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의 여러 사상과 정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정책 중에 하나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요동 정벌, 즉 '공요론' 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왕조 개국 초기 중원의 대국인 명나라와 정면 대결을 하려고 했다는 서사성에다가 이로 인해 조준 등 다른 혁명 동지들과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고, 얼마 되지 않아 정도전이 죽게 되면서 먼지처럼 사라진 게획이라는 신비감도 있습니다.
이 정도전의 '공요론' 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 해볼만한 꺼리가 많습니다. 가능했는가? 혹은 지나친 무리였는가? 혹은 실제로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닌, '사병혁파' 와 같은 국내의 정치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전술' 이었는가? 등등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 '공요론' 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 모두가 공요론이 대단히 중차대한 당대의 이슈였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공요론에 관한 주장 중 매우 색다른 주장이 하나 있어서, 옮겨 봅니다.
본래 이 주장은 정도전의 '삼봉학' 에 대한 국내 첫 학술회의였던 2003년 11월의 행사에서 나왔던 논문을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온 책에 실린 주장입니다. 거기서 나온 논문들 중에서는 당일 학술회의에서 가장 말이 많았던 것 같더라구요.
긴 말 필요없고 논문을 일단 보겠습니다. 다만 혼란이자 혹시 모르는, 저자의 의도가 잘못 전달 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일단 논문 전체 복불하니 매우 깁니다.
때문에 스압 느끼는 분들을 위해서 논문 맨 아래, 제가 파악한 요첨을 간략하게 요약을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앞부분 정도 적당히 훓어보다가 슥슥 내린 분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논문에서 다루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보기 편하게 해보겠습니다. 다만 요약하는 와중에 저자의 주장이 곡해될 수도 있어서 논문을 같이 올린거라, 의문이 가면 논문을 한번 정독하는 것을 추천하겠습니다.
요약
1. '역사의 패배자' 인 정도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일종의 '재구성' 된 자료다. 이 자체는 '공요론' 을 긍정하는 사람들도 당연하게도 인정하는 것. 그런데, 기존의 공요론 긍정에 대한 주장은 실록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도전이 폄하되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2. 실록에 있는 기사의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여부에 대한 판단은 일단 차치하고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사상가 정도전은 분명 '사대론자' 였다. 주자적 입장에서도, 정도전이 큰 영향을 받은 맹자의 사상을 살펴보아도 그 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전이 실권을 쥔 태조 시기 조선과 명나라의 분쟁에 대한 대처도, 기본적으로' 사대'를 중심으로 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3. 물론 사대를 한다고 해서 '자주' 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공요' 는 또 다른 문제다. 나라를 튼튼히 하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대책에 전념하는 것과, '공세를 기반으로 한 전면전' 전혀 다른 이야기다. '사대' 와 '공요' 는 양립할 수 없다.
4. 그렇다면 '사상가' 정도전이 아니라 군사가 정도전의 요소를 알 수 있는 '진법' 에 담긴 정도전의 군사적 시각이 어떠냐고 한다면, '군사모험주의에 대한 극도의 경계' 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전력상 열세지만 싸움이라는거 해보지 않음 모르는거다, 까짓 모른다." 식의 안일하고 나이브한 식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5. 그렇다면 실록에 있는 많은 군사훈련 기록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군사훈련이라는 것이 꼭 '공격용' 이라는 의미는 되지 않는다. 신생 국가 조선의 신료이자 이성계에게 막대한 신임을 받고 사실상 국정운영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신으로서 군제개혁, 사병혁파 등을 해 신 왕조의 안정화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 '방어용' 이다.
6. 앞서말했듯 '사대' 와 '공요' 는 양립할 수 없지만, 자기존재가 부정되는 수준에 이르면 사대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런 경우에는 맹자에서도 '일전' 을 불사 할 수 밖에 없다는 내용과 사상을 찾을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존재가 부정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준비를 하는것은 아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전' 을 대비하면서 '방어용' 으로 힘을 기르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야말로, 군사책임자로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함과 동시에 사대라는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다. 즉 전쟁을 대비하며 준비하는 것과 사대는 대립하지 않는다.
7. 정도전은 그렇지만, 남은은 진정한 의미의 공요론자일 수 있다. 정도전은 그런 남은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8. 왕자의 난 이후 정도전이 숙청되고 난 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상하게도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 공요론에 대한 비난은 찾아볼수가 없다. 정도전의 죽음 마저도 한없이 비참하게 기록되고,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도전 부정하기' 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객기 부려서 중국과 한판 뜨려고 해 나라 말아먹을 뻔 했다' 는 식의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도전의 공요론을 최영의 요동정벌론과 비슷한 수준으로 다뤄, 이를 저지한 것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처럼 꾸밀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왜 일까?
9. 정도전이 죽을 무렵 근처의 이미 그 시점에서 정도전의 공요론은 아예 현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전의 공요론은 정도전이 내부 정비를 위해 움직이던 와중의 '전술' 의 일부분으로서, 조준의 반대 의견이 있던 이후 여기에 더해 더 말이 나오지도 않았었다. 정도전 본인은 조준의 반대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조준의 반론에 수긍해서 공요론을 철회하면 자신이 추구하는 군제개혁에 차질이 생긴다. 반대로 조준의 반론에 불구하고 공요를 강요하면 공요 논쟁이 '쓸데없이 커지면서' 파장이 도무지 수습할 수 없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 즉 공요론 자체는 '더 큰 목적을 위한 전술' 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목적' 이 아니었다. 목적이 아니었으니 비중도 미미했고, 잠깐 그런 말이 있었던 이후에는 존재감도 사라진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비난할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일과성으로 지나간 미미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11. 그런 잊혀진 옛 일에 불과한 공요론이 존재감을 다시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바로 조준 때문이다. 이성계의 최측근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조준은 왕자의 난 이후 새로운 얼굴들이 치고 들어오는 와중에 엄청난 공격과 모욕을 당했으며, 실제 목숨까지 위험했다. 조준은 죽은 정도전과 남은을 최대한 자신과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12. 조준은 정도전이 '공요' 를 획책했고, 자신이 이를 저지했지만 그런 '욕망' 을 달성하기 위해 반역을 시도했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짰다. 자신이 정도전과 다른 길을 갔던 것은 "길 가던 사람도 아는 바" 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공요론 자체는 일과성인 에피소드였지만, 정도전을 부정하기 위해서, 정도전과 자신의 거리를 멀게 하기 위해선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이렇게 해서 한참전에 죽었던 공요론이 다시 부활했으며, 공요론의 비중도 커졌다.
13. 한편 정도전이 죽던 1398년 경 명태조 주원장도 사망하면서 조선과 명의 긴장 관계는 급속도로 식었으며, 태종 시기가 되면 사대 외교는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한편 조준은 태종 5년에 사망했는데, 조준의 졸기에서 다시 공요론이 언급된다. 본래 공요론 긍정 쪽의 주장에서는 이 기록을 토대로 정도전이 고구려 동명왕의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15. 그런데 이 기록에서는 정도전이 공요론을 주장한 이유가 '명과 조선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보호를 위해' 했다고 나와 있다. 공요론 긍정자들은 이를 '정도전 부정하기' 의 일부분으로 본다. 그런데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공요론을 했다는 것이 왜곡이라면, 일단 이 기록 자체를 왜곡으로 전제하는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해당 기록을 살펴보면 정도전이 공요를 하기 위해 도참 등, 그런 짓 까지 했다는 식으로 쓰여져 있다. '사대' 를 앞세운 정도전의 사상체계를 봐도 해당 기록은 돌출적이다. 즉, 해당 기록에서 좋아 보이는 부분은 쓰고 나빠 보이는 부분은 지우는 식으로 취사선택할게 아니라, 기록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6. 조준의 졸기에 나온 정도전의 '동명왕의 영토를 회복하여' 하는 이야기는, 즉 정도전의 원대한 포부를 드러낸다기 보다는 사대 외교가 확실하게 자리 잡힌 시점에서 사가들의 비난적 서술에 가깝다.
17. 한 마디로 말해서 정도전의 '공요론' 은 '난신의 언설' 로서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실제보다 비중이 커지고 과장되어 실록에 남은 것이다. 그런데 욕하려고 과장시켜 남은것이 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 서술과 엮이면서 '민족자주' 의 연설로 탈바꿈 되었다. (서인 광해군 밀지설 정도로 이해하면 될듯)
다음은 해당 논문에 대한 학술회의에서의 담화록 내용 중 일부입니다.
그 뒤에도 한영우 교수라던지 몇몇 분이 말하고 한게 있었던것 같은데, 마침 책이 없어서 도서관가서 좀 찍어달라고 부탁한 친구가 뒤에는 못 찍었나 보네요.
본래 저는 왠만하면 읽는 사람이 편하게 쓴다는 주의지만, 아무래도 "썰" 을 푼다기 보다도 '주장'을 소개하는 것이니만큼, 주장하는 사람의 논지가 좀 곡해되거나 이해가 덜 되게 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해서 원문을 많이 올려 봤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정도전의 요동정벌 움직임은 '허깨비' 입니다. 정도전은 요동을 칠 생각도,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려는 생각도 전혀 없었고, 실질적인 목적은 군제개혁, 사병혁파 등 내부적 단속에 있었습니다. 모험을 꾀하려기보다는 오히려 안정을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공요론' 을 다룬 다른 주장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간 논지를 펼치는데, 요동 원정 계획의 실제 목적을 떠나서 요동 원정 계획 자체가 역사적으로 미미한 이슈 였다는 겁니다. 즉 조선 초기 명과 조선의 군사적 긴장 관계가 이어지며 이런 국제정세를 이용해 정도전이 요동 원정 계획 이야기까지 꺼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큰 틀의 정책 속에 단발적인 이슈 및 발언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요동 원정 계획은 곧 여러 정치적 논쟁 속에 사라진 과거의 작은 이슈가 되었으며, 정도전이 죽고 그가 역적으로 부정당할때도 언급되지 않은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사소한 이슈는 정도전이 죽고 한참 뒤, 조준이 새로운 젊은 정치계파에게 무자비한 정치공세를 당할때 자신이 정도전, 남은 등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검증' 적 요소로서 새롭게 등장합니다. 과거 자신이 정도전의 공요론이라는 단발적인 주장에 대해 반대한 적 있다는 것을 꺠달은 조준은 자신이 정도전의 정책에 이렇게나 반발한 사람이다라고 강조하며 공요론이 마치 엄청나게 큰 이슈이며 조정을 떠들석하게 했다는 마냥 이를 부풀렸습니다.
그리고 태종 5년 무렵, 조준이 죽을 무렵 이미 조선과 명은 군사적 긴장관계가 조선 건국 초기에 비해 거의 풀리고 조선의 외교 정책도 사대 정책으로 확실하게 굳혀졌습니다. 죽은 조준의 졸기를 쓴 태종 연간의 대신들은, 정도전을 한층 더 부정하는 차원에서 정도전이 '자신이 명나라에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요동 원정 계획을 짜고, (정확히는 남은이 한 말이지만)
고구려 동명왕의 영토를 회복하자는 둥, 외이가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된 일을 말하는 둥 하면서 도참까지 했다' 며, 역적 정도전이 이런 짓거리까지 했다는 식으로 욕하려는 목적에서 해당 기록을 남겼다는 겁니다.
정도전의 요동 원정론이 강렬한 자주의식의 발현이라는 사람 등의 경우엔 이 기록에서 '정도전이 자신의 안위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명나라와 싸우려고 나라 망하게 할뻔했다' 는 식의 서술을 '참으로 지나친 곡필' 이며 왜곡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해당 기록의 '고구려 동명왕의 땅 회복, 외이로서 중원에 들어간 사례 언급' 등등을 정도전의 자주의식, 포부 등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이 자기 안위 하나 지키려고 군사 동원해 전쟁 일으키려고 했다는 기록이 왜곡이라면, 해당 기록의 다른 부분도 왜곡이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더군다나 해당 기록이 작성된 시기는 이미 사대가 국시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이후입니다. 그런 시기에 '외이로서 중원에 들어가는 일' 등의 말을 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은, 그다지 좋지 못한, 즉 정도전을 욕하려는 의도에서 남긴 기록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정도전이 죽을 당시의 실록에서는 큰 이슈가 아니어서 언급조차 없었던 이야기가 뜬금없이 정도전 죽고 한참 뒤 조준이 죽고 난 뒤 조준의 일대기를 다룬 기록에서 다시 언급된다는 것이죠.
헌데 정도전을 욕하려고 남긴 기록이, 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 서술과 연결되면서 정도전의 원대한 포부와 자주의식, 중원 공격 계획의 구체적인 면모를 이야기하는데 쓰여집니다. 마치 광해군 욕하려고 만든 서인의 광해군 강홍립 밀지설이 현대에 들어 광해군의 중립 외교 식견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야기 되는 것처럼요.
정도전의 '공요론' 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정반대로 바꿔서 볼 수 있는, 재밌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주장' 중 하나일 뿐이지 '정설' 이 아니며, 학술회의 다른 교수들도 지적했듯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논지의 몇몇 전개 과정에서 약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던 만큼, '믿으라' '이게 정답이다' 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좀 더 새로운 시각에서 공요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재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