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12/23 01:34:28
Name 지금뭐하고있니
Subject [일반] 지난주
지난 주에는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갔다.
대학간다고 서울에 간 이래 생일을 한 번도 함께 보낸 적이 없다는 엄마의 말이 꽤나 서글펐기 때문이다.
사실 어렸을 적에야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또 선물을 받기 위해 자기 생일을 기다린다지만,
어느 만큼 머리가 굵어지고 나면 낳고 길러준 부모님께 감사를 해야 하는데, 그리도 무심했구나 싶었다.
결국 그 한 마디에 미루던 결정을 짓고 내려가니, 언제나처럼 환한 두 분 얼굴이 너무도 행복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마음 속 얘기 한 움큼, 눈물 한 줌 쏟아내니
사람 사는 게 별 게 아니라는 개똥철학이 머리를 스친다.

엄마는 생일 날엔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며,
학교 식당에서 그리도 자주 나온다는 미역국을 해서
벌써 10년째 챙겨먹지 않은 아침을 꾸역꾸역 먹인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은 미역국을, 자다가 일어나 먹으려니
고역일 법 한데, 의외로 술술 넘어간다.
역시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하는가 보다.

그리곤 오랜만에 생일 선물을 한다며,
커다란 아울렛에 데려가 이 옷도 입히고 저 옷도 입혀본다.
그 놈의 자식사랑이 뭔지
운동화 신은 내 발바닥도 슬슬 아파오는데
이미 봐둔 옷들이 있다며
구두를 신고서 잘도 찾아나선다.
어제는 그 마음에 드는 코트가 비싸다며 쥐었다 놓았다 하더니
오늘은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자며 쥐었다 놓는다.

돌아오기 전 마지막 밤 아들보다 한참 나이먹은 엄마는 못난 자식이
나이 먹는 게 애닳아 TV에서 봤다며, 처음 보는 팩을 만들어 온다.
이리 누으라더니, 아들 얼굴에 한 번 칠하고,
조금 남았다며, 남편 얼굴에도 한 번 칠을 한다.
그 덕에 엄마의 말썽꾼, 아들놈과 배나온 아빠가 나란히 눕는다.
제법 웃긴지, 엄마 얼굴에 살포시 웃음이 샌다.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그렇게 팩을 끝내고선,
지나간 영화를 한 편 찾아 가족 셋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다.
예전엔 성룡 영화를 제외하곤
영화만 켰다하면 액션, 스릴러 가릴 거 없이
연신 졸아대던 아빠가 눈 한 번 감지 않고 보는 게 아들은 마냥 신기하다.
따뜻한 전기장판 위 푹신한 이불 아래서
아들은 영화에 몰입한 두 사람이 너무도 정겹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엄마가 문득 지나가듯 말한다.



"같이 살면 좋겠다."

생각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는다는데,
나는 개구리 띠도 아니건만, 여직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다.
내년에는 조금 더 자주 찾아야겠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수면왕 김수면
15/12/23 06:2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타지에서 오래 살다보면 엄마가 해주는 밥 한끼가 그렇게 그립더라고요. 저도 자주 찾아뵙고 싶지만, 그놈의 먹고사니즘이 뭔지......
그리움 그 뒤
15/12/23 10:12
수정 아이콘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싶은 글이네요.
15/12/23 11:26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도들도들
15/12/23 13:29
수정 아이콘
글에 템포가 있네요. 잘 봤습니다.
살려야한다
15/12/23 13:3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5/12/23 16:49
수정 아이콘
짠 하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2825 [일반] 젊음의 피를 드릴테니 노동개혁으로 답해주세요 [33] 어강됴리7639 15/12/29 7639 10
62824 [일반] [잔인함 주의] 어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21] 저 신경쓰여요7532 15/12/29 7532 38
62823 [일반] 임금피크제..찬성하십니까? [48] 굿리치[alt]7887 15/12/29 7887 0
62822 댓글잠금 [일반] 위안부 문제 협상 - "박근혜 정부 잘했다." [43] 삭제됨8920 15/12/29 8920 0
62821 [일반] 엄마. 나야. 책 나눔 후기입니다. [2] 내장미남2806 15/12/29 2806 4
62820 [일반] 수학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중고등학생의 외침) [109] 파란무테13667 15/12/29 13667 3
62819 [일반] 안철수 의원 더불어민주당 당명가지고 조롱 [203] 에버그린14249 15/12/29 14249 1
62817 [일반] 나의 연극이야기3 [24] 정짱5632 15/12/29 5632 7
62815 [일반] 가디언지, 위안부 협상 합의는 일본과 미국의 승리 (기사번역) [51] aurelius10760 15/12/29 10760 16
62814 [일반] 크리스마스에 단합대회로 산에 올라갔다가 사망한 사건입니다. [70] 무한궤도15553 15/12/29 15553 1
62813 [일반] 안 그럴거 같죠? 백프롭니다. [93] 에버그린19128 15/12/29 19128 86
62812 [일반] 이별했네요.. [15] 하루하루7316 15/12/28 7316 0
62811 [일반] [사진 압박] 동물 보호소 이야기. [24] OrBef6759 15/12/29 6759 13
62810 [일반] 헌법재판소의 '한일협정' 사건 판단에 대해서 [32] 이순신정네거리5934 15/12/29 5934 5
62809 [일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흥행 수입을 올린 공룡 영화 Top10 [4] 김치찌개4572 15/12/29 4572 1
62808 [일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자하고 있는 기업 Top10 [6] 김치찌개5422 15/12/29 5422 1
62807 [일반] [다양성 영화] 소녀가 또 [6] 양주오5084 15/12/28 5084 2
62806 [일반] 배드민턴... 배드민턴을 (시작해)보자! [19] 별이돌이7810 15/12/28 7810 7
62805 [일반] 2015 올해의 말 [29] 어강됴리7906 15/12/28 7906 4
62804 [일반]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Top10 [4] 김치찌개5048 15/12/28 5048 1
62803 [일반] 동네형님 재능기부 후기 - 참고 해야 하는데 [9] 불타는밀밭4749 15/12/28 4749 2
62802 [일반] nice, ill, alive, utter 가운데 가장 형용사다운 형용사는? [19] Neanderthal5677 15/12/28 5677 2
62801 [일반] [K리그] 클래식 개막전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43] 흐흐흐흐흐흐5195 15/12/28 5195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