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구상만 했놓고 있다가 밑에 신불해님의 글을 보고 글을 쓰려고 합니다.
군웅할거의 조건
먼저 한나라말기 즉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되었던 황건적의 난이 일어납니다. 그 넓은 중국대륙에서 때로는 대규모 황건적들이 뭉치고 때로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황건적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런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난들을 중앙정부에서 제어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이때 한의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것도 있고요. 그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들은 난으로 부터 스스로 지키기위해 군대를 자체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난을 제압 할수 없었던 중앙정부는 호족들이 군대를 만드는 것에 대해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황건적의 난이 진압이 되었죠.
문제는 그 이후 부터 입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걸 안 호족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서로치고 박고 싸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는 멸망하고 군웅할거시대로 돌아서게 되죠.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삼국지의 시작입니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장수들 육성
글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제가 삼국지에 대해 글쓰려는건 아니고요 본 주제로 넘어가서
공민왕은 고려를 개혁할려면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었고요. 그런데 150년 동안 사실상 원에 지배를 받는 동안 고려에는 제대로된 군사라곤 있을수 없었고요. 또 한 그들을 지휘할 장수들도 없었지요
그때 마침 홍건적난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원나라가 고려에게 원병을 요청을 합니다. 이때 공민왕은 원의 정세도 정탐할 겸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을 겸으로 40명의 장수들과 2만여명의 병사들 파병을 합니다. 이 40명의 장수들 중 공민왕 초기에 활약했던 인당, 뒤에 이야기가 나올 4원수 중 안우, 이방실, 흥왕사의 난을 일으켰던 김용, 고려의 최후의 보루인 최영 까지 공민왕때 활약한 왠만한 장수들은 이 40명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아무튼 이들은 원나라 재상 탈탈의 군대의 편입되어 홍건적 세력 중 가장 큰 장사성을 쳤고 고려군사들은 최전방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그런데 탈탈이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면서 전쟁 도중에 직위 해제되고 처형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결국 유리한 국면에서 원나라 군대는 이 사건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고 고려군사들도 귀국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는 이 파병으로 원나라가 기울어 가는것을 알았고 군사와 장수들은 중원에 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을 하게 되죠. 특히 이 장수들은 이후에 공민왕의 강력한 반원정책에 바탕이 되어 여러곳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홍건적의 고려 침입
화북지역에서 활약했던 홍건적들이 원나라 군사들에게 쫒겨 만주지역까지 들어서게 됩니다. 이들은 고려를 근거지를 삼고 다시재기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1차때 4만명을 보냈지만 막혔고 2차때 전병력 20만을 총동원해 고려를 침입 하게 됩니다. 이때 고려는 앞도적인 숫자로 침입해오는 홍건적을 막을수 없었고 결국 수도 개경을 내주게 됩니다.
고려는 각 장수들을 지방에 파견해 군사를 모았고 그렇게 긁어모은 병력이 20만이 됩니다. 20만이 얼마나 큰 숫자냐 하면 인구나 수취 체계등 모든것이 앞서 있던 조선이 임진왜란 7년동안 총동원된 병력이 18만이라 합니다. 이것도 중복된 병력도 포함된것이며 근대 이전에 우리나라 역사상 20만 이상 병력을 모은것은 고구려때 당과 전쟁, 고려때 2차, 3차 거란 전쟁 그리고 2차 홍건적 침입 딱 네 차례 밖에 없습니다. 당시 고구려야 큰 나라이고 거란전쟁때 고려는 전성기였던 시절이지만 홍건적 침입때 고려는 원에 수탈, 왜구의 침입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수준이였죠. 이런 상황에서 그 야말로 탈탈 털어서 모은 병력이 20만 입니다. 정세운을 총대장으로 삼고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적을 몰아내고 그들을 전멸 시킵니다. 이때 화북지방의 홍건적 지도자들도 다 죽음으로 화북지방 홍건적은 소멸하게 되죠
전쟁 이후...
전쟁은 끝났지만 논공행상에서 장수들은 대립하게 됩니다. 전쟁을 총 지휘 했던 정세운과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안우, 이방실, 김득배등이 입니다. 이른바 4원수라고 하는데요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20만이라는 그 당시 고려가 감당할수 없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내란이 발생 될수 있는 상황이였죠. 특히 그 당시 고려는 사병을 가질수 있던 시대였고 그렇게 모아진 20만이 사병으로 흡수 되어질 가능성이 컸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말기에 가면 수조권을 가진 권문세족들이 그 지역의 영주화가 되버리죠. 장수들중에는 권문세족도 있고요. 아무튼 그들이 대립해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면 위에 말한 한말기 처럼 중앙정부에서 그들을 통제할수 없고 사병화된 20만을 각 장수들이 나눠가지면서 지방의 영주화된 권문세족가 손잡고 장기적인 권력 쟁탈전을 벌일수도 있는 상황이였죠
그러나 김용의 농간인지 공민왕의 계획인지 이 4원수들은 전쟁이 끝나고 한달도 안되서 죽게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신불해님 글보면 되겠습니다.
마무리
4원수들이 한꺼번에 죽게되면 전후 혼란한 상황은 막았지만 공민왕이 유학(?)까지 보내서 키운 장수들이 대부분 죽으면서 군사적 공백은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런 군사적 공백은 공민왕의 강력한 반원정책이 제동이 걸릴수 밖에 없고 반원정책으로 시작한 전체적인 개혁에도 차질이 올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 공민왕초기부터 괴롭혔던 왜구들을 막을 수 있는 실력있는 장수들도 부족해지면서 효과적으로 왜구를 막지 못해 고려 전체가 왜구에 시달릴수 밖에 없게 되죠
가장 중요한건 신하들이 더 이상 고려에 충성하지 않는 다는거죠 4원수 몰살 이전에도 인당이라고 공민왕 초기에 혁혁 공을 세운 장수도 결국 죽어 버린 사건도 있었죠 목숨 바쳐 고려를 지켰는데 돌아오는건 죽음이라면 누가 목숨바쳐 고려를 지킬려고 하겠습니까?
결국 공민왕은 자신이 아끼던 신하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나라 고려도 충성하지않는 신하와 장수들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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