이런 암초들을 피하게 해주며, 공간을 고상하게 해준다.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균형의 변신을 가능케 한다.
미닫이문이 열리면 두 공간은 서로 부딪힘 없이 연결된다. 그 문을 닫으면 각각의 공간은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분할과 결합이 무리 없이 어우러진다. 미닫이문이 오랜 불법침입의 연속인 여닫이문을 가진 우리들의 집과 합쳐지면 그곳의 삶은 고요한 산책이 된다."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p219~220, 아르테


얼마 전 프랑스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던 중 묘한 기시감이 들더군요. 어 이거 분명 예전에 어디서 본건데....
얼마간 기억을 더듬고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옛 경험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두 책에서 인용한 부분은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라는 주거문화요소에 대한 두 저자의 생각입니다.
한명은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오랫동안 기자를 하다 소설가가 된 60세의 남성이고 다른 한명은 서유럽의 프랑스에서 철학교사를 하다가 소설가가 된 39세의 여성입니다.  
세대와 인종과 살아온 환경이 너무도 차이나는 두 사람이 동양의 전통적인 주거문화요소에 대해, 수필과 소설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를 통해 보여준 생각이 저런 교집합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저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문을 들락거리면서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문이 공간과 사람의 감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미닫이문은 미닫이문이요 여닫이문은 여닫이문이고 회전문은 회전문일뿐. 그런데 저토록 다른 사람들의 저토록 같은 생각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 신기하면서도 바로 그런 점이 생활 속의 소소한 것을 통해서도 사색하는 사람과 생각 없이 사는 멍청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 같아 우울해 집니다.


2. <고슴도치의 우아함>

이 책은 고급아파트의 수위인 르네라는 쉰네 살의 아줌마와 그 아파트에 사는 열두 살의 소녀 팔로마의 생각을 나누어 편집한 형태의 소설입니다. 서로 같은 곳을 다르게 보는 두 관점을 교차시킨 것은 아니고 한번은 르네가, 또 한 번은 팔로마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르네는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뚱뚱하고 못생기고 하염없이 TV나 보는 쉰네 살의 수위아줌마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톨스토이를 읽고 모차르트를 들으며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는 문법에 대해 못마땅해 하며 칸트와 후설의 철학에 대해 생각하는 아주 지적인 여성입니다. 하지만 고슴도치처럼 자기의 내면을 철저히 숨기고 보통 사람들이 선입견처럼 갖고 있는 늙은 수위아줌마의 전형처럼 행동하죠.
팔로마는 부르주아들의 속물근성과 어른들의 유치함을 경멸하며 삶의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 열세 살을 맞는 생일날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열두 살의 천재소녀입니다.

저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되고 교감하게 되기까지 둘의 생각과 주변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 소설의 큰 틀입니다.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의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이 소설의 대부분인 만큼 읽기가 편하지는 않습니다. 혹시나 독자에 따라서는 철학책과 같은 장광설과 현학적 문체가 주는 지루함이 페이지 넘기기를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독서전의 기본 정보를 통해 이 책에 대해 기대했던 부분이 어긋남을 느끼게 되면서 좀 짜증도 났습니다. 철학적 사색을 빙자해 현학적인 어투로 앞뒤가 안 맞는 선문답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번역도 그다지 맘에 들지 앟았고요. 하지만 1/3정도 지나고 특히 오즈라는 새로운 일본인 입주자가 등장하면서 부터는 끝까지 책을 놓지 않고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더군요.  
또 삶의 일상적인 모습을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포착하고 사색한 내용을 들려주는 몇몇 장면들은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합니다.

아쉬운 점은 두 주인공이 서로에 대해 조금씩 눈치채가고 알아가며 공감하고 연대하는 과정이 다소 부족하여 뜬금없는 결말에 이은 주인공의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수가 고수를,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고 서로를 인정하는 장면들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긴장감과 흥미를 생각하면 저자가 소설로서의 구성의 묘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캐릭터의 특이함이나 내용의 신선함, 정서적 충족, 지적 만족감등을 생각한다면, 책읽기를 좋아하시는 분은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프랑스라는 나라는 참 특이합니다. 로코코와 낭만파, 사실주의,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야수파등 프랑스 미술사는 그 자체가 바로 근대서양미술사이고 혁명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한 나라이며 데카르트부터 알튀세, 푸코, 들뢰즈 까지 근현대철학사의 중심에 있으면서 본격철학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나라입니다. 영화를 발명했으며 그 전통에 대항한 누벨바그의 나라이고 홍세화를 통해 개념화된 똘레랑스의 나라입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같이 특이한 소설이 해리포터를 제치고 판매량 1위를 하는 나라이고요.
근대 이후 인류의 정신문화발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프랑스 같습니다.
좋은 면만 들먹인것 같지만 기회가 되면 좀 진득하니 살면서 프랑스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3. <자전거 여행>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저는 김훈의 글을 보면 시기심이 듭니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뛰어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느끼는 감정이죠.
생각이 깊은 사람이 그 사색과 성찰을 담아 벼려낸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른 이의 마음에 얼마나 축복을 주는 지 김훈은 이 책을 통해 몸소 보여줍니다.
그는 호숫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 구, 절이 돌이 되어 제 마음을 타고 튕기면서 켜켜이 파장을 일으킵니다.

김훈이 대중에게 유명해 진 것은 <칼의 노래> 덕분이죠. 그게 김훈 자신이 그다지 마땅치 않아 했음이 분명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덕이라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합니다. 드라마의 도움도 받았겠지만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소문난 뒤 불티나게 팔려나가 100만부를 훌쩍 뛰어넘는, 우리나라 현 출판시장에서는 꿈같은 판매량을 올렸으니까요. 작년에 나온 <남한산성>도 그 명성에 힘입어 꽤 잘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김훈의 글의 갖는 장점은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서, 단편소설보다는 산문에서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합니다. 긴 호흡과 잘 짜여진 구성및 전개를 갖추는 것이 미덕인 장편에서 사실 김훈의 극 구성력은 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궤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한산성>같은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건의 전개보다는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고 다만 장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의 힘을 챙길 수 있는지는 김훈의 다음 장편을 더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전거여행>은 김훈이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 산천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의 기록입니다.
원래 에세이 종류는 잘 읽지 않았었는데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은 후 살 수 밖에 없는 책임을 깨닫고 며칠 동안 천천히 글자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읽었습니다.

요새는 밝고 경쾌함을 앞세워 그저 젠체하고 소비적이며 감각만을 자극하기 바쁜, 글이라고 하기도 낙서라고 하기도 좀 뭣한 문장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많이 팔리기 때문이겠죠. 그 가치를 폄하하는건 아니지만 여성작가들이 양산해내는 칙릿 계열의 소설들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모든 문학작품이 다 진지하고 무거운 글들로 채워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발랄하고 경쾌한 문장으로도 얼마든지 삶의 이면을 파헤쳐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참신한 상상력이 주는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김애란 같은 작가가 대표적이죠. 김애란은 2002년에 스물 셋이라는 나이로 문단에 나와 그 젊음에 어울리는 싱그러운 문체로 그 어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깊이를 가진 소설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돌풍을 일으킨 이후 계속 좋은 작품들을 작품목록에 추가하고 있는 박민규도 마찬가지고요. 김연수와 천운영도 각자의 스타일을 확립한 좋은 작가들입니다. 우리나라 문학, 특히 소설을 이끄는 제대로 된 작가들의 작품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좀 옆으로 새버렸지만 어쨌든 김훈의 글은 말랑말랑하고 소비적인 잡문들에 길들여진 독자들이라면 낡고 고리타분 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한번 훑고 버리는 싸구려가 아닌 진짜 글의 가치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분들은 꼭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리고 프롤로그나 머리말등을 잘 안보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의 백미는 프롤로그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 내용중에서 되는대로 몇 개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 문득 있던 것이 문득 없다. 뜨거운 애욕의 정념 혹은 어떤 고결한 영혼처럼.

~~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  
  -p21~23

"대숲은 늘 스스로 서늘하고, 잘 말라서 질퍽거리지 않는다. 대숲은 늘 꿈속처럼 어둑어둑하다. 이것이 몽밀(夢密)이다. 대나무로는 무기도 만들고 악기도 만든다. 죽창과 피리가 모두 대나무다. 대나무로는 연장도 만들고 가구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고 사군자도 친다. 세상을 깨부수고 바꾸려는 사람들은 대나무숲으로 와서 무기를 구했고, 세상을 버리고 숨으려는 사람들은 대나무숲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래서 대나무숲은 세상으로 나가는 전진기지이며 세상을 버리고 돌아오는 후방의 쓸쓸한 낙원이다. 대나무숲은 전투적 이념의 절정이며 은둔의 맨 뒷전인 것이다."   -p47-

"현세의 질곡 속에서 끝없이 배반당하는 인간의 모든 꿈은 산에 의탁되었는데, 배반당한 꿈들이 빚어내는 관념의 산은 인간의 원근법에 따라서 멀거나 가깝다.
도가(道家)의 산은 멀고 또 높아서, 그 봉우리들은 바람이 밀고 가는 안개와 구름에 가려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은 끊어져 있어 자전거를 굴려서 갈 수가 없다.
유가(儒家)의 산은 인간의 마을에 가깝다. 퇴계의 등산 코스인 청량산과 소백산은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해주는 도덕적 소생력으로서만 아름다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한산자(당나라의 전설적인 거렁뱅이 시인)는 길 없는 산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이 아름답고 퇴계는 길 있는 마을로 내려오는 앞모습이 아름답다."
  -p267~268





II. 그 남자 수상하다 - 김훈은 과연 읽어도 되는 작가인가


위에서 김훈의 글을 저렇게 찬양해놓고 뭔 말도 안 되는 제목인가 하실 겁니다.
그런데 앞선 찬사는 다른 측면을 떠나서 오로지 김훈의 글만을 놓고 보았을 때의 생각이고, 사실 김훈이라는 작가는 그 글만 보고 무작정 찬사만 늘어놓기에는 좀 불편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친일작가들의 반민족적 작태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고 최근에도 촛불시위와 시국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였던 이문열은 사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인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작가의 세계관 및 행적과는 상관없이 그의 작품이나 문학사에 남긴 업적등을 따로 놓고  판단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이슈가 됩니다. 저는 사실 저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선택>이후 이문열은 안 읽으면 그만이었고 친일작가들의 작품은 몽땅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사람은 서정주도 이광수도 아니고 바로 김훈이었습니다.

<자전거여행>으로 김훈이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된 뒤 한참 후에야 그의 전력과 관계된 ‘쾌도난담’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쾌도난담은 한겨레21에 있던 대담코너였습니다. 한겨레는 당시 시사주간지 시장을 양분하던 경쟁사인 시사저널의 편집장을 파격적으로 대담에 초청했고 이에 흔쾌히 응했던 그 편집장이 바로 김훈이었습니다. 이 대담에서 김훈은 지면보도를 전제로 하는 대담에서 시사잡지의 편집장이 한 말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황당 발언들을 쏟아냅니다.
페미니즘은 못된 사조다, 시사저널의 여기자들도 가부장적 리더쉽을 그리워하는것 같다, 여자들한테는 가부장이 가장 편안한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이 절대 우월하고 유능하다, 여자는 위해주고 예뻐해주면 된다는 등의 막가파식 마초발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건 사기다, 80년 신군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는 한국일보에서는 모조리 자기가 썼다, 민중예술은 예술도 아니다, 못살게 뻔한데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재벌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노동자들이 무슨 연대를 하느냐, 조선일보를 가장 좋아해서 평생을 본다 는 등의 막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시 패널들도 그 진의를 파악하느라 어리둥절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쾌도난담의 제목도 “위악인가 진심인가” 로 붙였다고 하니까요.

http://h21.hani.co.kr/section-021023000/2000/021023000200009270327078.html

그 대담이 나간 후 여성단체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시사저널의 일부 기자들도 항의성 사표를 내는 등 그 반향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결국 김훈이 회사를 그만둬버리면서 사태가 진정되었죠. <칼의 노래>는 그렇게 그가 야인으로 돌아간 뒤 쓴 첫 장편소설이고 2001년 조선일보가 주는 동인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김훈은 현장기자로 돌아가고 싶다며 한겨레에 입사의사를 타진했고 고민 끝에 한겨레가 받아들였습니다. 시사주간지의 편집장까지 지냈던 그는 2002년 한겨레에 입사하여 사회부 평기자로 일하면서 현장기사와 칼럼을 썼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한겨레 기자로 일하던 김훈은 2002년 대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선과정과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며 분명치 않은 이유를 들어 갑자기 한겨레에 사표를 내버리고 맙니다.  
그 뒤로 김훈은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단편<화장>으로 2004년 이상 문학상, <언니의 폐경>으로 2005년 황순원 문학상, 장편 <남한산성>으로 2007년 대산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 장편 <현의 노래>, <개>, 소설집<강산무진>, 수필<밥벌이의 지겨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등의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2004년 말에도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면서 5000년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박정희론과 좌익과 진보는 물적 토대가 없어서 세상을 맡을 수 없다는 논리를 설파했습니다.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412/h2004122918541823400.htm

위 인터뷰에 대해서는 진중권이 그냥 못 넘기고 한마디 해주었더군요.

http://jinbonuri.com/bbs/view.php?id=col_jin&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vote&desc=desc&no=675

2007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도 평준화는 웃기는 수작이다, 일류대학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들 고생과 경쟁은 청소년기에 훌륭한 경험이고 교육이다, 이념적 일관성이 밥 먹여주냐 한미FTA 대찬성이다, 남편이 하는 일에 감히 가타부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덕성이며 전통이다, 여자를 보호하고 어려운 일 시키지 않는 것이 가부장적 덕성이다,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는 딸들이 행복하게 살았다 등의 보수적이고 마초적인 사고를 숨기지 않습니다.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706/h2007060720552184800.htm

한겨레21의 쾌도난담을 읽고 나서는 김훈의 작품을 더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고 말았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찬양가를 지은 사람이 일제 때 작가활동을 했다면 천황폐하를 위해 진군하는 학도병 어쩌고를 부르짖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싶더군요. 천황폐하와 전두환을 두루 찬미했던 서정주의 예도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독립운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 천황폐하를 외칠 인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꼴마초에 박정희 찬양론자라니...  

김훈의 글을 높이 평가했던 만큼 그 행적에 실망도 커서 그의 작품을 읽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한겨레에서 같이 근무했던 권태호 기자의 글(뒤에 링크)을 보게 되었는데, 곁에서지켜본 한겨레 기자의 긴 얘기를 듣고 나니 김훈은 소심하고 여려서 이문열처럼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의 글이 정서에 주는 충만감을 잘 알기에 어느샌가 다시 그의 책을 들게 되었습니다. 작가와 작품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은 깨지 않되 그냥 김훈은 예외로 하자는 생각으로 말이죠.
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김훈이 예외가 될 수 있다면 이광수도 서정주도 이문열도 그의 인간적인 면을 찾아들어가 다 예외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저번에 <남한산성>을 사면서 클릭하기까지 좀 망설여지는걸 보니 아직 이 고민은 저에게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PGR에도 김훈의 작품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김훈에 대해 알고도 그냥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미 자기 판단을 하셨을 것입니다. 모르셨던 분들은 과연 예술가의 사상, 언행과 그의 작품은 따로 분리해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일까 한번쯤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P.S  김훈이라는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그가 한겨레에 재직할 당시 후배이자 사회부 캡으로 직속상사였던 권태호 기자가 쓴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김훈이 한겨레에 입사하고 퇴사하기까지 과정에 대해 쓴 글입니다.

http://bbs.hani.co.kr/board/newsmail_05/Contents.asp?STable=newsmail_05&RNo=69&Search=&Text=&GoToPage=2&Idx=182&Sorting=1

http://bbs.hani.co.kr/board/newsmail_05/Contents.asp?STable=newsmail_05&RNo=76&Search=&Text=&GoToPage=1&Idx=205&Sortin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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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
08/07/17 18:07
수정 아이콘
한국일보 인터뷰 읽어보니까 크게 문제가 느껴지지는 않는데요?
일단 말만 들어서는 서구식 정통 우익을 추구하는 분 같네요.
[세금 잘 내고, 아들 군대 보내고, 질서를 지키는] 그런 우익이라면 지지는 할수 없어도 혐오도 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어쩌면 아주 정확한 거 같기도 하구요.
서정주 같은 [꺼삐딴 리]류의 인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네요.
내일은
08/07/17 19:25
수정 아이콘
저도 김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이나 정치적 스탠스(딱히 생각나는 역어가 없어서) 지지는 할 수 없지만, 전국시대님이 말하셨듯이 그는 적어도 꽤나 상식적인 우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군부 시절 기사 쓰게 된 것도, 옆 방에서 들려오는 동료와 후배들의 고문과 신음소리에 못 이겨서 내가 다쓰고 내가 다 책임진다는 그런 마음으로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랑스러운은 일은 아니지만 후회도 안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고요. 다시 말해 그는 독재에 대해 지지하지도 않지만(우선 겉으로는)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겠다는 소시민적 보수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는 언론인이었으나,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이 언론인에 대해 기대하는 무엇인가와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입니다. 애매하기는 한데 비판은 할 수 있어도, 비난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쓴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편집장의 글과 한겨레 시절 거리의 칼럼은 우리 언론의 기록에 남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살아있습니다.
반대칭어장관
08/07/17 19:2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서양미술 연재는 더 안 하시나요? 애독자입니다^^
불같은 강속구
08/07/17 20:43
수정 아이콘
戰國時代님께서는 한국일보 인터뷰만 가지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인터뷰들은 보는이의 성향에 따라 입장이 갈릴 수 있고 , 보수임을 자처하는 김훈씨의 스탠스를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실망한것은 한겨레21 인터뷰입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김훈씨의 가부장적 여성관은 이해하기 힘드네요.
그리고 신군부가 날뛰던 시절 언론인의 양심을 지키려다 해직당한 기자분들 엄청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중에 한겨레 창간멤버로 가셨고요. 그런 분들과 비교하면 어쨌든 전두환용비어천가를 썼다는것 자체가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죠. 그럼 그 상황에서 무조건 회사 관둬야 하느냐고 말씀하신다면 저 같아도 그럴 용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친일작가들도 다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요.
전 그런 점에서 김훈씨가 일제때 지금처럼 유명한 문인이셨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가 의문스러웠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김훈씨의 글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 글로 김훈씨를 매도하려는게 아니고 글의 앞부분에서 그분의 작품을 거품물고 추천했기 때문에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이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란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문열이 추락하기 시작한게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여지없이 드러낸 <선택>이었으니까요.

반대칭어장관리상태님// 그런 잡글을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사실 미술관련 글을 썼을때 생각해놓은 소재는 아직 꽤 남았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이야기도 쓰다가 말았고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들이는 시간에 비해서 보시는 분들이 워낙 없다 보니까 쓰기가 싫어지더군요. 그 글을 클릭하신 얼마 안되는 분들중에서도 과연 몇분이나 찬찬히 보셨을까 생각하니까 이런 걸 뭐하러 하고 있나 싶어서요.
애독자라고 까지 해주시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08/07/17 21:15
수정 아이콘
불같은 강속구님//

서양미술 글 재미 있게 읽었던 사람 입니다.

가끔 검색해서 다시 읽어 보기도 합니다.

써 주세요.^^
반대칭어장관
08/07/17 21:45
수정 아이콘
앗..계속 써 주세요ㅠㅠ 정말 좋은 글들이 조회수가 적어서 계속 사라지는게 안타깝네요..써주시기만 해주시면 에게로 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戰國時代
08/07/1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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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같은 강속구님// 네, 한겨레21 인터뷰를 보니 확실히 보수우익이네요.
하지만 그냥 미국 공화당 정도의 보수성으로 보입니다.
서정주 같은 박쥐형 인간도 아니고, 한나라당 같은 부패한 막장 수구꼴통으로도 안 보입니다.
김훈 정도의 보수성이라면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위해 충분히 용인될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정도 연세의 한국인 전체의 스펙트럼을 놓고 보면 중도 정도로 밖에 안 보이네요.
여성관에 대한 것은 김훈의 [솔직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정도 여성관은 저 연세의 한국남성들의 한계입니다. 저게 평균치인데 다른 사람들은 말을 안할 뿐이죠.
그리고, 페미니즘=진보로 인식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일 뿐입니다.
페미니스트면서 박근혜 지지하시는 여성분들을 어떻게 진보라고 봐줍니까.
오히려 여권 외치면서 빈곤, 저학력층 남성들을 벌레취급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수구꼴통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세츠나
08/07/18 12:39
수정 아이콘
전국시대님/ 바로 위 댓글 마지막 문장의 말씀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마치 페미니스트들을 일반화하는 것 같아 좀 불쾌하군요.
표현에 좀 변화를 주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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